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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안악사건” 에 대한 검색결과 16건의 검색결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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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성과물(15)

사전(15)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사로 1915년을 전후해 출옥하였다. 이와 같은 일제의 조처는 조국광복을 위한 민족문화운동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의 시작이었다. 『기려수필(騎驢隨筆)』 『과 3‧1운동과 나』(최명식, 긍허...
  • 해서교육총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직후인 1910년 12월부터 1911년 3월에 걸쳐 있었던 소위 (, 일명 안명근사건)으로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은 안명근의 군자금 모금을 빌미로 황해도 일대의 민족지도자들을 체포, 구금한 일제의 민족운동탄압책이었다. 김구‧최명식‧김홍량(...
  • 안명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밀고하여 이 해 12월평양에서 붙잡혔다. 뒤이어 군자금을 보관해두었던 배경진과 박만준‧한순직‧원행섭(元行燮) 등이 붙잡혀 모두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것이 안명근사건, 즉 의 발단이었다. 안명근의 자금 공작은 당시 활발히 진행되던 황해도에서의 애국계몽운동[...
  • 김홍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독립군기지 설립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뒤?황해도의 애국계몽운동가 160여 명이 검거된 ()으로 인하여, 1911년 1월 일본경찰에 잡혀 징역 15년형을 언도받고 8년간 복역하였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최익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지회에서 활동하였다. 신민회가 추진하던 만주의 무관학교의 설립과 독립군기지의 창건사업을 저지하기 위하여 일제가 을 만들어 황해도의 신민회회원을 일제히 검거하자, 1911년 1월에 붙잡혀 징역 7년을 선고받고 5년간 복역하였다. 1921...

주제어사전(1)

  • / [역사/근대사]

    1910년 11월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을 모집하다가 황해도 신천지방에서 관련 인사 160명과 함께 검거된 사건. 안명근은 한일합방이 강제로 체결되자 서간도로 이주하여, 그 곳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인재 양성을 목표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자 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