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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곤언” 에 대한 검색결과 53건의 검색결과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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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성과물(51)

사전(3)

  • 조긍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해 의문이 나는 점을 묻기 위하여 다시 김흥락을 만났다. 1910년 합병소식을 듣고서는 두문불출하면서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동서의 학설을 비교 궁리하여 『()』을 저술하였다. 다음해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그러나 학문에 대한 열의가 식지 않아 「...
    이칭별칭 중근(仲謹)| 심재(深齋)
  • 비거 [옛 편지 낱말사전 | 한림대학교]
    이 반드시 욕될 것이며, 앉을 곳이 아닌데 앉으니 몸이 반드시 위태로울 것이다’라고 말했다(易曰 困于石 據于.藜 … 子曰 非所困而 名必辱 非所據而據焉 身必危)”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 天使以宣諭事 近將出來 鄙人.竊非據 .愧奈何萬萬不盡, 유근(柳根), 12-263
    분야문화‧생활 | 유형문헌
  • 심재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알 수 있는 글이다. < >은 옛글을 읽다가 남겨놓은 기록이다. 당시 유자로서 관심을 가지는 모든 분야를 포괄한 내용이다. 도의 존재, 한비자(韓非子)에 대한 의론, 문학, 오륜(五倫), 묵자(墨子)의 겸애설(兼愛說) 등의 다양하고 광범한 내용이 담겨 있다. 문...

고서·고문서(48)

  • 送(金)書狀【(啓)】朝京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자료 집성(集成)과 정본화(定本化) | 전주대학교]
    栗谷先生全書拾遺 卷之一 【拾遺】賦 178 送(金)書狀【(啓)】朝京 39_121_077.jpg 送(金)書狀【(啓)】朝京 逶遲周道客紛紛, 許國賢勞孰似君? 執奠三脂燕路轄, 籌邊一踏雪山雲。 心親不待源源見, 目擊何須衮? 行色漸遙相識絶, 只應孤月照慇懃。
    서명율곡선생전서(栗谷先生全書) | 자료문의전북대학교 오항녕 교수
  • 紀綱之解紐, 推可知矣。 且鎭將査問推捉時, 頭民輩頑拒云云。 亦一變怪, 其在杜漸防微之道, 不可無嚴査懲治之擧, 該島瞭望將及頭民, 捉致沁營, 到底盤問後, 依律酌處, 雖以該之, 事在管轄, 其常時不能檢飭之失, 在所難免, 統禦使李顯稷, 從重推考, 至於鎭將, 則此島雖非關於本鎭,...
    출처전거承政院日記 | 지역분류일반 | 자료문의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홍영의 교수
  • 其改構景福宮之光化門也, 臺臣諫曰: “土木之役, 不可興也’, 門之傾危, 所當改構, 而臺臣尙之言者, 以其時他無土木之事, 故以此爲大役, 而諫之也。 及本國釁起, 北方戍禦之事始緊, 築城兩界, 咸吉、平安、江原、黃海四道之民。 人皆曰: ‘若此不已, 數年之後, 不可救也。’ 內則始撰...
    출처전거文宗實錄 | 자료문의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홍영의 교수
  • 顔淵 第五章(제오장) [성호전서 정본화 사업 | 한림대학교]
    爲也. 旣是天之所爲, 則人亦何能以與焉? 故曰: “在天.” 若之, 則“死生”亦可謂“天”, “富貴”亦可謂“命”. 若分而言之, 則指“天”亦無柰處, 謂之“命”, 指“天”有所爲處, 謂之“天”. 故曰: “莫之爲而爲者, 天; 莫之致而至者, 命也.” 국중본(가)에는 이 단락이...
    서명논어질서 | 저자이익(李瀷, 1681~1763) | 자료문의청명문화재단 태동고전연구소(www.chungmyung.org)
  • 童子首絰說 [성호전서 정본화 사업 | 한림대학교]
    故葛帶, 絰期之絰.” 又曰: “絰其緦、小功之絰, 因其故葛帶.” 此類不可殫記. 之, 則絰帶皆可謂之絰; 分言之, 則在首者爲絰, 在腰者爲帶. 《疏》所謂“絰帶”者, 卽腰首二絰也, 何謂 謂: 《星湖全集》에는 ‘爲’로 되어 있다. 不現於諸書?
    서명예설유편(禮說類編) | 저자이익(李瀷, 1681~1763) | 자료문의청명문화재단 태동고전연구소(www.chungmyung.org)

주제어사전(2)

  • / [언론·출판/출판]

    별집류(別集類). 명석정에 소장되어 있는 책이다. 책수는 1책이며, 판종은 필사본(筆寫本)이다. 규격은 28.1×19.3cm이다. 표제는 ()이다.

  • 조긍섭 / 曺兢燮 [종교·철학/유학]

    항일기의 학자(1873∼1933). 11살 때 《근사록》을 10일 만에 베껴 쓰는 놀라운 글재주를 보였고, 1910년 합병소식을 듣고부터는 두문불출하면서 아무도 만나지 않았으며, 동서의 학설을 비교 궁리하여 《》을 저술하였다. 일정한 스승은 없었으나 타고난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