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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삼반차직” 에 대한 검색결과 10건의 검색결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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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성과물(9)

사전(4)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의] 고려시대 액정국(掖庭局)의 남반(南班) 초입사직(初入仕職). [내용] 문종 관제에서의 전전부승지(殿前副承旨)를 1116년(예종 11)에 개칭한 것이다. 이 개칭의 이유는 동반(東班)이나 서반(西班)에 비하여 천시되던 남반의 관직에 승지라는...
  • 액정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 상승내승지를 삼반차사(三班差使), 부내승지를 삼반차(三班借)로 각각 개칭하였다. 개칭을 한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승지의 칭호가 너무 과하다고 생각해 송나라의 근시제도(近侍制度)의 하나인 사신제(使臣制)의 직명을 거의 그대로 차용한 것...
    이칭별칭액정원|내알사|항정국
  • 남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음은 물론이다. 한편, 1116년(예종 11)에는 전전승지를 삼반봉직(三班奉職), 전전부승지를 (), 상승내승지를 삼반차사(三班差使), 부내승지를 삼반차차(三班借差)로 각각 개칭하기도 하였다. 남반직은 양반 및 천민과는 유를 달리하는 양민이...
    이칭별칭내관|근시|횡반
  • 승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전부승지(殿前副承旨: 예종 11년에 으로 개칭)‧상승내승지(尙乘內承旨: 三班借使)‧상승부내승지(尙乘副內承旨: 三班借差)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남반의 초입사로(初入仕路)였다. 그리고 비서성(秘書省)‧합문(閤門)‧예빈성(禮賓省)에 각각 4인, 상승국(尙乘...
    이칭별칭승선

고서·고문서(5)

  • 속자치통감장편_續資治通鑑長編369 哲宗 元祐元年閏二 [국내외 고려시대 원전자료의 총집성과 종합 DB화―동아시아 자료간 상호대조와 연동을 통한 가치 증대― | 고려대학교]
    6048 중국 사서 속자치통감장편 159 선종(宣宗) 3 1086 -2 續資治通鑑長編369 哲宗 元祐元年閏二月 (丙午) 詔 祭奠弔慰高麗國王所管勾舟船客人 船主梢工虞際 與 盛崇李元積 與大將 5대ㆍ송, 조공책봉, 해...
    국가중국 | 서명속자치통감장편 | 왕대선종(宣宗)  3
  • 宋名臣言行錄 續集 卷六 張克戩 忠確公 주희(朱熹), 이유무(李幼武) 29 張克戩 忠確公 字德祥耆之曾孫以蔭補復擧進士知河間縣又知吳縣治有聲擢衞尉丞從弟克公爲御史中丞嘗論罷蔡京及京再相併坐廢踰年起知祥符縣久之知廣德軍京畿倉陛辭留爲庫部員外郎出守汾州以守城功加直秘閣進直龍圖閣除右...
    서명宋名臣言行錄 | 저자주희(朱熹), 이유무(李幼武) | 자료문의여주대학교 박현모 교수
  • 朴誘令冠帶因出師以賊級予之白於帥府表授充經【並記聞墓誌】略司指使且力爲辦其家事凡居室騎從衣食之具悉出將軍嵩感恩既深將軍反不禮以奴畜之或掠治械繫數日嵩雖不勝其苦卒無一辭望將軍將軍知可任兵事居半年召嵩謂之曰吾將以事使汝吾戒汝所不言其苦雖有甚于此者汝能爲吾卒不言否嵩泣對曰䝉將軍恩教致身榮顯常誓以死...
    서명宋名臣言行錄 | 저자주희(朱熹), 이유무(李幼武) | 자료문의여주대학교 박현모 교수
  • 士第公獨慷慨沈固喜讀司馬兵法熈寜初置武士擧趙淸獻公表言公能㑹丁通議公䘮不果西淸獻于通議姑子也才以内擧人服其心 元豐中 入武學 累試出諸生右 廷試䇿用字 犯昌陵嫌名 財得 調台州海内松門巡檢 高麗遣使朝 大風失道 漂至松門海上 使人問塗 將出天台以西 公曰 使者受命趨四明 今天子之命使與夫導候...
    국가중국 | 서명북산집 | 왕대기타  
  • 宋名臣言行錄 別集 卷十下 劉錡【武穆公】 주희(朱熹), 이유무(李幼武) 64 劉錡【武穆公】 字信叔秦州成紀人大觀間以父仲武功補政和六年差充秦鳳經司機宜宣和二年改熙河徽宗即位授閤門祇候尋差潼川㢘訪使者靖康初授閤舍九月知洮州兼洮東安撫建炎二年知西寧州兼㳂邊安撫隴右都䕶張浚奏其功陞右武大...
    서명宋名臣言行錄 | 저자주희(朱熹), 이유무(李幼武) | 자료문의여주대학교 박현모 교수

주제어사전(1)

  • / [정치·법제/법제·행정]

    고려시대 액정국의 남반 초입사직. 문종 관제에서의 전전부승지를 1116년(예종 11)에 개칭한 것이다. 이 개칭의 이유는 동반이나 서반에 비하여 천시되던 남반의 관직에 승지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명칭은 송나라의 근시제도인 사신제를 모방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