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윤지술” 에 대한 검색결과 총 23건의 검색결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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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성과물(21)
사전(10)
- 윤지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전(傳)에 연고없이 선비를 죽이면 사대부는 자리를 떠나야 한다고 하였는데 나는 사대부는 못 되지만 떠나야 하겠다” 하고 벼슬을 버리고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윤지술ㆍ임창(任敞)ㆍ이의연(李義淵)을 가리켜 신임(辛壬)의 삼포의(三布衣)라고...이칭별칭 노팽(老彭)| 북정(北汀)| 정민(正愍)
- 박인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을 발론(發論)하였고, 숙종이 죽자 윤지술(尹志述)과 함께 3년 복제(服制)를 바로 행할 것을 상소하였으며, 또 윤지술 등 관유(館儒) 7인과 함께 명릉(明陵) 지문(誌文)을 고쳐야 한다고 상소하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과거의 뜻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시주(詩酒)로...이칭별칭 성보(聖甫)| 포옹(圃翁), 매국헌(梅菊軒)
- 강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되었다. 곧 풀려나 1723년(경종 3) 홍문록(弘文錄)에 뽑히고 수찬이 되었으며, 이듬해 부수찬이 되었다. 1727년 부교리를 거쳐 다시 수찬이 되어 경연(經筵)에서 윤지술(尹志述)을 탄핵하다가 파직당하였다. 그해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자 기용...이칭별칭 자순(子淳)| 국포(菊圃)
- 겸산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心字說辨)」과 정언환(鄭彦煥)의 이기설에 대하여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이론을 인용하여 논변한 「이기설변(理氣說辨)」, 송시열(宋時烈)이 유배되었을 때 그 입장을 변호한 「우암선생변무소(尤庵先生辨誣疏)」, 윤지술(尹志述)의 신원을 청한 「북정윤지술신원소(北汀尹志述...
- 포옹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의하기 위해 사학에 보낸 통문이다. 「권당일기(捲堂日記)」는 저자를 비롯한 성균관유생들이 명릉의 지문 때문에 관을 비운 일로 처벌을 받은 기록이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저자를 비롯해 윤지술(尹志述)‧곽수걸(郭守杰)‧허우(許宇)‧심경(沈坰)‧김인백(金仁白)...
고서·고문서(10)
- 도배(島配) [한국역사상 도서(섬) 관련 고・중세 기초자료 DB 구축과 활용 | 국민대학교]無撓屈, 三百年培養之效, 可見矣。 成廟朝, 自大內行神祀於泮宮, 泮儒驅而逐之。 成廟聞而喜之曰: ‘士氣如此, 吾復何憂?’ 予於尹志述事, 有所褒美者, 蓋爲此也。 今此疏儒, 雖與此有異, 而予嘉其不屈, 特爲還收島配之命, 此疏還給出送可也。” 楺卽趨出。 喬岳曰: “賢關之疏, 異於他...출처전거英祖實錄 | 지역분류일반 | 자료문의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홍영의 교수
- 도민(島民) [한국역사상 도서(섬) 관련 고・중세 기초자료 DB 구축과 활용 | 국민대학교], 用需國家者也。 粵自祖宗朝, 敎養有方, 久任師長, 責其成效, 厚其稟養, 安其棲息, 試之以經術, 課之以文藝, 且於章奏之間, 雖或有狂妄之言, 必優容而扶植之, 滿朝卿相, 皆從庠序中出來, 蓋其漑根食實之效, 有如是夫, 一自尹志述之被禍也。 士氣惴惴, 以言爲諱者, 殆四五年, 而幸...출처전거承政院日記 | 지역분류일반 | 자료문의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홍영의 교수
- 도민(島民) [한국역사상 도서(섬) 관련 고・중세 기초자료 DB 구축과 활용 | 국민대학교], 用需國家者也。 粵自祖宗朝, 敎養有方, 久任師長, 責其成效, 厚其稟養, 安其棲息, 試之以經術, 課之以文藝, 且於章奏之間, 雖或有狂妄之言, 必優容而扶植之, 滿朝卿相, 皆從庠序中出來, 蓋其漑根食實之效, 有如是夫, 一自尹志述之被禍也。 士氣惴惴, 以言爲諱者, 殆四五年, 而幸...출처전거承政院日記 | 지역분류일반 | 자료문의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홍영의 교수
- 도중(島中) [한국역사상 도서(섬) 관련 고・중세 기초자료 DB 구축과 활용 | 국민대학교]爲第一義, 故不能遠引而去, 以致因循羈縻, 尙不得展人情, 到此寧不掩抑, 臣若得數月之暇, 可以了此二事, 而卽今本曹兩堂出使, 臣獨在焉, 其不可循例請由則決矣。 伏乞聖明, 特許遞解, 俾遂私願焉。 臣於乞免之章, 宜不敢贅陳他說, 而職掌所關, 亦何敢自外乎? 頃日筵中, 有冤死人尹志述,...출처전거承政院日記 | 지역분류일반 | 자료문의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홍영의 교수
- 문묘의궤(文廟儀軌) [장서각 국가전적 자료센터 구축사업(1단계) | 한국학중앙연구원]蕃), 송나라의 태학생 진동(陳東)‧구양철(歐陽澈) 등을 배향한 사당. 1802년(순조 2) 우리나라의 절사인 윤지술(尹志述)도 함께 모셨다. 성균관 태학생들이 규범으로 삼도록 하기 위하여 1725년(영조 1)에 세웠다. 처음에는 숭절사(崇節祠)라 하였고, 1764년(...내용분류국왕/왕실-의례-의궤 | 형식분류고서-의궤 | 현소장처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신문·잡지(1)
- 청년생활_1994_04 [국내외 근현대 신문잡지 자료의 조사, 수집 해제 및 DB화 | 성균관대학교]도시새조류 도시의 새로운 혼인바람-≪어린남편≫현상 서운 6 사회일각 ≪윤지술집≫의 풍파 갈흠 8 심령의징검다리 밤비는 소리...발행국가중국 | 발행연도1994
주제어사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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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술 / 尹志述 [종교·철학/유학]
1697(숙종 23)∼1721(경종 1). 조선 후기의 학자. 수 후손이다. 윤지술·임창·이의연을 가리켜 신임의 삼포의라고 불렀다. 1725년(영조 1) 노론이 집권하자 신원되고, 1802년(순조 2) 사현사에 제향되었다. 1841년(헌종 7)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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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운 / 金德運 [종교·철학/유학]
조선 후기의 문신(1687∼1767). 송애 김경여 증손, 조부는 김방신, 부친은 통덕랑 김중석이다. 7살에 어머니 함평이씨를 여의고 중부인 도정공 김창석의 밑에서 자랐다. 신임사화 때 사형 당한 윤지술이 1725년(영조 1)에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자, 모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