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조휘영” 에 대한 검색결과 총 11건의 검색결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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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성과물(9)
사전(1)
- 정외지설 [옛 편지 낱말사전 | 한림대학교]실정에 맞지 않는 말. 僕雖昏.之甚 安敢爲情外之說 以調戱令左右也 千萬不然 千萬不然, 심희수(沈喜壽), 45-238분야문화‧생활 | 유형문헌
고서·고문서(8)
- 황병윤(黃炳潤)에게 지어준 그의 증조(曾祖) 황필구(黃必九)의 묘갈명(墓碣銘). [서간문에 기초한 조선후기부터 구한말까지 민간 생활사 자료 DB 구축 ―경주지역 李中久家 五代 古文書 資料를 중심으로― | 단국대학교]珍, 曾祖諱英夏, 祖諱琪, 壽躋通政, 自平海 遷于迎日. 考諱致信. 妣晉氏[州]河氏善行女, 有母範. 公以純廟壬申三 月二十一日生, 姿相端粹, 眉眼明瀅, 自八九歲時, 擧止異凡兒, 不喜與 同儕遊嬉. 旣上學, 不煩程督, 而自知勉勵. 性於孝, 事親, 愉色婉 容, 承順無違. 家貧,...관련문서번호K006 | 대표표제어황병윤(黃炳潤)에게 지어준 그의 증조(曾祖) 황필구(黃必九)의 묘갈명(墓碣銘).
- 이중구(李中久)가 작성한 증 통정대부 공조참의 김공 유허비명(贈通政大夫工曹參議金公遺墟碑銘). [서간문에 기초한 조선후기부터 구한말까지 민간 생활사 자료 DB 구축 ―경주지역 李中久家 五代 古文書 資料를 중심으로― | 단국대학교]六世 味鄒王始受禪, 傳至敬順王, 王之十四世諱晫, 高 麗判圖判書, 號南村, 四傳而諱恂, 本朝侍講院 弼善, 號春臯, 端廟遜位, 屛不仕, 生諱處昆引儀, 號寓翁, 自公州遷慶州, 生諱孟仝縣監, 於公爲中世, 高 祖諱永敏, 曾祖諱振邦, 祖諱鼎德, 考諱光宅, 將 仕郞, 妣月城李氏益壽...관련문서번호K427 | 대표표제어이중구(李中久)가 작성한 증 통정대부 공조참의 김공 유허비명(贈通政大夫工曹參議金公遺墟碑銘).
- 상소문(上疏文)과 묘갈명(墓碣銘)의 두 문건. [서간문에 기초한 조선후기부터 구한말까지 민간 생활사 자료 DB 구축 ―경주지역 李中久家 五代 古文書 資料를 중심으로― | 단국대학교]公間九世, 高祖諱渶權, 曾祖諱奎彦, 祖諱光斗, 號樵山. 考諱仁源, 號槐庭, 俱以文行稱. 妣玉山全氏大元女, 有婦德母儀. 公以哲廟庚戌生, 幼才氣 出衆, 不煩提撕, 而嶄然見頭角, 性於孝, 不離父母側, 務承順謹定省. 癸亥喪先公哀慕如成人旣長自以早失嚴訓爲歿身痛, 事母夫人, 至 誠...관련문서번호K170 | 대표표제어상소문(上疏文)과 묘갈명(墓碣銘)의 두 문건.
- 이중구가 지은 증가선대부 호조참판(贈嘉善大夫戶曹參判) 자희(自喜) 최치덕(崔致德)의 묘갈명 초고본. [서간문에 기초한 조선후기부터 구한말까지 민간 생활사 자료 DB 구축 ―경주지역 李中久家 五代 古文書 資料를 중심으로― | 단국대학교]六部之一也, 系出新羅沙梁部. 由麗入鮮, 代儒名碩, 遂爲顯懿之閥. 中世有諱斗崦, 官判官, 於公間七世. 高祖諱興立, 通政, 曾祖諱英俊, 贈掌樂 正, 祖諱徹巖, 贈刑議, 考諱斗萬, 贈工議, 號松齋. 志學善事親, 飭身治家有法. 妣永川 崔氏喆崇女. 以肅廟己卯十月六日生公于市南里第...관련문서번호K244 | 대표표제어이중구가 지은 증가선대부 호조참판(贈嘉善大夫戶曹參判) 자희(自喜) 최치덕(崔致德)의 묘갈명 초고본.
방산유고 [영남학파의 사유세계와 역사인식 -영남학파 문집 상세 해제 및 주요저작 번역- (2단계) | 한국국학진흥원]저술한 것은 모두 자신을 새롭게 하기 위함이었다.저자도 고인을 본받아 날마다 새롭게 되도록 부지런히 노력하겠다는 내용이다. 銘 梅巖臺銘(幷小序) 17 예천군 중산리 소재 梅巖臺에 대하여 銘을 짓고 서문을 함께 수록하였다.저자의 조부 醉軒趙徽榮(1805∼1854)이 유람...분야문학 | 유형문헌
주제어사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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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휘영 / 趙徽榮 [종교·철학/유학]
1805년(순조 5)∼1854년(철종 5). 조선 후기 유학자. 부친은 조현상이다. 초시에는 합격, 1850년(철종 1)에 실시된 전시에서 실패한 후, 과거에 대한 뜻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고향의 문사들과 교유하며,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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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원 / 趙鳳遠 [종교·철학/유학]
1855(철종 6) ~ 1933. 증조는 조현상, 조부는 조휘영, 아버지는 조태익, 어머니 남기주의 딸이다. 증조부는 안동김씨와 혼인하여 조휘영. 조규영을 두었고, 예기와 소학을 좋아하였고 1836년에 중산리 주마산 아래로 복거하여 후손들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방산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