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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송국택” 에 대한 검색결과 35건의 검색결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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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성과물(33)

사전(12)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의] 1597(선조 30)∼1659(효종 10). 조선 중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택지(澤之), 호는 사우당(四友堂). 동지중추부사 세훈(世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 화수(樺壽)이고, 아버지는 희명(希命...
    이칭별칭 택지(澤之)| 사우당(四友堂)| 효정(孝貞)
  • [한국 고전소설 캐릭터 사전 | 국민대학교]
    호란 때 강화로 적이 공격해 들어와 원손이 성을 나가자 원손을 따라 성을 나와 배를 타고 도망친다. 도망치는 중 교동 사람들이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고 한 것을 조정에 보고해 벼슬이 가자가 되나 대신이 종묘 사직의 관원으로 묘사주를 버렸다고 하여 승직이 취소된다.
    분야문화‧생활 | 유형인물
  • () [조선왕조실록 전문사전 편찬 |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행정가관료/문신 인물 한국 조선 인조~현종 이기순 이범직 2009 택지(澤之) 사우당(四友堂) 효정(孝貞) ...
  • 민광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는?강화도의 수비가 허술하여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종묘서영(宗廟署令)으로 ()과 함께 그곳에 피신중이던 원손(元孫)을 데리고 죽음을 각오하고 바다를 건너?교동(喬桐)을 거쳐 인근 섬으로 피신하여 무사하였다. 난이 그친 뒤 원손을 호위한 공으로 통정으로 승진...
    이칭별칭중집(仲集)
  • 김인 [한국 고전소설 캐릭터 사전 | 국민대학교]
    내관이다. 빈궁의 명으로 원손을 받들어 바닷가로 나간다. 원손을안고 서쪽으로 가나 말이 지치자 내관 이 말을 바꾸어 준다.
    분야문화‧생활 | 유형인물

고서·고문서(21)

  • 69380 B069380 동래 東萊 정치행정 承政院日記 仁祖 18年 10月 6日_003 ○大司憲金榮祖, 掌令成台耉, 持平李時萬啓曰, 東萊爲府, 係是關防莫重之地, 緩急之際, 臨機酬應, 所關非細, 固非等閑守令之比也。 新除授府使, 雖有良善之稱, 別無應變之才, 所任非其...
    출처전거承政院日記 | 자료문의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홍영의 교수
  • 69406 B069406 동래 東萊 정치행정 承政院日記 仁祖 15年 7月 4日_008 ○傳于曰, 欲送瀋陽, 各樣琉璃器皿, 及倭環刀, 東萊稅銀除出, 使之擇貿上送, 而自該曹貿易之意, 俾勿漏洩事, 言于該曹。
    출처전거承政院日記 | 자료문의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홍영의 교수
  • 69407 B069407 동래 東萊 정치행정 承政院日記 仁祖 15年 7月 4日_015 ○, 以戶曹言啓曰, 東萊有時急貿易之事, 本曹算員中, 伶俐解事一人擇定, 明日內發送, 而令兵曹給馬, 何如? 傳曰, 依啓。
    출처전거承政院日記 | 자료문의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홍영의 교수
  • 18434 B018434 건석수어 乾石首魚 수산물 承政院日記 仁祖 26年 7月 18日_005 ○, 以戶曹言啓曰, 司宰監貢案, 付乾魚等物, 常患不足, 其中乾石首魚數字缺貿得繼用, 而供上之用, 則貿得未易, 故波市坪數字缺石魚五十束, 卵醢一斗, 以補其不足之數矣。 卽接戶曹...
    출처전거承政院日記 | 자료문의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홍영의 교수
  • 18497 B018497 건어 乾魚 수산물 承政院日記 仁祖 26年 7月 18日_005 ○, 以戶曹言啓曰, 司宰監貢案, 付乾魚等物, 常患不足, 其中乾石首魚數字缺貿得繼用, 而供上之用, 則貿得未易, 故波市坪數字缺石魚五十束, 卵醢一斗, 以補其不足之數矣。 卽接戶曹移文,
    출처전거承政院日記 | 자료문의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홍영의 교수

주제어사전(2)

  • / [종교·철학/유학]

    1597(선조 30)∼1659(효종 10). 조선 중기의 문신. 세훈 증손, 할아버지는 화수, 아버지는 희명, 어머니는 민수경의 딸이다. 재당숙인 진사 몽인에게 입양되었다. 김장생의 문인, 송준길과 교유하였다. 1624년(인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

  • 정절서원 / 靖節書院 [교육/교육]

    ()을 추가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