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필터

[전체] “강태동” 에 대한 검색결과 12건의 검색결과가 있습니다.

홈 > 검색결과

연구성과물(10)

사전(3)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의] 1889(고종 26)∼1946. 독립운동가. [개설] 일명 석룡(錫龍).?함경남도 이원 출생. [생애 및 활동사항] 1911년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김구(金九) 등과 같이 붙잡혀 황해도 해주형무소에서 복역한 바 있으며, 향...
    이칭별칭석룡(錫龍)
  • 이정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금원인 ()을 통해 전달하였다. 1921년 5월 사유토지[270석 추수분]를 다시 매각해 대금 전액을 휴대하고 그 해 6월 임경호(林京鎬) 등과 같이 북경으로 가서 이회영(李會榮)에게 헌납하였다. 여기에서 약 1년간 조성환(曺成煥)ㆍ김좌진(金佐...
    이칭별칭 만위(晩瑋)| 춘호(春湖), 한정(漢汀), 법명(法明)|방(芳)|윤봉조(尹鳳朝)
  • 황종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정증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같은 해 4월 이운형(李運衡)‧이영봉(李永鳳)‧김규열(金圭烈) 및 임시정부 요원 ()‧이정규(李丁奎)와 접선하여 대한청년단 이름으로 된 격문과 임시정부포고문 제1∼3호를 평안‧전라‧경상도 등지에 살포하였다. 1920년 봄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그 해...

고서·고문서(7)

  • 巡邏軍四名, 參酌定配, 坐更人放送。 御營大將李義微曰: “彼地關外, 方有戰爭之事云。 元末紅巾之禍, 至及於黃海道, 元之餘孽, 衡突, 咸興, 定平等地, 此亦不可不虞矣。 西路險阻, 有曉星嶺淸川江洞仙嶺靑石泂臨津江, 而淸川, 大同, 自有兵使監司鎭之。 洞仙則因鄭維岳言, 今已種...
    출처전거肅宗實錄 | 자료문의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홍영의 교수
  • 418445 B641692 임진 臨津 군사교통 肅宗實錄 十七年(1691) 五月 숙종실록_11705005_003 ... 於黃海道, 元之餘孽, 衡突, 咸興, 定平等地, 此亦不可不虞矣。 西路險阻, 有曉星嶺淸川江洞仙嶺靑石泂 臨津江, 而淸川, 大同, 自有兵使監司鎭之。 洞...
    출처전거肅宗實錄 | 자료문의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홍영의 교수
  • 1913년 안동군 북후면(北後面) 도촌동(道村洞)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영남 자료권역센터 구축(1단계) | 한국국학진흥원]
    이 예천은풍에 옮겨 살았다. 檥의 둘째 아들 審言은 예천 맛질(渚谷)파를 이루고, 넷째 아들 審思가 甘泉派를 이루었으며, 맏아들 審己와 여섯째 審行이 도촌을 지켜 지금까지 세거해 오고 있다. 장곡은 조선 말기 이 처음에 정착하였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晉州 姜氏들이...
    내용분류경제-농/수산업-토지대장 | 형식분류고문서-증빙류-토지대장 | 현소장처안동시청
  • 冬節有窺望軍】要害鴨綠江博州江淸川江閭延羅伊乃洞甘音洞朱沙洞於用恠江界滿浦高山里知寧恠碧潼餘侍山蔡家洞倉浦碧團口子義州金洞田靑水駱駄灘仇寧檢洞島暗林串彌勒堂九龍淵三歧伊庫洞中吾江水口方山口子龍川辰串吾道串少爲浦石串立所郭山石浦牧場一牧美島【宣川】館路察訪一人所管館十三【生陽大同安定肅寧安興嘉平...
    서명世宗實錄地理志 | 자료문의여주대학교 박현모 교수
  • 추안급국안 : 경신년(1740, 영조 16) 노택(魯澤)의 신문기록[推案] [<추안급국안> 정서화 및 DB 기반 구축 | 전주대학교]
    耶非徒列邑擧皆然矣至於本邑則尤有甚焉稱爲立 碑生祠願留甚至於刼奪民還麥刼奪民食匙刼奪民賣柴督捧 民錢者殆過一千餘兩而盡入於運恒賊之餘黨啓采等之手中 丙辰條敗再徵民間米一百三十石零盡失於夢賊餘黨 象三等之手中掘塚斧破棺斧打屍罪人太恒太光彭老等干囑 之錢亦歸於顯賊之姪師大手中於此亦可以觀世變之不尋...
    서명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 권책020 | 자료문의전주대학교(연구책임자 : 변주승 교수)

주제어사전(2)

  • / [역사/근대사]

    1889-1946. 독립운동가. 일명 석룡(錫龍). 함경남도 이원 출생. 1911년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김구(金九) 등과 같이 붙잡혀 황해도 해주형무소에서 복역한 바 있으며, 향리에서 3·1운동을 주동하여 고문을 받은 바 있다. 이어 그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가

  • 황종화 / 黃鍾和 [역사/근대사]

    임시정부 요원 ()·이정규(李丁奎)와 접선하여 대한청년단 이름으로 된 격문과 임시정부포고문 제1∼3호를 평안·전라·경상도 등지에 살포하였다. 1920년 봄 일본경찰에 붙잡혀 그해 12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0년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