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김치인” 에 대한 검색결과 총 261건의 검색결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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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성과물(258)
사전(62)
- 광화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정의] 오방불교(五方佛敎)를 창교한 김치인(金致寅)의 문집. [내용] 불분권 1책. 필사본. 필자가 가진 책자는 치인의 제자 박춘근(朴春根)이 쓴 것으로 편집연대가 적혀 있지 않다. 그러나 1923년 『광화김처사법언록』이 출간되기 전에
- 김치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김치인 영정 1716(숙종 42)-1790(정조 14). 조선 후기의 문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칭별칭 공서(公恕)| 고정(古亭)| 헌숙(憲肅)
- 속명의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김치인(金致仁) 등이 편찬한 『명의록』의 속편. [내용] 정조의 명을 받아 당시 문신 김치인 등 12인이 편찬한 저서이다. 1책 45장. 활자본. 1778년(정조 2)에 교서관(校書館)에서 간행되었다. 권두에 진차(進箚...
- 심이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김치인(金致仁)의 도움으로 화를 면하였다.이후 공조참의ㆍ이조참의ㆍ승지ㆍ대사헌ㆍ대사성ㆍ형조참판ㆍ비변사제조ㆍ대사간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1776년(정조 즉위년) 9월에 서명선(徐命善)ㆍ정홍순(鄭弘淳) 등과 함께 『천의소감(闡義昭鑑)』의 찬집당상(纂輯堂上)이 되었다. ...이칭별칭 덕기(德器)
- 이해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예조참판을 두루 역임하였다. 1772년 대사간으로 있으면서는 여러차례 영의정을 지낸 김치인(金致仁)이 붕당(朋黨)을 조성하고 사사로움을 이루었다고 상소하여 그를 유배시켰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고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대사헌의 몸으로서 역적들의...이칭별칭 자함(子涵)
고서·고문서(196)
- 교리(校理) 김치인(金致仁) 상서(上書) [한국학자료센터 중앙허브 구축(1단계) | 한국학중앙연구원]내용분류국왕/왕실-보고-상서 | 형식분류고문서-소차계장류-상서 | 현소장처논산 노성 파평윤씨 명재 종가
- 명의록(明義錄) [해외소장 한국전적의 해제 및 디지털화를 통한 공유화 사업(1단계) | 고려대학교]내용분류사회-역사-역사기록 | 형식분류고서-역사서 | 현소장처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리치몬드 문고)
- 명의록(明義錄) [해외소장 한국전적의 해제 및 디지털화를 통한 공유화 사업(2단계) | 고려대학교]내용분류사회-역사 | 형식분류고서-역사서 | 현소장처일본 동양문고(東洋文庫)
- 속명의록(續明義錄) [해외소장 한국전적의 해제 및 디지털화를 통한 공유화 사업(1단계) | 고려대학교]내용분류사회-역사-역사기록 | 형식분류고서-역사서 | 현소장처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리치몬드 문고)
- 明禮宮(1722)_전라도 해남현 [19세기 사회경제 변동과 국가시스템의 충돌-규장각 소장 궁방전 관련 자료 데이터베이스 및 심층해제 | 서울대학교]2_021796 18241_1_1172 奎18241_1 明禮宮(1722) 전라도 해남현 彔山面 전라도 해남현 彔山面 102 102결 김치인(金致仁) 김치인(金致仁)자료번호18241_1_1172 [奎18241_1] | 자료문의서울대학교 김건태 교수 연구팀
주제어사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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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인 / 金致仁 [종교·철학/유학]
조선 후기의 문신(1716∼1790). 1738년(영조 14) 생원시 합격, 1748년 춘당대 문과에 장원해 예문관전적과 정언을 거쳐 1766년 좌의정. 영의정이 됐으나 1772년 당파를 조성했다는 죄로 유배당했다. 정조가 즉위하자 승습주청사의 정사로서 청나라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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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록 / 明義錄 [종교·철학/유학]
1776년(정조 즉위년)에 세손(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던 홍인한·정후겸 등을 사사한 일을 기록한 책. 3책. 인본. 정조의 명에 의해 간행되었다. 1777년(정조 1)에 정조 자신이 찬집청을 설치하고 김치인 등에게 편집하게 하였다. 이 때 정조도 적극 참여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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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록언해 / 明義錄諺解 [언어/언어/문자]
1777년(정조 1) 정조의 명에 의해 간행된 『명의록』 언해서. 3권 4책. 『명의록』은 정조가 왕세손으로 있을 때 그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반대한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 등의 역모사건의 시말을 공표하여 충도(忠道)를 밝히고자, 정조가 김치인(金致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