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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집(沙西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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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사업]한국학 기초자료사업
영남학파의 사유세계와 역사인식 -영남학파 문집 상세 해제 및 주요저작 번역- (2단계)
서지사항
분야문학
유형문헌
시대조선
출전영남학파의 사유세계와 역사인식-영남학파문집 상세 해제 및 주요 저작
문서종류문집 해제

본문

卷1

次答聞喜倅(沈宗直)問梅, 寒食, 瀟湘竹, 次 任茂叔(叔英○附原韻), 省中聞蝦蟆, 宿軍威 官舍夜雨有感, 祇林贈僧, 黃龍偶吟, 哀六朝 (乙酉), 宮詞, 次題五德寺僧詩軸, 辛亥偶吟 (時遇兩賢被詆之事), 讀宋史(前賢被誣於人 故云云), 過柳浦灘有感(幷小序), 四皓, 城下 釣, 麥浪, 殘菊, 大夫松, 鶉鷹, 述事(三首), 劍 舞, 舟行(此下朝天時作○乙酉), 長山島留泊 (二首), 皇城大洋遇風, 題慈雲扇(皇城島寺僧 也), 贈慈雲, 皇城夜泊, 廟島偶吟, 登州卽事, 過呂東萊讀書堂, 過雍齒墓, 過濰水, 過晏平仲 故里, 過牛山, 過齊景公墓, 過齊桓公墓, 德州 曉行憶諸兒廬次(時有夫人喪), 初到玉河觀卽 事, 朝天宮習儀, 冬至進賀(二首), 玉河館詠雪 次張說和聖製韻, 夜坐, 記夢, 見毛帥揭報有呈 文辨誣之意而勢有難便因述已志示兩觀同行, 得諸契見和又次以呈, [又酬南宮先生(四首)] 其一念亂, 其二排憫, 其三思歸, 其四, 通州道 上又用前韻, 白溝途中口號(此實督亢地方也權 宦魏忠賢方築私室), 到車牛島(去陸數百里), 悼渰海諸人, 南別宮親祭日入直禁中夜聞雨聲, 宿淸心樓, 次松亭大父紫玉山淨惠寺韻(寺在慶 州○附原韻), 寄愚翁(在慶州時), 臘月八日(是 日家有醮詞), 鳳凰臺餞金總兵(俊龍○辛未), 旅 夢, 夜泣(丁丑), 晩全堂口號(西厓堂號), 次新 寧竹閣韻謝主倅宋福如(爾昌), 輓李方叔, 送康 使君(復誠)任滿還京, 輓金柏巖(玏), 別東園 令棄任歸京, 謝一善倅柳仲嘉送綵囊, 寄愚伏, 輓 李茂伯(潤雨), 雙溪卽事, 輓金持平(瑄)改葬 (延興之子十五遭禍今贈職名仍命改葬), 慈殿立 春迎祥, 送權霽仲賀至, 送姜任甫奉使日本, 示 全上舍(命龍), 輓李貳相(尙懿), 送趙睡軒(存 性)按節關東, 次西厓先生韻題雲巖精舍, 送愚 伏朝天(二首), 輓李叔平(埈), 輓張旅軒(顯光), 韓國國學振興院 所藏 文集解題 15 輓睦湯卿(大欽), 輓李加平(惇五), 輓鄭檢閱 (杺), 陰城曉行, 輓趙安仲(安仲), 輓金無悔(知 復)二首, 輓金大憲, 輓李監司(현[示+玄]), 輓 金持平(奉祖), 輓曹修撰(文秀)慈堂沈氏, 輓 崔判尹(瓘), 謝金陵倅送米豆, 贈李茂伯赴潭 陽, 九日禁中憶南鄕舊遊, 輓金士修, 謝海西伯 送灑金首陽梅月, 次鄭校理(雴)韻, 輓李槐山 (德胤), 次慶州東軒韻示接儒, 次崔上舍(東彦) 湖亭韻(二首), 次東都客館韻, 次西岳書院李 龜巖韻, 病中偶吟, 輓長源君黃(性元), 輓權參 判守之, 輓康知事明之, 送鄭輝遠(蘊)謫濟州, 送兒還鄕, 輓柳季華(袗), 輓金竹日(光曄),


卷2

次謝李潤卿(睟光)四首, 輓趙棐仲(翊), 送 全性之(以性)謫扶安, 送李從事(尙古)奉使日 本, 次尹牧伯先覺韻送金淸州(弘敏), 輓韓益 之(浚謙), 輓西厓先生, 送李思彦歸覲淮陽, 贈 吳景虛(曾判鶴城故七八句及之), 處容巖贈李 摠兵(侃), 送金晦仲(寭)赴魚川, 送孫季進(遴) 還鄕, 段邨山莊寄呈城主使君(二首), 次金無 悔玉峯精舍韻(二首), 輓吳慶州(澐), 奉別牧 令丁士優(好善)棄任還京, 輓鄭統制(起龍), 輓 盧上舍(碩命), 輓李慶山, 公山會席醉吟(二首), 洛社會次李叔平韻, 輓金進士吉伯, 輓康明甫 (應哲), 壬戌秋遊分韻得淸字(幷序), 輓盧榮 川(大河), 次玉成壁上韻, 題彰賜亭集端, 次沙 溪亭韻(幷小序), 輓沈直長(大臨), 穆陵改葬 輓(二首), 輓鄭景任(經世), 新寧竹樓次退陶 先生韻, 衙養雎鳩一日高飛被人尋還, 輓晉昌 君姜(絪), 輓鄭相國(昌衍), 送李承旨(汝復) 赴襄陽, 輓綾城府院君具(宏)夫人, 錢塘訪圓 澤雙韻(月課), 騅馬行, 落月滿梁, 輓金景守, 金櫻花, 聞賣鷹買板, 輓宋上舍(彦明), 輓姜石 峯(䨞), 輓趙景長內助, 輓金景溫, 輓柳汝章, 輓丁興海(好寬), 輓沈淸風, 輓朴(永緖), 輓宋 主簿(亮), 輓成芙蓉堂(安義), 贈別趙棐仲西 行, 輓李大邱(穧), 輓崔判尹夫人改葬, 輓全奉 事(磊), 輓黃君吉, 輓呂(大老)

卷3

敎朴惟明書 1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했던 朴惟明(1582 ∼1640)에게 내려진 교서인데, 저자가 임금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박유명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尙州, 자는 炯夫이다. 1620년(광해군 12) 무과에 급제하고, 訓鍊院 僉正‧滿浦僉使 등을 지냈다. 1623년 광해군의 폭정에 항거해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그는 德源府使로 平山府使 李貴와 함께 반정에 참여하였는데, 이 공으로 靖社功臣 3등에 오르고 商原君에 봉해졌다. 이어 서산 군수를 거쳐 堂上宣傳官‧五衛將 등을 역임하고 1628년 (인조 6) 嘉善大夫로 加資되었다. 사후에 공조판서에 추증되었다.

辭修撰疏(1623) 1
1623년(인조 1) 수찬에 임명되었을 때 올 린 사직 상소이다. 자신은 어려서 스승과 벗을 쫒아 講磨한 힘도 적고 중간에는 난리를 만나 학문을 폐하였다고 하였다. 뒤늦게 요행 히 과거에 합격하였지만 문장을 꾸미는 재주 만 익힌데다가 근래에는 오래도록 병을 앓아 정신이 혼몽하므로 임금의 지척에서 중요한 직책에 종사할 가망이 전혀 없다고 하였다.
辭給馬疏(1624) 2
1624년(인조 2) 2월 23일 부인 南陽洪氏가 세상을 떠났을 때 禮賓寺正으로 체차되어 고향에 내려가면서 올린 상소이다. 당시 승지 의 신분으로 부인의 喪次에 달려가는데 조정 에서 말을 내어주었기 때문에 이를 사양하는 내용으로 작성된 것이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하여 휴가를 얻었는데 규례 외에 특별히 말을 내주시니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 다고 하였다. 다음달 13일은 아내를 장사지내 는 날이고 17일은 小祥이어서 바로 올라올 수 없는 사정이 있으니, 현재 맡고 있는 직책 을 삭직하고 말을 내어준다는 명을 거두어달 라고 하였다. 江華封事(1627) 3 1627년(인조 5) 2월 丁卯胡亂이 일어나 어 가를 扈從하여 江都로 내려갔는데, 조정에서 和議를 의논하자 이에 반대하는 내용으로 올 린 상소이다. 지금 千乘의 존귀함을 굽혀 미 천한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설령 이 일로 인하여 나라가 편안해진 다 해도 저들은 갈수록 더 무리한 요구를 해 올 것이기 때문에 백성들의 재앙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임진강일대를 잘 방어 하여 지키는 한편 압록강을 차단하고 전국의 양곡과 장병을 모집하여 적을 물리쳐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이 상소에 대해 인조는 “疏章 을 보고 그대의 정성을 잘 알았다. 상소의 내 용은 마땅히 잘 헤아려 처리하겠다. ”라고 비 답을 내렸다.
辭副提學疏 5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었을 때 身病을 이유로 올린 사직 상소이다.
辭吏曹參議疏(1637) 6
1637년(인조 15) 3월 이조 참의에 제수되 었을 때 올린 사직 상소이다. 당시 저자의 나 이는 75세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저자의 장남 克恒이 예조 정랑으로 인조 를 호종하여 南漢山城으로 들어가려다가 서 울을 지키라는 왕명을 받고 다시 都城으로 돌아왔는데, 수십 일을 머물며 성을 지키다 가 결국 적군에게 피살된 일이 있었다. 그 후 난이 진정되고 나서 저자가 상경하여 그 일 을 듣고는 자신의 사정을 호소하며 사직을 청한 것이다. 이에 대해 인조는 “그대의 疏 章을 살펴보고 내 마음이 매우 놀랍고 슬펐 다. 그대의 사정이 이러하더라도 모름지기 나랏일을 염두에 두어 내려가지 말고 또한 굳이 사양하지 말라. ”라는 답을 내리고, 이어 특별히 克恒을 도승지에 추증한다는 은명을 내렸다.
辭吏曹參判疏(1637) 7
1637년(인조 15) 4월 嘉善大夫吏曹參判 兼同知經筵春秋館事에 제수되었을 때 올린 사직 상소이다. 당시 저자의 나이는 75세였 다. 자신은 나이가 많고 병이 깊은데다가 지 난번 전장에서 장남을 잃은 일로 인하여 하 루하루를 지내는 것이 일 년을 사는 것처럼 길게 느껴지고 늘 바늘방석에 앉은 듯 편치 않다고 하였다. 근래에는 太廟에 친림하여 제사를 지내는 일로 인하여 폐백을 올리는 일을 대행하게 되었는데, 이 일이 비록 어려 운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근력과 정신으로 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전례대로 이조의 당상에게 이 일을 맡기고 자신은 체차해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상 소에 대해 인조는 윤허하지 않았다는 비답 을 내렸다.
遷葬乞暇疏(1637) 8
1634년(인조 15) 7월 부친의 무덤을 遷葬 하기 위해 휴가를 청하는 상소이다. 부친의 산소가 낮고 습한 지역이어서 처음 장례를 치를 때 걱정했는데, 여러 해가 지난 뒤에 보 니 비가 많이 오면 물이 차서 민망하다고 하 였다. 그러다가 지난해에 移葬하자는 논의가 정해져 장소를 물색하여 틈나는 대로 功役을 진행하여 금년 8월에 행사를 치를 계획이라 고 하였다. 그런데 主祭할 사람이 없어 거행 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사정을 감안하여 특별히 휴가를 주어 자식된 도리를 마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였다.
辭大司諫疏(1639) 8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을 때 年老하고 身病이 깊다는 이유로 올린 사직 상소이다. 당시 저자의 나이는 77세였다.
辭大司憲疏(1638) 9
1638년(인조 16) 2월 사헌부 대사헌에 제 수되었을 때 올린 사직 상소이다. 당시 저자 의 나이는 76세였다. 지난 가을에 휴가를 얻어 부모의 묘소를 遷葬했는데, 당시에는 조정 으로 돌아올 기한이 급하여 분묘만 이루고 미처 莎草를 입히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올봄 寒食을 기다려 加土하고 莎草를 입힐 계획이었는데 뜻밖에 대사헌에 제수하는 명 이 내려 그 일을 마무리 할 수 없게 되었으니, 沙西集 본직을 체차하여 자식된 도리를 다하게 해달 라고 하였다.
辭大司諫疏(1640) 9
1640년(인조 18) 4월 사간원 대사간에 제 수되었을 때 年老하고 身病이 깊다는 이유로 올린 사직 상소이다. 당시 저자의 나이는 78 세였다.
辭大司憲疏(1639) 10
1639년(인조 17)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 었을 때 年老하고 身病이 깊다는 이유로 올린 사직 상소이다. 당시 저자의 나이는 77세였다.
辭副提學疏(1637) 11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인조가 南漢山城으 로 피신했다가 1637년(인조 15) 1월 30일 都 城으로 돌아왔을 때 저자가 안부를 묻기 위 해 급히 도성으로 달려갔는데, 그 때 부제학 에 제수한다는 명이 내렸다. 당시 저자의 나 이는 75세였는데, 자신은 노쇠한데다가 병까 지 깊기 때문에 나랏일을 맡아볼 가망이 없 다고 하였다. 箚 諫院論君德箚(1634) 12 1634(인조 12)년 대사간으로 있을 때 임금 의 덕을 논하는 내용으로 올린 상소로, 당시 저자의 나이는 72세였다. 이에 대해 인조는 “상소의 내용을 잘 살펴보았다. 그러나 지난 날 죄를 입은 자들은 그 죄가 적지 않으니 관 대하게 유시하고 석방하는 것은 불가하다. 말 미에 진달한 말은 참으로 지극한 논의이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라는 비답을 내렸다. 啓 論麟坪婚事啓(1634) 14 1634(인조 12)년 대사간으로 있을 때 올린 啓辭로, 인평대군의 혼례가 예에 맞지 않음을 간언하는 내용이다.
論麟坪婚事啓[再啓] 14
위와 같은 내용으로 재차 올린 啓辭이다.
朝講榻前啓 15
朝講을 할 때 榻前에서 올린 啓辭인데, 대체로 선입관을 버리고 마음을 비운 다음 諫官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大司諫避嫌啓 15
지난번 朝講에서 올린 말이 와전되어 임금을 능멸한다는 소문이 퍼졌는데, 이는 모두 자신이 제대로 의견을 진달하지 못한 잘못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현 직책에서 체차해 달라고 청하였다.
嚴宮禁啓(1633) 16
조정의 기강을 확립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올린 啓辭인데, 이에 대해 인조는 온화한 말로 비답을 내렸다.
經筵講義(癸亥) 16
1623년 8월 13일부터 24일까지 경연에서 『論語』를 진강한 내용으로, 날짜별 주제는 8월 13일에 ‘子曰 觚不觚 觚哉觚哉’, 8월 14일 에 ‘子見南子’와 ‘子曰 中庸之爲德也’, 8월 20 일에 ‘子之燕居 申申如也’와 ‘子曰 甚矣吾衰 也’, 8월 23일에 ‘子曰 志於道’, 8월 24일에 ‘子 曰 自束修以上’과 ‘子曰 不憤不啓’와 ‘子於是日哭則不歌’에 대한 講論이다.

卷4

答鄭景任 1
鄭經世(1563∼1633)에게 보낸 답장이다. 본관은 晉州, 자는 景任, 호는 愚谷‧愚伏‧一 默‧荷渠이고 初諡는 文肅, 改諡는 文莊으로, 尙州 출신이다. 柳成龍의 문인으로 저자와는 동문수학하며 학업을 講磨하고 자주 從遊하며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서로 상의하였다. 보내준 詩와 편지는 잘 받아보았다고 하였다. 淵岳山이 멀지는 않지만 앓고 있는 병이 낫지 않아 24일이나 25일까지 움직이는 것은 무리라고 하였으니, 당시 鄭經世가 이 산에 머물고 있었던 듯하다. 연악산은 善山都護府 의 서쪽 32리 지점에 있는데, 이 산의 북쪽 支脈은 곧 尙州의 甲長山이다.
答李叔平 1
李埈(1560∼1635)에게 보낸 답장이다. 본관은 興陽, 자는 叔平, 호는 蒼石으로, 柳成龍의 문인이다. 殿試에 급제하여 전적‧교리‧참의 등을 지냈으며, 西厓學派의 중진으로 정경세와 함께 쌍벽을 이루었다. 저서에『蒼石集』이 있다. “병으로 약속 장소에 나가지 못할 듯하다. ”는 말이 있는데, 그 약속은 아마 앞의 답 장에서 언급했던 ‘정경세와의 약속’과 같은 자리인 듯하다.
答康明甫 1
康應哲(1562∼1635)에게 보낸 답장이다. 본관은 載寧, 자는 明甫, 호는 南溪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鄕兵을 모집하여 尙州를 지켰다. 후에 鄭起龍의 의병과 합세하여 각지에서 왜병을 무찔렀다. 벼슬은 察訪에 이르렀으나 광해군의 亂政에 분개하여 은퇴하고, 향리에서 독서와 저술로 일생을 보냈다. 상주의 淵岳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南溪遺稿』가 있다. 禮設에 대해 정성스럽게 반복한 편지를 받으니 마치 곁에서 辯論하는 듯하여, 기쁘기 그지없다고 하였다. 다만 인편이 없어 바로 답하지 못한 것이 한이라고 하였다.
答康明甫 2
康應哲에게 보낸 답장이다. 정겨운 편지를 받아보니 마음에 위로가 된다고 하였다. 愚伏을 보낸 뒤로는 늘 마음이 허전하였지만 어찌 계속 이렇게 외로워 할 수 만 있겠느냐고 하였다.
答康明甫(1624) 2
康應哲에게 보낸 답장이다. 저자의 부인 南陽洪氏가 세상을 떠난 해에 보낸 편지로 당시 저자의 나이는 62세였다. 먼저 喪事에 위문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였다. 강응철이 당시 言官의 위치에 있었던 듯한데, 경솔하게 거취를 결정하지 말라고 조언하였다.
與金冠玉(瑬)2
金瑬(1571∼1648)에게 보낸 편지이다. 본관은 順天, 자는 冠玉, 호는 北渚이고 시호는 文忠이다. 1596년(선조 29) 문과에 급제하였 다. 1623년 인조반정 때 대장으로 추대되었고 거사의 성공으로 靖社一等功臣에 책록되었 다. 이후 인조의 절대적 신임 속에 이조판서‧ 좌의정‧都體察使‧영의정 등을 역임하면서 인 조 초‧중반의 정국을 주도하였다. 문집으로 『北渚集』이 있다. 자세한 언급이 없어 단언 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병자호란이 끝난 뒤 전란 당시 있었던 일에 대해 문의하는 내용 인 듯하다.
答全性之 3
全以性(1578∼1646)에게 보낸 답장이다. 본관은 龍宮, 자는 性之, 호는 雲溪이다. 鄭逑, 鄭經世의 문인이다. 1606년(선조39) 式年試 에서 丙科 9위로 급제하여 군현의 현감을 지 냈는데, 그 중 고성과 합천에서는 그의 선정 을 기리며 去思碑를 세웠다. 광해군 때 낙향 하여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가 인 조반정 이후 다시 벼슬에 올라 宗簿寺 正에 임명되어 춘추관 편수관을 겸직하면서『광해군일기』편찬에 참가하였다. 이괄의 난(1624) 이 일어났을 때 공을 세워 1등 공신에 등록되 었다. 저술로는『雲溪集』『解携錄』『尋話錄』 이 전한다. 이 답장의 내용으로 추측하건대, 全以性이 앞의 편지에서 朱書를 다시 간행하 는데 대한 일을 논의한 듯하다.
答全性之 3
全以性에게 보낸 답장이다. 朱書의 일, 潘 君의 일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 하였다.
與全性之 4
全以性에게 보낸 편지이다. 姜正涉의 죽음, 李茂伯이 大賢을 모욕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은 일, 등에 대해 언급하였다.
答全性之 5
全以性에게 보낸 답장으로, 일상적인 안부 를 묻는 편지이다.
答全性之 5
全以性에게 보낸 답장이다. 鄭經世의 일, 洪鎬(1586∼1646)의 근황 등에 대해 언급하 였다.
答黃會甫(紐) 5
黃紐(1578∼1626)에게 보낸 답장이다. 본 관은 長水, 자는 會甫, 호는 槃澗이다. 鄭經世의 문인으로, 1612년(광해군 4) 생원이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616년 승정원 주서, 지평, 경성 판관 등을 역임하였 다. 어릴 때부터 뜻이 높고 재능이 뛰어났으 며, 관직생활 중에는 거취를 분명히 하였다. 정경세가 仁城君 李珙을 처리하는 문제 때문 에 탄핵되었던 일을 언급하면서 불편한 마음 을 드러내었다. 또 李埈 역시 筵席에서 이 일 을 말했다가 臺諫의 탄핵을 받았으니 매우 한스럽다고 하였다.
答崔季昇(1637) 6
崔睍(1563∼1640)에게 보낸 답장이다. 본 관은全州, 자는季昇, 호는訒齋이고, 鄭逑의 문인이다. 1606(선조 39)년 증광문과에 병과 로 급제하여 1608년 예문관대교에 제수되었 다. 인조반정 후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고, 이 듬해예부종사관을거쳐형조참의‧부제학‧ 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문집으로 『訒齋集』이전한다. 예조판서에추증되었 고, 시호는 定簡이다. 이 편지에서는 병자호 란을 격은 후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 우려를 드러내었다.
與康明之 6
康復誠(1550∼1634)에게 보낸 편지이다. 본관은 信川, 자는 明之, 호는 竹磵이다. 이 편지에서는 詔使의 일정 등 時事를 간단하게 언급하였다. 與高善承(仁繼)洪叔京(鎬) 6 高仁繼(1564∼1647)와 洪鎬(1586~1646) 에게 보낸 편지이다. 고인계의 본관은 開城, 자는 善承, 호는 月峰이다. 1605년(선조 38) 진사가 되고, 이듬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 忠淸道都事‧ 禮安縣監 등을 거쳐, 1645년(인조 23) 龍驤衛 副護軍이 되었다. 尙州 孝谷書院에 배향되었다. 홍호의 본관은 缶溪, 자는 叔京, 호는 無住‧東 洛이고, 경북 聞慶출신이다. 鄭經世의 문인으 로, 1606년(선조 3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하였다. 李适의 亂이 일어났을 때 정경세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웠다. 예조 정랑, 安陰縣 監‧예조 참의‧우부승지 등을 거치고, 1645(인 조 23)년 대사간이 되었다. 국방과 민생 문제 에 관심이 많아 西北民의 賦役을 덜어 주고, 統營에 城柵을 쌓았다. 또 砲手를 양성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號牌法의 시행 등을 주장하였다. 저서에『無住逸稿』가 있다. 이 편지는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내용이다.
答高善承洪叔京 7
高仁繼와 洪鎬에게 보낸 답장이다. 士林의 일에 대해 우려를 드러낸 다음, 의병에 대한 일과 李弘祚(1595∼1660)의 근황 등을 언급 하였다. 이홍조의 본관은 韓山, 자는 汝廓, 호 는 睡隱으로 柳成龍의 외손자이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었다는 소 식을 듣고, 安東에서 鄕兵을 모아 영남의병대 장인 저자와 함께 도성으로 진격했는데, 도중 에 和議가 성립되자 해산하였다. 문집에『睡隱遺集』이 있다.
答金汝涵(瀁) 7
金瀁에게 보낸 답장이다. 김양이 어떤 인 물인지는 미상이다. 그러나 편지의 내용으로 추측하건대, 저자의 아들이 근처에 가 있었거 나 문하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듯하다. 당시 김양이 저자에게『易學啓蒙』빌려달라고 요 청한 듯하다.
答趙汝完(光璧) 7
趙光璧(1566년∼1642년)에게 보낸 답장이 다. 본관은 豊壤, 자는 汝完, 호는 北溪이다. 柳成龍의 문인으로, 1606년(선조 39) 式年試 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鄭經世 등과 咸昌 黃嶺寺에서 倡義하여 싸웠다. 저서에『北溪先生文集』이 있다. 尙州 淵嶽書院에 配享 되었다. 당시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는 내용으 로 通文이 돌아 앞의 편지에서 이 일을 의논 해 온 듯한데, 이 편지는 그에 대한 답으로 보 낸 것이다. 이 일은 아래에서부터 백성들의 분노가 쌓여 형성된 여론이기 때문에 몇몇 사람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또 영남은 나라의 공론이 나오는 곳 이고 상주 지역은 영남에서도 근본이 되는 곳이니, 우리가 이 통문에 응하여 倡義하는 지 그렇게 하지 않는 지에 따라 피차간의 攻 勢가 달라질 것이라고 하였다.
答趙汝完 9
趙光璧에게 보낸 답장이다. 출정을 앞두고 안부를 묻는 내용으로 보인다.
與趙汝完 9
趙光璧에게 보낸 편지이다. 당시 戰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答盧弘仲(景任) 9
盧景任(1569∼1620)에게 보낸 답장이다. 본관은 安康, 자는 弘仲, 호는 敬菴으로, 張顯 光과 柳成龍의 문인이다. 1591년(선조 2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을 거쳐 홍문관정자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 나자 고향에 돌아와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 에 대항하였다. 사헌부지평, 예조 좌랑, 江原 道巡按御使, 예조 정랑, 知寧海府事, 성주 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문집으로『敬菴集』 이 있다. 당시 會合이 있었던 듯한데, 저자는 喪 中이라 참석하지 못하여 한스럽다고 하였다.
答鄭伯兪 10
鄭允諧(1553∼1618)에게 보낸 답장이다. 본관은 淸州, 자는 伯兪, 호는 鋤歸子이고 , 趙穆과 鄭逑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문사에 능하고 예법을 지켰다. 임진왜란에 창의하고 태조의 영정을 수호한 공로로 原從勳三等에 녹훈되었다. 광해군의 난정을 보고는 出仕의 뜻을 끊고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陶淵明 과 邵康節의 시를 애송하고 文天祥과 謝疊山의 시문을 즐겨 읽었다. 咸昌 淸巖書院에 제 향되었다. 이 답서의 내용으로 추측하건대, 두 사람이 서로 종유하던 사이는 아니고 가 끔 편지를 주고 받으며 교분을 이어온 사이라 짐작할 수 있다.
答黃甥應坤德柔 10
생질 黃應坤과 黃德柔에게 보낸 답장이다. 승진을 축하하는 내용의 짧은 편지이다.
與黃甥(1637) 10
생질 黃氏에게 보낸 편지이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저자의 장남 克恒이 都城에서 전투 중 전사하였는데, 이 편지는 난이 진정된 뒤 저자가 상경하여 보낸 편지 이다. 아이가 죽은 곳을 끝내 찾지 못하여 가 슴이 아프다고 하였다. 다만 내려갈 때 北靑門 밖에서 招魂祭나 지낼 생각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어쩔 도리 없이 체념할 수밖에 없는 부모의 애틋한 심정을 느낄 수 있다. 그 러고 나서 현재의 전황에 대해 간단하게 언 급하였다.
寄子克恬 11
차남 克恬에게 보낸 편지이다. 仁城君 李珙의 처리하는 문제로 李埈이 善處를 부탁했다가 時論의 배척을 받았던 일을 거론하였다. 이 문제로 鄭經世와 李埈이 免職을 신청한 상태이고, 자신도 사직하려 한다고 면서 아쉬운 마음을 드러내었다. 그러고 나서 아들의 근황을 물었다.
寄諸兒(1624) 11
1624년(인조 2) 저자의 나이 62세 때 자제 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仁城君 李珙의 일로 李埈이 時論의 배척을 받았던 일을 말하면서 이 일이 어떻게 결말이 날지 걱정이라고 하 였다. 그러면서 같이 보내는 朝報 10여 장은 鄭經世에게 보내어 사람에게 보이지 말게 하라고 당부하였다.
答諸兒 12
자제들에게 보낸 답장이다. 『禮記』의 내용에 대해 질문한 問目은 다음 편지에 보내 겠다고 햐였다. 그러고 나서 喪中의 몸가짐에 대해 이야기 하였는데, 아마 부인 南陽洪氏의 喪期를 말하는 듯하다.
寄諸兒(1625) 12
자제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冬至兼聖節使 沙西集로 차출되어 내달에 省墓하러 내려갈 계획인 데, 아직 승지에서 체차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寄諸兒(1625) 13
자제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使行이 7월 18일 表文을 받들고 8월 8일 배에 오를 듯한데, 내려가서 성묘하고 자제들을 만나보고 싶지만 날씨가 무덥고 공무가 바빠 그렇게 하기 힘들다고 하였다. 그러니 자제들 중 두 명이 기일에 맞추어 올라오면 만나보고 가겠다고 하였다.
寄諸兒(1625) 13
자제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使行을 떠나 배를 타러 가는 도중에 보낸 안부편지이다.
寄兒輩(1625) 13
자제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使行을 떠나 宣沙浦에서 바람이 잔잔해지기를 기다리며 보낸 안부편지이다.
寄兒輩(1625) 14
자제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무사히 바다를 건너 皇城島에 도착하고, 순풍을 기다리며 사찰에 머물고 있다고 안부를 전하는 내용이다.
示克恬(1626) 14
차남 克恬에게 붙이는 편지로, 사행에서 돌아와 서울에 있을 때 보낸 것이다. 무사히 사행을 다녀와 지금은 義洞에 머물러 있다고 하면서,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물어보는 내용이다.
寄兒輩(1627) 15
자제들에게 보낸 편지로, 정묘호란 중에 쓴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정국의 상황과 그에 대한 대처 방법 등을 이야기 해주고, 마지막으로 암울한 현실을 개탄하였다.
答恬兒 15
차남 克恬에게 보낸 답장이다. 편지를 받아보고 집안일을 잘 처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매우 다행이라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하 였다.
寄克恬 15
차남 克恬에게 보낸 편지이다. 예전에 先 考妣의 碑銘을 撰述한 草本이 鄭經世의 집에 있으니, 집안의 상자에 보관하고 있는 잘못된 草本은 모두 없앤 뒤에 鄭經世의 집에서 찾아 보내라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과거를 보 지 않으려는 생각은 가상하지만 경솔하게 스 스로 방심하지 말고 학업에 전념하기를 당부 하였다.
示克恬(1637) 16
차남 克恬에게 보낸 편지이다. 1637년(인조 15) 저자의 나이 75세에 보낸 것으로, 병자호란 당시의 전황과 자신의 안위를 이야기 하고 있다. 경상 좌병사와 우병사가 慶安에서 접전을 벌여 거의 승리할 듯했는데 군사들이 흩어져 크게 패했다고 하면서 아쉬움을 드러 내었다. 자신은 忠州 北倉에 있다가 지금은 連原에 진을 치고 있으며, 다시 劍巖書院으로 옮겨 運糧의 운송을 보살필 것이라고 하였다. 慶安으로 들어온 오랑캐는 1000명 정도인데, 앞으로 湖南과 咸鏡道의 병사들이 합세하여 물리칠 것이라고 하였다.
示諸兒 16
자제들에게 보낸 편지로, 병자호란 끝 무 렵의 戰況을 설명하는 것이다. 지난달 24일에 南漢山城에서 접전이 있었는데, 5일 동안 계속되어 군량이 거의 고갈되고 성곽이 반이나 무너졌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득이 27일 和親 을 청하는 사절을 보내어 여러 차례의 거절 끝에 30일에 결국 강화를 맺었는데, 東宮은 三田浦의 大將에게 보내고 大駕는 군병의 호 위 없이 나와서 百官들의 호위만으로 도성으로 들어가게 했다고 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국권마저 유린되었으니, 매우 가슴이 아프다고 하였다.
寄兒輩 17
자제들에게 보낸 편지로, 강화 후의 사정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장남 克恒은 아직 소식이 없으니 죽은 것이 틀림없겠다고 하면서 비통한 심정을 드러내었다. 세자의 행차가 龍灣을 지났다는 말은 아마도 昭顯世子가 청나 라에 볼모로 떠나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寄克恬 17
차남 克恬에게 보낸 편지이다. 당시 조정의 상황과 자신의 진퇴에 대한 일을 이야기 하였다.
示外孫黃霦 18
外孫 黃霦에게 보낸 편지이다. 당시 역병 이 창궐하여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 중에도 감염자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니, 당분간 서울 에 올라오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공부는 절대 이것저것 잡다하게 하지 말고 한 가지 책만 전념하여 암송하고 窮理하라고 하였다.
雜著 書示恬兒(二)(1628) 19
차남 克恬에게 보이는 글이다. 學問의 도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하는 가운데 하늘의 이치를 어기지 않는 것이 바로 學問이라고 하였다. 그리고『春秋』를 모르면 ‘是非取舍’의 의리를 알지 못하니, 부지런히 공부해야 한다고 하였다.
書示子孫(二) 19
자신이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성의를 다 하던 옛일을 이야기 하면서 자손들에게 효도 沙西集 의 도리를 이야기하는 글이다. 저자의 先妣는 先考에게 시집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들었고, 그 후 56년을 앓다가 1619년(광해군 12) 12월 27일에 향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늘 병석에 누워있었고 집이 가난하여 좋은 음식으로 봉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새 벽이면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음식을 마련하 고, 마을에 잔치가 있으면 남몰래 음식을 싸 와 드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15년 여를 정성 으로 봉양하다가 벼슬을 하고 부터는 그 일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점이 제일 가슴이 아팠다고 하였다. 그런 다음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서는 出天의 誠意와 남다른 氣力이 있어 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가운데 서는 誠意가 더욱 중요한 도리라고 하였다.
國典考誤 20
“새로 급제하여 50이 되도록 한 번도 資級 을 받지 못한 자는 6품으로 자급을 올려준 다. [新及第五十無一資者。直出六品矣]”는 國法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를 지난날 鄭經世와 함께 榻前에서 아뢰어 承傳 을 받들었지만 끝내 시행하지는 못했다고 하 였다.
會盟宴 20
저자가 會盟宴 때에 목격한 사실을 기록한 짧은 글이다. 당시 御座 앞 계단의 난간이 너무 높아 모두들 오르내리며 獻爵하는데 애를 먹었는데, 유독 義昌君만은 편안히 擧酒齊眉 를 하여 한결같이 법도를 어기지 않았으니 참으로 英雄이라 할 만하다고 하였다.
遊南長寺 20
尙州의 南長寺에서 옛날 明道선생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당금의 儒風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낸 글이다. 옛날 明道선생이 僧舍에서 그 들이 생활을 보고 “三代의 威儀가 진정 여기에 있구나. ”라고 말 한 적이 있다. 또 저자가 燕京으로 使行 갔을 때 보니 그들이 하는 飮 食, 拜跪, 禮佛, 誦經 등 각 節目이 모두 우리 나라 僧徒와 전혀 차이가 없었다. 이로 보면 佛門의 遺法은 시대가 흘러도 나라가 달라도 그 宗旨를 잃지 않고 있는 것인데, 儒學은 다 같이 聖人에게서 나왔지만 각기 자신들의 견 해만 고집하여 수 없이 學派가 갈라졌으니, 한탄스럽다고 하였다.
金蘭溪 21
金得培(1312~1362)에 대한 속설을 부정 하고 그의 위상을 재고하는 내용이다. 俗儒들 이 그를 무인이라고 기롱하는데 관직이 政堂 文學이었으니 무인이 아니고 문신이었음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또 圃隱 鄭夢周가 그에 대해 지은 詩를 보면 儒者이면서 都元帥를 지낸 인물이고 忠魂毅魄今安在라는 구절에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또 그의 畵像이 손에 염주를 잡고 목에 염주를 두르고 있은 것은 당시의 時俗을 따른 것일 뿐 저와 같이 의열 한 그의 충절에는 조금도 흠이 지 않는다고 하였다. 金得培는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본 관 尙州, 호는 蘭溪이다. 江陵大君[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왕을 숙위하였으며, 1359 년 겨울 홍건적의 침입으로 의주‧정주 등이 함락되자, 서북면도지휘사로서도원수李喦, 부원수 慶千興과 함께 진격하여 西京을 탈환 하였다. 1361년 홍건적이 다시 침범했을 때는 安祐‧李芳實‧崔瑩‧李成桂 등과 함께 20만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개경을 수복하였다.
李益齋 22
益齋 李齊賢(1287~1367)의 神位가 西岳 賢祠에 제향되지 않는데 대해 아쉬운 마음을 드러내고 그 일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내용이다.
南秋江詩 22
『冶隱集』에 실려 있는 秋江 南孝溫(1454~ 1492)의 시 “鴻毛命輕義重山 公與達可知此 理達可身經二姓王杞梓寸朽鑑中玼”는 실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 실렸다고 하면서 탄식 하였다.
徐樂齋事 22
李夢鶴이 난을 일으켰을 때 모든 수령들이 경도되는 상황에서도 유독 뜻을 굽히지 않았던 徐思遠(1550~1615)의 덕을 기리는 내용이다. 徐思遠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자는 行 甫, 호는 彌樂齋 또는 樂齋이다. 鄭逑의 문인으로 주자학 및 李滉의 문집을 깊이 연구하였다. 임진왜란기를 중심으로 영남에서 구국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열악하기 그지없는 환경에서 학문 연마와 강학활동을 전개하였다. 학행으로 감역, 찰방을 지내고, 1595년(선조 28) 淸安縣監에 부임하여 학문의 진흥과 후 진양성에 힘썼다. 그 뒤로 玉果縣監, 燕岐縣 監, 형조 정랑, 호조 정랑, 역학교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대구의 伊江 書院, 淸安의 龜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樂齋集』이 있다.
張元帥事 22
都元帥張晚의 행위를 규탄하는 내용의 글이다. 1624년(인조 2) 李适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鞍峴 전투의 승리는 모두 副元帥 李守 一(1554∼1632)의 힘이었고, 都元帥 張晩은 멀리 10리 밖으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공이 없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 論功行賞 할 때 張晩이 농간을 부려 자신은 振武原 從功臣에 봉해지고 李守一은 振武功臣二等 에 책록되게 하였으니 그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당시의 처사가 우습다고 하였다.
策問 23
文章과 忍耐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지은 두 편의 策問이다. 첫 번째 글에서는 “天文을 관찰하여 四時의 변화를 살피고 人文을 관찰하여 天下를 沙西集 敎化한다. [觀乎天文 以察時變 觀乎人文 以化 成天下]”는『周易』의 구절을 인용하여 문장 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였는데, 孔子, 孟子, 左 氏, 朱子 등의 문장이 세상에 끼친 영향과 戰 國時代 및 八代의 사례를 들면서 논리를 전개하였다. 두 번째 글에서는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큰 계책을 어지럽힌다. [小不忍則亂大謀]”는 『論語』의 말을 인용하여 인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子家駒, 張公藝, 子房, 韓信, 周 伯仁, 婁師德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이들이 만일 하루아침의 분노를 참지 못했으면 후일의 事業이 어긋나서 偉人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卷5
雜著
槎行錄 1
1625년 8월 3일에 출발하여 1626년 4월 15일까지 중국을 다녀온 기록이다. 당시 遼陽을 後金이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닷길로 떠났는데, 날짜별로 도중의 경로와 만난 사람들, 날씨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폭풍을 만나 함께 떠났던 배 4척 중 2척이 실종된 일과 날마다 지은 시의 제목을 小註로 달아 놓았다.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625년(인조 3) 8월 3일 : 慕華館에서 査對를 끝내고 늦어 신문 밖 촌사에서 유숙함.
◦8월4일:迎曙에도착하였는데,鄭汝廓‧
黃直 등이 술을 준비하였기에 잠시 담소를 나누고 파주에서 유숙함.
◦8월 5일 : 일찍 출발하여 長湍을 거쳐 松都에서 유숙함.
◦8월6일:留守‧都事‧書狀官 등과 함께 滿月臺를 구경함.
◦8월 7일 : 金郊를 거쳐 平山에서 유숙하였는데 평산 수령의 방문을 받음.
◦8월 8일 : 叢秀山을 거쳐 瑞興에서 유숙함.
◦8월 9일 : 劍水를 거쳐 鳳山에서 유숙함.
◦8월 10일 : 黃州에서 유숙함.
◦8월 11일 : 中和에서 유숙하였는데, 府使인 柳相切의 정성스런 대접을 받음.
◦8월 12일 : 平壤에서 유숙하였는데, 監司와 管餉이 모두 방문함.
◦8월 13일 : 鍊光亭을 두루 관람하고 종사관 및 여러 공들과 배를 타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 浮碧亭을 봄.
◦8월 14일 : 順安에서 유숙하였는데 接伴使 李晉哲이 기다리고 있기에 오랫동안 대화를 나눔.
◦8월 16일 : 安州를 거쳐 嘉山에 도착하여 유숙함.
◦8월 17일 : 定州에 도착하여 鄭公直의 대접을 받고 종일토록 담소를 나누고 닭이 울 때까지 술자리를 가짐.
◦8월 18일 : 鄭公直이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집에 편지를 보냄.
◦8월 25일 : 음산한 바람이 불었는데, 오후에 바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나니 바람이 즉시 그침.
◦9월 1일 : 身尾島를 지나면서 방향을 잡지 못하였는데, 마침 도독이 宣川에 있어 자문을 구하지 못해 매우 걱정함. 저녁에 熊回島 북쪽에 정박함.
◦9월 2일 :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바람이 크게 불어 배가 위험한 지경에 처함. 하늘이 맑아지고 비가 잦아들었는데, 배 두 척은 무사하였고 세 척은 결국 뒤처짐.
◦9월4일:椵島에 이르러 모문룡을 만나려 하였으나 모문룡이 蛇浦로 가는 바람에 만나지 못함.
◦9월 16일 : 선주가 바람이 어지럽게 불어 출발하지 못하고 바다 한 가운데서 정박해야 한다고 하기에 큰 비가 오고 바람이 심하게 불기 때문에 長山島로 회항해야 한다고 회유함.
◦9월 18일 : 비는 그쳤지만 바람이 심하게 불어 장산도에 정박함. 格軍 중에 한 명이 병이 없었는데 갑자기 죽어 산 곁에 매장하고 은자를 선주에게 주어 가족들에게 전해주게 함.
◦9월 19일 : 초저녁에 장산도를 떠나 바다로 나가 장산도 石門에 정박함. 「長山島留泊」 2수를 지음.
◦9월 23일 : 저녁에 三山島로 향하여 해뜨기 전에 지나쳐 平島를 가려고 하였으나 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어 돛이 부러지고 水疾이 생겨 인사불성인 사람이 생겨 皇城島에 정박하여 海潮寺에서 유숙함. 「皇城遇風」을 지음.
◦9월 24일 : 풍랑이 심할 뿐만 아니라 배 안의 사람들이 먹지도 못하고 병들어 출발할 수 없기에 해조사에 유숙함.
◦9월 26일 : 해조사에 유숙하며 「題慈雲扇」를 지음. 마침 한양으로 가는 중국 사람을 만나 철산 부사에게 집에 보낼 편지를 보냄.
◦9월 27일 : 출항을 서두르다 서풍이 불지 않아 실행하지 못함. 「贈慈雲」을 지음.
◦9월 28일 : 한 밤에 북풍이 불어 배를 출항시킴. 「皇城夜泊」을 지음.
◦9월 29일 : 새벽에 鼉磯島 부근에 도착하였고 얼마 뒤에 노를 저어 廟島에 도착하였는데, 풍랑으로 헤어졌던 서장관의 배를 만남. 「廟島」를 지음.
◦9월 30일 : 登州에 도착함. 「登州卽事」를 지음.
◦10월 3일 : 아침에 군문에 가서 見官禮를 행하고 禮單名帖을 줌.
◦10월 10일 : 黃縣을 향해 출발함.
◦10월 11일 : 늦게 黃山驛을 출발하여 저녁에 同站에 도착하여 유숙함.
◦10월 13일 : 아침에 동참을 출발하여 萊州에 도착함. 중도에 呂祖謙 독서당이 있었는데 절구 한 수를 지음.
◦10월 15일 : 昌邑에 유숙하였는데 雍齒의 묘를 지나다 절구 한 수를 지음.
◦10월16일:저녁에 濰縣에 유숙하였는데 성서 쪽에 囊沙의 고적이 있었고 濰水를 지나다 晏平仲의 고향에 이르렀는데 각각 절구 한 수 씩을 지음.
◦10월 19일 : 金嶺鎭에서 유숙함. 아침에 靑州를 지나는데 성 서쪽에 있는 牛山 아래宣王의 묘가 그 아래 있었고 景公桓公의 묘가 있었기에 절구 한 수를 지음.
◦10월 26일 : 德州를 지나 黃河를 지남. 「憶諸兒」를 지음.
◦10월 28일 : 河間府에 도착함.
◦10월 30일 : 白溝河를 지나 新城에 도착함. 「白溝途中」를 지음.
◦11월 2일 : 오후에 登州를 지나 北京에 도착함.
◦11월 3일 : 아침에 東岳廟에서 改服하고 말을 타고서 朝陽門으로 들어가 玉河館에 투숙함. 「玉河館卽事」를 지음.
◦11월 6일 : 禮部로 가서 見堂禮를 행함.
◦11월 7일 : 提督 徐應秋에게 見官禮를 행하였는데, 제독이 여행 중에 지은 시문과 직접 쓴 필적을 보고 싶다하기에 정중히 사양함.
◦11월 8일 : 主客司가 貢參으로 인삼 5근에다 4근을 더해 줄 것을 요청함.
◦11월 14일 : 궐에 나아가 賀禮를 행함. 서제독이 여행 중에 지은 시와 필적을 계속 요청함으로 부득이하게 10여 편을 베껴 보내줌.
◦11월 16일 : 朝天宮에서 冬至習儀를 행함. 절구시 한 수를 지음. 군관 洪德一을 본국으로 보내 보고하게 함.
◦11월 23일 : 賀節禮를 행함. 「進賀詩」 두 수를 지음.
◦11월 24일 : 눈이 내려 옥하관에 머뭄. 「詠雪」을 지음.
◦12월 7일 : 옥하관에 머뭄. 「夜坐」를 지음.
◦12월 15일 : 옥하관에 머뭄. 「記夢」을 지음.
◦1626년(인조 4) 1월 1일 : 대궐에 나아가 賀班에 참석함.
◦1월 11일 : 큰 눈이 내려 옥하관에 머뭄. 南宮先生과 시 4수를 수작함.
◦2월 9일 : 大學館에서 성인을 배알하고 이어서 天壇으로 감.
◦2월 18일 : 午門 밖에서 領賞을 받음.
◦2월 20일 : 謝賞禮를 행함.
◦3월 4일 : 조정에 하직인사를 함. 오후에 제독이 와서 떠나는 길에 화물이 미비하다는 이유로 철저하게 조사함.
◦3월 6일 : 禮部에 하직인사를 올리고 辨誣를 올리려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함.
◦3월 9일 : 옥하관을 출발하여 북경과 17리 정도 떨어진 高味店에 유숙함.
◦3월 10일 : 通州를 지나 전에 지었던 시의 운을 사용하여 율시 한 수를 지음. 沙河店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는데, 낙후된 사람들이 노자를 잃어버려 통주에서 출발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음.
◦3월 11일 : 아침에 사람들을 기다리기 위해 유숙한 곳에서 밥을 먹고 출발함. 저녁에 楊村에서 유숙하였음. 촌 곁에 매우 큰 강이 있었는데 정경이 매우 장관이었음.
◦3월 19일 : 田店에 유숙하였는데, 뒤에 처졌던 通事金誠立‧卞承吉 등이 뒤늦게 도착함.
◦3월 26일 : 아침에 軍門에서 見官禮를 행하고 오후 늦게 蓬萊閣에 올라 창해를 굽어보고 閭閻을 두루 살펴보니 장관이었음.
◦3월 27일 : 아침에 海方道로 가서 見官禮를 행하려 하였으나 예를 면제시켜 주었기에 첫 새벽에 배를 출발시켰음.
◦4월 1일 : 오후에 뒤쳐졌던 배들을 모두 만나 다시 출발하였으나 鼉磯島에 이르기 전에 역풍이 불어 돛을 내리고 바다 가운데 머뭄.
◦4월 2일 : 타기도 근처까지 갔지만 구름이 짙어 방향을 분간하지 못하여 바다 가운데서 유숙함.
◦4월 3일 : 남풍이 불어 皇城島로 빠르게 나아감. 우연히 白牌通事를 欽島 부근에서 만나 서로 안부를 묻고 헤어지고 나서 얼마 뒤에 황성도에 도착함. 뱃사람들이 정박하자는 쪽과 더 나아가자는 쪽으로 의견이 나누어졌지만 황성도에서 유숙함. 서장관이 탔던 배와 3호선은 황성도를 지나 갔는데 풍랑을 만나 북쪽으로 떠밀려 갔다함.
◦4월 5일 : 서풍이 불어 아침 늦게 돛을 올려 三山島를 지나 저녁에 廣鹿島에 도착하여 유숙함. 「車牛島」를 지음.
◦4월 7일 : 광녹도에서 정박하며 뒤처진 3호선을 기다림. 마침 뒤쳐졌던 2호선이 당도하였는데 황성도를 지나다 풍랑을 만나 楊島에 도착하였는데 4호선과 管餉船은 미리 와 있었고 3호선은 소식을 알 수 없다함.
◦4월 9일 : 저녁에 宣沙浦에 도착하여 대접을 받음.
◦4월 15일 : 선사포에 머물렀는데 저녁에 4호선은 무사히 포구에 도착하였지만 3호선은끝내돌아오지않음.「悼渰」을 지음.

卷6
雜著
隨手箚錄 1
1592년(선조 25) 4월 16일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시점부터 1637년(인조 15) 2월 28일까지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저자 자신의 관점에서 자세히 기록한 일종의 자전적인 글이다. 저자의 의병활동과 광해군조 鄭仁弘을 중심으로 한 大北派의 공격, 西厓 柳成龍과의 일, 당시 재상들에 대한 人物評 등이 실려 있다.

卷7

后溪金公旌門跋 1
金範(1515∼1566)의 旌閭門에 지은 발문이다. 자는 德容, 호는 后溪 또는 桐溪이고, 尙州에서 태어났다. 集賢殿 副學士 尙直의 후예로, 아버지는 從仕郞 允儉이고 어머니는 尙山金氏 종사랑 增의 따님이다. 1540년(중종 35) 진사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慕齋 金安國(1478∼1543)이 공의 문장을 칭찬하면서부터 이름이 더욱 알려졌다. 그러나 이때문에 자만하지 않고 더욱 학업에 전념하였 다. 1566년(명종 21) 천거로 內侍敎官이 되었 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얼마 후 大谷 成運(1497∼1579),一齋 李恒(1499~1576)과 함께 經行으로 추천되어 여러 차례 召命을 받고 부득이 서울로 올라갔는데, 引對하여 養心‧執德‧進退 등에 대한 견해를 올리자 임금이 嘉納하였다고 한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玉果縣監에 임용되었고, 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賜祭文을 내렸다. 어버이를 섬길 때 겨울에는 따뜻한 음식을 올리고 여름에는 시원한 음식을 드려 예를 어김이 없었고 음식의 절차는 밤낮으로 반드시 직접 살폈다. 喪祭의 의례는 한결같이『家禮』에 따르고 祭需는 사소한 물건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國喪이 있을 때 外室에 거처하고 素食하여 卒哭 후에 그쳤다. 나라에 제사가 있을 때에는 늘 素食하였기 때문에 家率들이 어느 날은 어느 능의 기일인지 알았다고 한다. 1635년(인조 13) 효자로 旌閭되었다. 상주의 玉成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后溪集』이 있다.
題李叔載(㙉)急難圖後 2
李㙉(1558∼1648)의 「急難圖」뒤에 적은 序 文이다. 이전의 본관은 興陽, 자는 叔載, 호는 月澗으로, 壽仁의 아들이다. 1580년(선조 13) 동생 埈과 함께 상주목사로 부임한 柳成龍을 찾아가 학문을 배우고, 주자학을 연구해 學名을 떨쳤다. 저자와는 동문수학한 사이로 가까이 종유하며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서로 상의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아우 埈이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우다가 적중에 포위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그가 병에 걸린 동생을 구하여 적진 탈출에 성공하여 형제가 무사할 수 있었다. 후일 埈이 그 일에 감복하여 화공에게 당시의 모습을 그리게 하고 「急難圖」라 하였는데, 識者들이 贊文을 많이 써 주었다고 한다. 이 글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전은 尙州의 玉城書院에 配享되었다
題洞禊坐目後 2
1633년(인조 11) 저자가 관직에서 물러나 尙州에 있을 때 고을의 風敎를 진작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月澗 李㙉, 蒼石 李埈 등 여러 사람들이 선생을 추천하여 鄕約을 주관하게 한 적이 있었다. 이 글은 아마 당시에 향약의 座目을 세우고 그 뒤에 붙인 序文인 듯하다. 우리나라는 해외에서 禮義가 있다 알려졌고 우리지역은 영남에서도 풍속이 아름답다는 명성이 있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힘을 모아 문제를 해결하고 서로 화목하며 젊은이는 어른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섬기는 풍속을 한결같이 呂氏鄕約의 옛 제도대로 해서 鄕曲의 규례로 삼은 것이 자못 오래되었는데,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고을의 미풍양속이 거의 사라지고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한 두 명의 동 료가 옛 일을 회복하려는 마음에서 예전에 들은 것을 모으고 새로이 규례를 첨가하여 엄히 科條를 세운 다음 봄가을로 강론하며 실천해나가기로 하였으니 매우 다행이라고 하였다. 또한 우리고을에서 먼저 이런 일을 시작해서 점차 나라 안으로 번져간다면 백성 을 교화하고 미풍양속을 이루는데 조금이나 마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表箋
正朝賀箋 3
정월 초하루에 임금에게 축수를 올리는 내 용으로 지은 箋文이다.
大妃喪慰箋 3
1632년(인조 10) 仁穆大妃(1584∼1632)가 승하했을 때 지은 慰安 箋文이다. 인목대비의 본관 延安, 성은 金氏이고 존호는 昭聖貞懿明 烈, 徽號는 光淑莊定이다. 1602년(선조 35) 왕비에 책봉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을 중심으로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주창되었고 이이첨, 허균 등이 적극 주장하였다. 1613년 대북파의 모략으로 어린 영창대군 이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친정 아버지 金悌南 등이 賜死되었으며, 1618년 西宮에 유폐되었다. 1623년 西人들이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 군과 대북 일파를 몰아내자 復號되었다.
恭聖王后奉安陳賀箋 4
恭聖王后는 광해군의 생모인 恭嬪金氏를 말한다. 司圃 金希哲의 따님으로 臨海‧光海 두 왕자를 낳았는데, 1577(선조 10)년 산후병으로 졸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1610년 (광해군 2)에 恭嬪을 慈淑端仁恭聖王后로 추존하고 능호도 成陵이라 바꾼 다음 陵役을 서둘렀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출됨에 따라 공성왕후라는 공빈김씨의 존호가 삭제되고 1630(인조 8)에는 묘소에 법에 어긋나게 세운 석물도 허물었다고 한다. 이 글은 공빈을 慈淑端仁恭聖王后로 추존하고 태묘에 들일 때의 陳賀 箋文으로 보인다.
趙監司禮狀 4
趙監司에게 보내는 禮狀이다.
鄭監司禮狀 5
鄭監司에게 보내는 禮狀이다.
祝文
尙州鄕校大成殿移安告由文 5
尙州鄕校 大成殿의 重修를 위해 移安祭를 지낼 때의 고유문이다.
告還安文 5
尙州鄕校 大成殿의 重修를 마치고 還安祭 를 지낼 때의 고유문이다.
淸河鄕校移安告由文 5
淸河鄕校 廟宇의 重修를 위해 移安祭를 지낼 때의 고유문이다.
告還安文 5
淸河鄕校 廟宇의 重修를 마치고 還安祭를 지낼 때의 고유문이다.
孫景節公(仲暾)生祠重修奉安文(1635) 5
景節公 孫仲暾의 生祠을 重修하고 奉安祭를 지낼 때의 제문이다. 이에 앞서 저자는 愚伏 鄭經世와 蒼石 李埈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生祠를 개축하여 景賢祠로 만들자고 의논 하였다. 孫仲暾(1463∼1529)의 본관은 慶州, 호는 愚齋, 자는 大發, 시호는 景節이고 金宗 直의 문인이다. 1482년(성종 13) 司馬試에, 1489년 式年文科에 급제하여 藝文館奉敎와 여러 淸宦職을 지냈다. 1497년(연산군 3) 司 僕寺正 때 파직, 1506년 중종반정 직후 尙州 牧使로 복귀하여 공조‧예조의 참판을역임하고 1517년 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도승지‧대사간 등을 지내고 右參贊에 제수되었다. 중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고, 慶州 東江 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道南書院愚伏奉安文(1639) 5
道南書院에 愚伏 鄭經世를 入享할 때 지은 奉安文이다.
金角干墓慰安文 6
산불이 묘소까지 번져 봉분의 풀이 다 타 버렸기 때문에 慰安祭를 지낸 것이다.
角干墓祈雨文 6
角干의 묘에서 祈雨祭를 지낼 때 지은 제 문이다.
始祖殿祈雨文 6
始祖殿에서 祈雨祭를 지낼 때 지은 제문이다.
柏栗寺祈雨文 7
柏栗寺에서 祈雨祭를 지낼 때 지은 제문이다. 柏栗寺는 불교를 국법으로 인정해 줄 것을 주장하다가 순교한 신라의 승려 異次頓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절로, 경북 경주에 있다. 그가 죽은 뒤 일어난 기적이 朝臣들의 마음 을 돌려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었다고 한다.
龍堂祈雨文 7
龍堂에서 祈雨祭를 지낼 때 지은 제문이다.
冠岳山祈雨文 8
冠岳山에서 祈雨祭를 지낼 때 지은 제문이다.
五方祈雨文 8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방면에 祈雨祭를 지낼 때 지은 제문이다. 동서 두 방면에 대한 제문은 빠져있다.
社稷祈晴文 9
社稷에서 祈晴祭를 지낼 때 지은 제문이다. 비가 너무 내리지 않아도 걱정이지만 비가 너무 많이 내려도 재앙인데, 당시에는 열흘 가까이 비가 계속되어 늘 하늘이 어둑하다고 하였다. 늦가을이 되어 풍년의 조짐이 보였는 데, 계속 비가 내려 곡식이 상할까 걱정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토지와 곡식의 神은 비를 그치고 해가 나오게 해서 곤궁한 백성들을 살리고 나라의 근본이 굳건해지게 해달라고 하였다.
祭文
贈持平崔有涵賜祭文 9
持平에 추증된 崔有涵에게 내리는 제문으 로 저자가 임금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최 유함은 1616년(광해군 8)에 일어난 海州獄事에 연루되어 처형된 인물인데, 인조가 등극한 뒤에 신원되어 이 사제문이 내려진 듯하 다. 해주옥사란 仁穆大妃의 폐위를 목적으로 李爾瞻이 일으킨 옥사를 말한다. 당시 仁穆大 妃의 폐위에 장애 요소로 지목된 小北의 朴 承宗과 南以恭 등을 제거하기 위해 李爾瞻이 무뢰배를 사주하여 海州牧使 崔沂에게 소북 일당의 謀逆을 告變하게 하였는데, 최기는 이 들을 무고로 몰아 杖刑에 처하고 고변장을 불태워 버렸다. 그러자 이이첨은 자신의 계획 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알고 최기를 濫刑罪 로 몰아 처형한 다음 관련된 소북파 수백 명 을 제거하였는데, 이 때 최기의 아들 崔有石 과조카崔有涵‧崔有泳이다극형을받았고 외손과 친속들은 변방으로 정배되었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에 의하여 이 사건 이 대북파의 조작임이 밝혀지고, 최기도 신원 되었다.
圃隱鄭文忠公賜祭文 9
文忠公 圃隱 鄭夢周(1337∼1392)에게 내 리는 제문으로 저자가 임금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崔判尹(瓘)致祭文 10 判尹 崔瓘(1563∼?)에게 내린 致祭文으로 저자가 임금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본관은 江華, 改名은 崔琇, 자는 瑩仲, 호는 迷翁이다. 1563년(명종 18)에 태어났으며 崔承世의 아 들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시 문과에 갑과 로 급제하였고 여러 벼슬을 지낸 후 정2품 호 조판서에 올랐고, 開城留守, 咸鏡監司, 漢城 判尹을 지냈다. 『인조실록』의 내용을 참고 해 보면 李适의 난에 연루되어 누명을 썼다 가 신원된 듯하다. 제문의 내용은 일반적인 賜祭文과 대동소이하다. 먼저 그의 재능과 官 歷을 이야기한 다음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애도를 표하고 있다.
遷陵時儀賓府進香文 10
陵園을 옮길 때 儀賓府에 올린 제문이다. 의빈부란 임금의 사위, 곧 公主나 翁主의 配 匹에 관한 사무를 맡은 정1품 衙門이다. 누구 의 능원인지는 자세하지 않다.
宗親府進香文 11
宗親府에 香祝을 올릴 때 지은 제문이다. 告社稷文 11 社稷에 告由祭를 지낼 때의 제문으로 명나 라 황제의 칙명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
玉樞丹合劑時告祭神農氏文 11
玉樞丹을 調劑하기 위해 告由祭를 지낼 때 神農氏에게 올리는 제문이다. 옥추단이란 일체의 毒에 대한 해독제로 사용되는 처방인데, 일명 追毒丹이라고도 한다. 단오에 內醫院에서 만들어 임금에게 바치면, 임금은 이것을 신하들에게 내려 주어 救急藥으로 쓰게 하였다. 먼저 온갖 식물을 생산하고 각종 약초를 맛보아 그 특성을 정리한 공을 칭송하였다. 그러고 나서 이제 그 신묘한 비결대로 靈丹 을 조제하려고 정갈히 祭物을 마련하여 제를 지낸다고 하였다.
祭外舅崔公文 11
저자의 첫째 부인 江華崔氏의 부친인 崔巨源에 대한 제문이다. 성품은 고결하고 학문은 박식하였으며 집에 있을 때는 법도가 있고 사람을 대할 때는 정성을 다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서도 평소의 소신을 잃지 않았던 점은 세상 사람들은 속속들이 알지 못하지만 자신은 분명히 알고 있다고 하였다. 後嗣를 이을 아들을 두지 못하고 관직에도 진출하지 못한 것은 하늘이 내린 운명이라 어찌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홀로된 미망인이 늙은 나이에 의지할 곳 없이 된 것이 가슴 아프다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병 때문에 조문 하지 못하고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한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 하면서 더욱 애통해 하였다.
祭鄭景任文(1633) 12
鄭經世(1563∼1633)에 대한 제문이다. 본 관은 晉州, 자는 景任, 호는 愚谷‧愚伏‧一默‧ 荷渠이고 初諡는 文肅, 改諡는 文莊이다. 尙州 출신으로, 柳成龍의 문인이다. 1582년(선조 15) 진사를 거쳐 1586년 알성문과에 급제, 승문원부정자로 등용된 뒤 검열‧奉敎를 거쳐 1589년 賜暇讀書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 나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修撰이 되고 정언‧교리‧정랑‧司諫에 이어 1598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광해군 때 鄭仁弘과 반목 끝에 削職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제학에 발탁되고, 전라도관찰사‧대사헌을 거쳐 1629년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이르렀다. 성리 학에 밝았고, 특히 禮論에 밝아서 金長生 등 과 함께 禮學派로 불렸다. 詩文과 서예에도 뛰어났다. 贊成에 추증되고 상주의 道南書院, 대구의 硏經書院, 강릉의 退谷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에『愚伏集』『喪體參考』『朱文 酌解』등이 있다. 저자는 愚伏과 동문수학하 며 학업을 講磨하였기 때문에 애도의 슬픔이 더욱 심하였다.
祭康知事明之文(1639) 13
康復誠(1550∼1634)에 대한 제문이다. 본 관은 信川, 자는 明之, 호는 竹磵이다. 1579년 (선조 12) 사마시에 합격한 뒤, 참봉‧直長‧察 訪 등을 역임하였다. 1595년 柳成龍의 천거로 張顯光 등과 함께 발탁되어 장수 현감이 되었으며 곧 김제 군수로 옮겼는데, 정유재란 때 명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남원에 주둔한 왜적을 쳐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 뒤 1599년(선조 32) 고양 군수를 거쳐 천안 군수를 역임하였다. 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즉시 군대를 모아 인조를 호위하였는데, 그 공으로 資憲大夫로 자급이 오르고 곧 正憲大夫로 자급이 올라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저서로는 『竹磵集』이 있다. 祭
柳季華文 14
柳袗(1582∼1635)에 대한 제문이다. 본관은 豊山, 자는 季華, 호는 修巖이고, 영의정 成龍의 아들이다. 1610년(광해군 2) 사마시 에 합격하고, 1612년 金直哉의 무옥 때 무고를 받아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616년 遺逸 로 천거되어 世子翊衛司洗馬가 되었다. 인조 반정 뒤 봉화현감이 되고, 이어 형조정랑이 되어 오래 묵은 寃獄을 해결하였다. 1627년 (인조 5) 허위보고를 하였다 하여 청도군수에서 파직되었으나, 1634년 재등용되어 지평이 되었다. 안동의 屛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修巖文集』이 전한다.
祭任茂叔文 14
任叔英(1576∼1623)에 대한 제문이다. 본관은 豊川, 초명은 湘, 자는 茂淑, 호는 疎庵 이다. 漢城府判尹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崇老이고 아버지는 감역 奇이다.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한다. 1601년(선조 34) 진사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에서 수학하였는데, 논의가 과감하여 전후로 儒疏가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한다. 1611년 (광해군 3) 별시문과 對策에서 주어진 이외 의 제목으로 척족의 횡포와 李爾瞻의 전횡을 심하게 비난하였는데, 시관 沈喜壽가 적극 취 하여 병과로 급제시켰다. 그 뒤 광해군이 대 책문을 보고 크게 노하여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였는데, 三司의 간쟁과 李恒福 등의 주장으 로 무마하여 다시 급제되었다. 그 뒤 승문원 정자‧박사를 거쳐 주서가 되었다. 1613년에 永昌大君의 무옥이 일어나자 다리가 아프다 는 핑계를 대고 庭請에 참가하지 않았다가 파직되었다. 인조반정 초에 복직되어 예문관 검열과 홍문관정자‧박사‧부수찬 등을 거쳐 지평에 이르렀다. 古文에 힘썼으며, 중국 六 朝의 四六文에 뛰어났는데, 그가 지은 「統軍 亭序」는 중국학자들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 다고 한다.
祭鄭統制(起龍)文 15
鄭起龍(1562∼1622)에 대한 제문이다. 정 기룡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昆陽鄭氏의 시조이다. 초명은 茂壽, 본관은 晉州, 자는 景雲, 호는 梅軒, 시호는 忠毅이다. 증 호조 참판 哲 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호조판서 義傑 이고 아버지는 증 좌찬성 浩이다. 1580년(선조 13) 固城에서 향시에 합격하고, 1586년 무 과에 급제한 뒤 왕명에 따라 起龍으로 개명 하였다. 임진왜란 때 居昌과 錦山 등지에서 戰功을 세워 昆陽의 守城將이 되었고, 遊兵별 장을 거쳐 尙州判官으로 왜군과 대치하여 격 전 끝에 상주성을 탈환하였다. 1593년 會寧府 使에 승진하고 이듬해 상주목사로 通政大夫 에 올랐다. 1597년 丁酉再亂이 일어나자 討倭 大將이 되어 高靈에서 적장을 생포하는 한편 星州‧陜川‧草溪‧宜寧 등을 탈환하고 경상우 도병마절도사에 승진하였다.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 경상도 방어사, 김해 부사, 밀양 부사 를 거쳐 中道防禦使에 오르고, 뒤에 용양위부 호군 겸 오위도총부총관‧경상좌도병마절도 사 겸 울산부사가 되었다. 1610년(광해군 2) 상호군에 승진하고, 그 뒤 輔國崇祿大夫로서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의 직 을 맡다가 1622년 통영 진중에서 세상을 떠 났다.
祭龍灘李先生文 16
龍灘 李先生에 대한 제문이다. 학문의 연 원은 經學에 있고 몸과 마음을 잘 수양하였다고 하였다. 예전 鄭公에게서 여울을 거슬러 龍門에 오른 다는 말을 들었는데, 미망인이 남아있으니 그 흐름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 고 하였다. 祭趙安仲文(1636) 16 趙靖(1555∼1636)에 대한 제문이다. 본관 은 豊壤, 호는 黔澗, 자는 安中이다. 鄭逑와 金誠一에게 수학하였고, 古今의 禮說에 조예가 깊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고 李适의 난과 정묘호란 때 에는 인조를 호종하였다. 160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海南縣監으로 있을 때는 斗米法을 개정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 고 鄕射禮‧鄕飮酒禮 등을 행하여 향촌 교화 에 힘썼으며, 淸道郡守로 있을 때는 勸學하고 養老禮를 행하는 등 儒風을 일으키는 데 힘 썼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尙州의 涑水書院에 배향되었다. 시문집으로『黔澗集』이 전한다.
祭宋東萊(尙賢)文 17
東萊 宋尙賢에 대한 제문이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우뚝한 기개를 떨쳐 義氣가 세상을 움직이고 이름이 역사에 남았으니, 조선의 산하에 그 기상이 전해질 것이라고 하였다.
祭孫四休文 17
孫四休에 대한 제문이다. 文運과 官運을 타고났다고 하였다. 선한 성품과 아름다운 도량을 지녀 세상에 훌륭한 이름을 떨쳤다고 하였다.
碣文
祖考贈吏曹參判府君碣陰 17
저자의 祖考인 全焜(1513∼1591)의 墓碣 陰記이다. 공의 자는 而晦이고 본관은 沃川이 다. 공의 11대조 學浚이 고려조에 벼슬하여 그 이후로 계속 관직이 이어졌는데, 諱 侑은 奉翊大夫密直副使民部典書이고, 諱 淑은 奉 翊大夫版圖判書이고, 諱都는朝奉大夫典毉 少監이다. 공의 高祖 諱 五禮는 龍驤衛護軍이 고, 曾祖 諱 孝順은 中直大夫石城縣監이고, 祖考 諱應卿은 贈吏曹參判이다. 考는 成均生 員 彭祖인데, 參奉 黃孝坤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513년(중종 8) 2월 20일에 耆士浦의 宗家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천성이 嚴重하고 信直하였으며 窮達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參奉 廉正達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을 두었다. 장남은 汝楫인데,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차남은 汝霖이고 막내는 汝舟이다. 장남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沆이고 딸은 洪世俊에게 시집갔다. 차남은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문과에 급제한 湜이고 차남은 浤, 3남은 濬이며 2녀는 李宗胤, 梁應緖에게 시집갔다. 막내는 5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沔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沆은 아들이 없다. 湜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克恒과 克恬 이고 딸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浤은 1남을 두었는데, 어리다. 공은 1591년(선조 24) 11 월 17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이 79세이다. 高羅洞 先塋 뒤편 亥坐 巳向의 언 덕에 장사지냈다.
先考妣碣陰 18
저자의 先考인 汝霖(1538∼1620)과 先妣 인 月城李氏(1539-1619)의 墓碣 陰記이다. 先考인 汝霖은 자가 宗澤인데, 宣務郞 諱 焜 과 曲城廉氏 參奉 正達의 따님 사이에서 1538 년(중종 33) 6월 2일에 耆士浦의 집에서 태 어났다. 겨우 10세에 부모를 여의고 從母의 손에서 양육되었는데, 이 때문에 학문을 익히 지 못하여 성취를 이루지 못하였다. 1620년 (광해군 12) 1월 9일 正寢에서 세상을 떠났 으니 향년이 83세였다. 先妣 月城李氏는 赫居 世의 佐命功臣인 謁平의 후손으로 대대로 높 은 관직이 이어진 집안이었다. 高祖 諱 延孫 은 資憲大夫工曹判書이고 曾祖 諱 禮長은 中 直大夫行司僕寺正이고 祖 諱 膺禧는 副司果이다. 考는 參奉 諱 信인데, 成均生員 郭崇智 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539년(중종 34) 12월 11일에 先妣를 낳았다. 先考에게 시집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들어 56년을 앓다가 1619년(광해군 12) 12월 27일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이 81세 였다. 다음해 3월28일에 丹密 縣 物興의 子坐 午向의 언덕에 합장하였다. 나머지 선조록과 자손록은 위의 글 「祖考贈 吏曹參判府君碣陰」과 대동소이하다.
行狀
正憲大夫知中樞府事竹磵康公行狀(1634) 20
竹磵 康復誠(1550∼1634)의 행장이다. 康 復誠의 본관은 信川, 자는 明之이고 竹磵은 그의 호이다. 仲珍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惟善이다. 1579년(선조 12) 사마시에 합격한 뒤, 참봉‧直長‧察訪 등을 역임하였다. 1595년 柳成龍의 천거로 張顯光 등과 함께 발탁되어 장수 현감이 되었으며 곧 김제 군수로 옮겼는데, 정유재란 때 명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남원에 주둔한 왜적을 쳐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 뒤 1599년(선조 32) 고양 군수를 거쳐 천안 군수를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 하자, 왕세자로 있을 때 侍講한 인연이 있다 하여 加資되었으며, 동부승지‧우부승지를 거쳐 평산 부사‧전주 부윤‧청송 부사 등의 외직에 보임된 뒤 1617년(광해군 9) 都摠府副摠管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西宮에 유폐시키는 등의 난정을 행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인조반정 뒤 다시 부평 군수에 제수되었으며, 곧 성주 목사로 옮겼다. 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즉시 군대를 모아 인조를 호위하였다. 그 공으로 資憲大夫로 자급이 올랐고, 곧 正憲大夫로 자급이 올라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노쇠하여 향리인 善山으로 귀향하여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는『竹磵集』이 있다.
沙西先生文集跋 31
저자의 7대손 全宗漢이 지은 발문으로, 문집의 간행 경위에 대해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 저자의 詩文 遺稿 약간 권이 家藏되어 있었으나 탈고하여 간행되기도 전에 화재를 만나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게 되었다. 그 뒤로 자손들이 저자의 시문을 얻는 대로 기록해 두어 약간 권의 유고를 수집하였지만 가세가 영락하여 간행할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847년(현종 13)에 尙州의 長老와 의논한 다음 道院에 통문을 띄워 재물을 모으고 또한 사우들의 도움을 받아 문집을 편찬하였다가 1862년(철종 13)에야 비로소 李彙寧의 서문과 자신의 발문을 붙여 9권 4책의 활자 본으로 문집을 간행했다고 하였다.
附錄
卷1
行狀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 領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行資憲大 夫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春秋館事贈 諡忠簡公全公行狀 1
黃㦿이 지은 저자의 행장이다. 彭祖의 증 손으로, 할아버지는 鹽, 아버지는 이조판서 汝霖이고 어머니는 月城李氏 참봉 信의 따님이다. 西厓 柳成龍(1542∼1607)과 旅軒 張顯光 (1554∼1637)의 문인으로,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하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는데, 이 때의 공으로 金應南 의 추천을 받아 連原道察訪이 되었다. 1599년 禮賓寺直長으로 전임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03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07년 전적‧예조좌랑과 정랑을 역임하였고, 1611년 울산판관이 되어 고을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다음해 전라도 도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失政을 본 뒤 벼슬을 단념하고 鄭 經世‧李埈 등과 함께 산수를 유람하여, 세상 사람들이 商社의 三老라 일컬었다. 1623년 (인조 1) 인조반정으로 새 왕이 등극하자 예조정랑을 거쳐 수찬‧교리가 되어 經筵에 참석하였다. 1624년 李适의 亂이 일어나자 太僕 寺正이 되어 왕을 扈從하였고, 사헌부 집의가 되어 時事를 논하였다. 이어 병조참의‧병조 참지에 승진했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 대사간‧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을 방어하였고, 왕이 도성으로 돌아오자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그 뒤 예조참의와 예조참판에 임명되고 嘉善大 夫로 품계가 올랐으나 사양하였다. 1638년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대사성이 되었다. 왕이 巡檢使에 명해 下三道의 水軍을 정비하게 했으나 적절한 시책이 아니라고 반대하였다. 1642년 資憲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그 뒤 재차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상주 玉洞書院 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忠簡이다.
神道碑銘(幷序) 11
趙絅(1586∼1669)이 지은 神道碑銘이다. 자세한 내용은 글 앞의 저자 소개에 나와 있다.
神道碑陰跋 17
李鳳徵(1640∼1705)이 지은 神道碑陰跋이다. 子孫錄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다.
墓碣銘 19
蔡裕後(1599∼1660)가 지은 저자의 墓碣 銘이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저자 소개에 나와 있다.
諡狀 22
權愈(1633∼1704)가 지은 諡狀이다. 자세 한 내용은 행장과 대동소이하다.
附錄 卷2
輓詩
金應祖,沈東龜,洪鎬,金瑬,沈演,李景憲, 金藎國,金三樂,李燦,金鍌,權濤,李元圭,盧峻命, 鄭太和, 沈悅, 南以雄, 李植, 全命龍, 李德圭, 李大圭, 李後陽, 逸姓名 등이 쓴 輓詩가 실려 있다.
祭文
賜祭文 6
仁祖가 저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내린 제문이다.
道南書院儒生祭文(二) 7
道南書院의 儒生들이 저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
玉成書院儒生祭文 8
玉成書院의 儒生들이 저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
近嵒書堂儒生祭文8
近嵒書堂의儒生들이저자의죽음을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
魯溪書堂儒生祭文 9
魯溪書堂의 儒生들이 저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
梅岳書堂儒生祭文 10
梅岳書堂의 儒生들이 저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
松巖書堂儒生祭文 10
松巖書堂의 儒生들이 저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
白華書堂儒生祭文 11
白華書堂의 儒生들이 저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
霞谷書堂儒生祭文 11
霞谷書堂의 儒生들이 저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
鄕人祭文 11
고을 사람들이 저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
洪參議(鎬)祭文 12
洪鎬가 저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제문이다.
玉洞書院奉安文 13
尙州 玉洞書院에 저자의 位版을 봉안할 때의 奉安文이다.
常享祝文 13
尙州 玉洞書院에 저자의 位版을 봉안할 때의 常享祝文이다.
槎行贈言 14
저자가 중국으로 사신 갈 때 교유하던 문인들이 지은 送詩와 送序가 실려 있는데, 送詩를 지은 사람은 芝峯 李晬光, 鄭光績, 淸陰金尙憲, 浦渚 趙翼, 李聖求, 李敏求, 睦大欽, 訒齋崔睍,蒼石李埈,月沙李廷龜,趙絅,黔澗趙靖,李文伯,洪命亨,權晵,姜大進,辛啓榮,東溪權濤,黃時幹,金知復,金霱,任絖,李後陽이고,送序를지은사람은李植,孫遴,趙又新이다. 李中均(1861∼1933)이 썼다. 을축년(1925) 봄에 동려가 졸하자 동생인 경렬이 시문을 모아 깨끗이 베껴서 책을 만들고 정묘년(1927) 판각하기 위해 나에게 교감과 발문을 부탁하였다. 평소 추앙하던 분이어서 사양하지 않는다고 하고, 공의 뛰어난 자질, 사우 관계, 관력과 업적 등을 서술한 후, 이런 일을 주관하는 경렬 씨에 대한 칭찬으로 마무리하였다.
後識 20
權相圭(1874~1961)가 쓴 동려문집 발간후기이다. 동려 사후 6년만인 경오년(1930)에 문집을 완성했는데, 文行事業이 문집 속에 다 들어있고 여러분들이 狀碣文字에서 다 말하였다. 다만 공의 자호가 ‘雲汀’인 것은 적성에 있는 공의 별장에 雲雨汀이 있기 때문이며,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할 때 나라에 大變이 있어서 ‘東旅’라고 고쳤다고 하여 號의 유래에 대해 설명한 뒤, 나라 잃은 사람, 즉 한명의 나그네가 되어 돌아가시니 슬프다고 하였다.
(전백찬)
沙西集
서기(연령) 왕력 기사
1563(1세) 명종 18 1월 21일, 尙州에서 태어남.
1577(15세) 선조 10
塾舍에 나아가 공부함. 沙潭 金弘敏(1540~1594)이 그의 문장을 보고 크게 칭찬함.
1580(18세) 선조 13 江華崔氏를 부인으로 맞이함.
1586(24세) 선조 19 河上으로 西厓 柳成龍의 문하에서 학문의 요체를 들음.
1587(25세) 선조 20 부인 崔氏가 세상을 떠남.
1589(27세) 선조 22 南陽洪氏 天敍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이함. 증광사마시에 합격함.
1592(30세) 선조 25
왜란이 일어나자 진사 姜霔(1525∼1593)와 義兵을 모집해 많은 전과를 올림.
1593(31세) 선조 26 가을에 西厓 柳成龍을 만나 時事를 논함.
1596(34세) 선조 29
2월, 당시 좌의정 金應南(1546∼1598)의 천거로 連原道察訪에 제수되어 弊瘼을 제거하고 馬政을 회복함. ○4월,收稅差使員으로 可興倉에 있을 때 왜적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모든 사람들이 도망갔지만 홀로 남아 軍穀을 지킴.
1597(35세) 선조 30
왜적이 쳐들어오자 體察使가 忠州의 군량을 태워 버리라고 했으나 체찰사를 설득하여 그대로 보존하였고 결국 뒤에 萬斛의 군수를 확보하였음.
1599(37세) 선조 32 봄에 禮賓寺 直長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1601(39세) 선조 34 가을에 玉淵精舍로 西厓 柳成龍을 찾아가 朱書를 강독함.
1603(41세) 선조 36 9월, 式年文科에서 丙科로 합격하여 權知成均館學諭에 보임됨.
1605(43세) 선조 38 行承政院注書兼記事官에 제수됨.
1606(44세) 선조 39
通德郞, 成均館典籍에 제수됨. ○여름에 愚伏 鄭經世, 蒼石 李埈과 五賢祠의 건립을 의논함.
1607(45세) 선조 40
成均館典籍에 제수됨. 5월에 서애 유성룡의 訃音을 듣고 神位를 만들어 哭함. 7월에 장사를 지내고 輓詩를 지음.
1608(46세) 선조 41
忠淸道都事겸 春秋館記注官에 제수되어 억울한 獄事를 명쾌하게 해결하고 다른 고을에서 옮겨온 이주민 문제를 개혁함. ○선조가 승하함.
1609(47세) 광해군 1 예조 좌랑을 거쳐 정랑에 제수됨.
1610(48세) 광해군 2 「述事」 三首를 지어 스스로를 경계함.
1611(49세) 광해군 3 中訓大夫蔚山都護府判官兼春秋館記注官에 제수됨.
1614(52세) 광해군 6
金郊 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음. ○ 8월, 全羅道 都事로 부임함. 光海君의 亂政으로 곧 벼슬을 버리고 돌아옴. ○ 鄭經世, 李沙西先生年譜埈과 산수를 유람하며 교유하여 商山三老라고 불리움.
1617(55세) 광해군 9
愚伏鄭經世,月澗李㙉,蒼石李埈,訒齋崔睍등과함께玉成書院에서 강론함.
1619(57세) 광해군11
愚伏 鄭經世, 蒼石 李埈 등과 함께 『西厓先生文集』을 교정하려 했지만 모친의 병 때문에 참석하지 못함. ○ 12월, 모친상을 당함.
1620(58세) 광해군12 1월, 부친상을 당함.
1622(60세) 광해군14
7월16일에黔澗趙靖,月澗李㙉,蒼石李埈,修巖李襂,松溪李憲,南溪
康應哲, 愚淵 金知復 등 25인과 함께 五賢祠에 참배한 뒤 龍湫에 배를 띄우고 「赤壁賦」의 운을 나누어 시를 지음. ○ 11월에 慶尙道 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음. ○ 霞谷에 집을 지어 후학을 가르치고 講學하며 일생을 마무리할 계획을 세움.
1623(61세) 인조 1
3월에 인조가 즉위함. O 通訓大夫禮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에 제수됨. ○ 8월, 通訓大夫弘文館副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에 제수되었을 때 「辭職疏」를 올림. 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에 제수되어 經筵에서 進講하였음. ○ 11월 성균관 전적, 사헌부장령, 성균관 직강 등에 제수됨.
1624(62세) 인조 2
사복시 정에 제수됨. ○ 2월,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어가를 호종하여 天安에 이르러 사헌부 집의가 됨. 23일 부인 南陽洪氏가 세상을 떠남. 禮賓寺 正으로 체차되어 고향으로 내려감. ○ 3월, 병조 참의가 됨. ○ 10월, 동부승지를 거쳐 우부승지가 됨.
1625(63세) 인조 3
좌승지가 됨. ○ 형조 참의가 되어 朝京使 로 차출됨. 당시 遼陽을 後金이 점령하고 있어 바닷길로 燕京에 감. 도중에 풍랑을 만나 「皇城大洋遇風」 시를 지음. 槎行錄를 지음. ○ 부인 홍씨의 상을 당함.
1627(65세) 인조 5
예조 참의에 제수됨. ○ 2월, 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어가를 호종하여 江都에 감. 조정에서 화의를 의논하자 이에 반대하는 疏章을 올림. ○ 사간원 대사간이 되어 納諫諍, 去偏私, 修軍政, 減軍官, 勿恃和議, 勿爲譏察의 「六條箚子〉를 올림. 예조 참의, 이조 참의 등에 제수됨.
1628(66세) 인조 6 대사간에 제수되었다가 遞差되어 龍驤衛副護軍이 됨
1629(67세) 인조 7
愚伏 鄭經世, 月澗 李㙉과 함께 蒼石 李埈의 집에서 강학함. 예조 참의, 이조 참의,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다가. 체차되어 護軍이 됨.
1630(68세) 인조 8 예조 참의, 이조 참의, 병조 참의,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됨.
1631(69세) 인조 9 9월에 蘇齋 盧守愼과 西厓 柳成龍 두 선생을 道南書院에 從享함. ○ 10월에 외직을 청하여 慶州 府尹이 됨.
1633(71세) 인조 11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경주 백성들이 頌德碑를 세움. 愚伏鄭經世의 부음을 듣고 매우 상심함. 8월 장례를 치를 때 輓詩를 지음.
1634(72세) 인조 12
月澗 李㙉과 함께 朱書와 『小學』을 강론하여 後學들을 啓發함. ○ 사간원 대사간이 되어 임금의 덕을 논하는 상소를 올림. ○ 麟坪大君의 혼사 중 예에 맞지 않은 점을 논함. ○ 또 상소하여 궁중의 금법을 엄히 할 것을 논함. ○ 병조 참의에 제수됨.
1636(74세) 인조 14
1월, 仁烈王后의 상을 당하여 상경했다가 곧 귀향함. ○ 사간원 대사간,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음. ○ 丙子胡亂이 일어나 임금이 南漢山城으로 들어가자 義兵 천여 명과 곡식을 모아 忠州櫓洞에 주둔함.
1637(75세) 인조 15
1월, 聞慶에 진을 치고 要路를 지켜 그 지역을 지켜냄. ○ 2월, 부제학에 제수됨. 얼마 후 이조 참의, 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휴가를 얻어 귀향함.
1638(76세) 인조 16 대사헌, 예조 참판, 대사성에 제수됨. ○ 「八條箚子」를 올림.
1642(80세) 인조 20
2월, 李聖求의 계청으로 특별히 資憲의 품계를 더하여 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春秋館事에 제수되고 이어 대사헌에 다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 11월 7일, 尙州에서 세상을 떠남.
1643 인조 21 2월 2일, 尙州 柏田山 선영에 장사 지냄. ○ 좌찬성에 추증됨.
1680 숙종 6 11월 4일, 尙州 鳳儀山에 改葬하여 부인 洪氏와 합장함.
1692 숙종 18 忠簡公이라 贈諡함.
1714 숙종 40 尙州 玉洞書院에 位牌를 봉안함.
1822 순조 22 沃川 鶩潭書院에 位牌를 봉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