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군관구 정치국 7과의 1945년 12월 활동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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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사업]한국학분야 토대연구지원사업
러시아문서보관소 소장 해방후 한국사회 관련 자료의 수집 번역 및 주해 (1945~1950)
서지사항
· 표제어연해주군관구 정치국 7과의 1945년 12월 활동 보고서
· 키워드제39군, 제25군, 모스크바3상회의
· 대표주제어모스크바3상회의
· 설명문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이후 북한 정치상황 및 제25군과 제39군의 활동에 관한 보고.
· 발신자연해주군관구 정치국 7과 부과장 추코프
· 자료문의동국대학교팀(연구책임자:박명호 교수)

문서 해제


대표표제어: Отчет о работе 7 отдела Политуправления Приморского военного округа за декабря месяц 1945 года
산출물명: ЦАМО,ф.172,оп.614631,д.37,лл.1-12.
자료구분: 타이핑
저작권자: 러시아연방국방부중앙문서보관소
원자료언어: Московское совещание трех министров иностранных дел
면수: 12
발신일: 1946.01.12.


번역문


연해주군관구 정치국 7과의 1945년 12월 사업 보고서

기밀.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은 1945년 12월 말의 북조선 정세를 규정한 결정적인 요소였다.
3상회의 결정이 공표되자 북조선공산당, 직업동맹위원회, 평안남도 농민위원회, 민주청년동맹, 여성동맹, 그리고 만주의 조선독립연맹에서는 모스크바회의 결정을 찬성하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북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국은 평양시에서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시 전체 시위를 조직하였다. 10만 명 가까이 참여한 이 시위는 조직국의 슬로건 아래 진행되었고, 모스크바 결정에 대한 주민 대중의 찬성과 소연방에 대한 북조선 인민대중의 호감 증대를 보여주었다.
이와 더불어 반동분자들의 활동도 첨예해졌는데, 개별적인 반동그룹들이 함흥, 원산, 진남포에서 실패로 끝난 모스크바회의 결정 반대시위를 조직하려 시도한 것이나 평양, 함흥, 진남포에 적의에 찬 선동삐라가 유포된 것은 이를 증명해 준다. 1945년 12월 31일 이른 새벽 평양시에서는 다음의 내용이 담긴 삐라 45장이 발견되었다.
1. “감독통치를 거부하자. 자유로운 자치를 요구하자. 그것은 5천 년 역사를 가진 3천만 조선 인민에게는 최대의 공격이다.”
2. “조선은 러시아인과 미국인,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에게만 살기 좋은 곳이고, 조선 인민은 살기가 힘들다. 공산주의자 없는 민주정부를 수립하자.”
3. “신탁체제 반대. 조선 독립 만세. 그것은 조선 인민에게 지독한 수치이다.”
4. “3천만 동포들이여. 피와 총탄으로 조선 민족의 깃발 아래 뭉치자.”
1945년 12월 30일부터 1946년 1월 1일까지 그런 삐라 유포로 평양시에서 70명이 체포되었는데, 주로 중학교 학생들이었다. 체포된 사람 중 세 명은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테러행위 조직 임무를 띠고 서울에서 파견된 자들이었다.
민주당 당수이자 인민위원회 위원장인 조만식과 조소문화협회 위원장 황강연(Хван Га-Нен)은 조선에 대한 모스크바회의 결정 지지 공동선언문 서명을 거부했는데, 황강연은 문화협회는 “정치단체가 아니다”라는 핑계를 댔다. 조만식은 너무 멀리 나간 탓에 인민위원회 위원장직에서 물러나고 위원회도 탈퇴했다. 위원회 위원인 민주당원 4명이 그를 따랐다. 남은 민주당원들은 모스크바회의 결정을 찬성하는 인민위원회 결정에 동조했다. 평안남도인민위원회 임시위원장으로 홍기주가 선출되었다(민주당원으로, 그때까지 평양시위원회 위원장이었음). 제1부위원장으로는 이주영(공산당원)이 선출되었다.
12월 말과 이어지는 시간은 모스크바회의 결정과 관련된 작업에 할애되었다. 모든 도 중심지에서 각 인민위원회 및 사회단체 협의회가 개최되어, 조선에 대한 결정내용을 정확하게 번역해 주고 그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이런 작업은 서울의 라디오와 신문들이 조선에 대한 4강의 신탁 결정을 원조와 협력 조치가 아닌 보호령화로 해석하고 논급하고 있기도 해서 특히 필요했다.
1946년 1월 1일 평양라디오방송국을 통해 모스크바회의에 관한 보도 전문(全文)이 방송되었다. 시 전역에 조선에 대한 모스크바회의 결정 번역문이 나붙었다. 46년 1월 2일에는 특별 라디오방송이 제작되어, 회의 결정 지지에 대한 조선공산당, 직업동맹위원회, 농민위원회, 그리고 여타 민주단체들의 공동선언문과 김일성과 조선독립연맹 위원장 김두봉의 연설이 라디오로 방송되었다. 조선의 신문 편집장 협의회가 개최되어 참석자들은 모스크바회의에 관한 보도 번역 전문과 공동선언문을 받았다. 조선에 대한 결정을 방송하기 위해 확성기가 이용되었다.
각 기업소와 기관, 직업동맹 단체에서 집회가 열려 16,000명이 넘게 참가하였다. 46년 1월 1일 함흥에서는 화학콤비나트 노동자들의 만민공동회가 열렸고, 평야의 극장과 클럽들에서는 공산당 대표들이 연설을 통해 조선에 관한 결정문을 읽고 설명을 해 주었다.
1월 3~4일 동안 평양시에서는 모스크바 결정 헌정 집회에 약 3만 명이 참가했다. 이와 유사한 집회들이 함흥, 신의주, 해주, 원산 등지에서 진행되었다.
제25군 정치국 7과는 조소문화협회의 대규모 조직사업을 실행했다. 현재 평양시의 협회원은 471명이다. 협회는 강령과 규약을 갖추고 있다. 해주시, 신의주시, 철원시, 함흥시, 청진시, 진남포시와 남천군, 신천군, Чанчу군, Канвон군 등지의 협회 지부 창설을 주도하는 그룹들이 꾸려졌다. 이른 시일 안에 평양시에 있는 협회 지도부는 협회 지부를 열기 위해 자신의 대표들을 각 도로 파견할 것이다. 조선어로 된 소련 서적이 없어 협회 사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제25군 정치국 [7]과 일꾼들은 군정이 각 정당 및 그 지도자들을 연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북조선의 정치 및 사회 활동가 150명의 이력서와 평가서가 작성되었다. 그 외에도 북조선공산당, 조선민주당, 민주청년동맹, 여성협회, 직업동맹, 조소문화협회, 신의주 사회민주당의 성원과 활동에 관한 평가가 내려졌다.
[7]과 일꾼들은 북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국 제9차 총회와 평안남도 공산주의 단체 대표자회의 및 평안남도 농민동맹 대표자회의를 준비하고 실행하는 데 적극 참여하였다.
북조선의 공업 상태에 대한 면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12월에는 다음의 주제들에 대해서 지역 주민을 위해 조선말로 강연들이 진행되었다.
“소련에서의 조선인의 삶”.
“일본의 압제에서 조선을 해방시키기 위한 붉은군대의 역사적 임무”.
“독일 파시스트 분쇄를 위한 붉은군대의 역사적 임무”.
“스탈린헌법은 소비에트 인민의 위대한 승리의 헌법이다.”
〈볼셰비키공산당 약사(略史)〉 1장과 2장이 번역되었다. 각양각색의 포스터와 슬로건 1천부, 스탈린 동지 초상화 3백부, ‘일본에 대한 연합국의 승리’라는 포스터 3천부, 모스크바회의 결정에 대한 민주단체들의 공동선언문 2십만부가 배포되었다.
각 군위수사령부 사업의 점검 과정에서 그때까지 통역관이 없던 몇몇 군(특히 황해도에서도 신천군)에서는 위수사령관들과 지방권력기관들 사이에 정상적인 상호관계가 무너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공통 언어가 없는 관계로 위수사령관들은 지방권력기관 사업에 제때 등록을 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오류를 수정하지 않았다. 이런 결함은 무엇보다도 각 군위수사령부에 통역관이 임명됨으로써 제거되고 있다. 12월에 평양시로 소련 국적의 조선인 120명이 왔다. 이들은 모두 각자의 준비 정도에 따라 군위수사령부 통역관이나 젤레즈노프(Железнов) 그룹 통역관, 조선인 120명이 배우고 있는 러시아어 강습 강사, 그리고 조선 언론에 대한 군 검열부대에 임명되었다. 신참 일꾼들은 모두 다 충분한 경험이 없고 기능과 전반적인 정치적 군사적 예비지식의 향상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훈련을 편성하도록 조치가 취해졌다. 각 연합부대 사단 정치부 선임교관들의 사업과 조선 언론의 검열에 대한 교시가 작성되어 군사회의의 승인을 받은 상태이다.
12월에 해주와 진남포 수비대 장교단 회의가 열렸는데, 여기서 각 연합부대 부대장들과 정치부장들은 장교들에게 해외 체류와 관련된 임무를 제기했다. 그런 식의 장교단 회의가 12월 25일 함흥시 수비대 장교들을 상대로도 이루어졌다. 부대들의 편의를 위해 확성기를 통해서 최근 소식들이 방송되고 있다.
만주에서 우리 군이 배치된 지구의 12월 정세는 더욱 더 첨예해졌다. 만주에서 정권을 장악하려는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싸움이 치열해진 것이다. 볼리(Боли)시 백력(伯力). 청나라 관할 시기의 명칭으로, 현재의 하바롭스크-역주.
에 국민당군 제15군(사령관은 차오유신(Чжао Юй-син) 중장), 둔화에 제2군(사령관은 리신고(Ли Син-го) 장군) 편성이 확정되어 있었다. 제15군과 제2군은 우리 군의 만주 철수 이후 공산당과의 싸움과 권력 장악을 위한 것이다. 우리 군무관들에 저항하는 행위들도 있다. 12월 26~29일 목단강시에서는 목단강 지구에서 온 창푼샨(Чжан Фун-шань)의 지도 아래 국민당원 비밀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국민당군 편제 문제, 국민혁명군 제8군의 12연대와 29연대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문제, 그리고 공산당원들과 국민혁명군 제8군 및 소련사령부 지도자들에 대한 테러 조직화 문제가 논의되었다. 그와 같은 회의들이 둔화와 길림에서도 있었다.
12월 16일 밤 길림에서 국민당원들은 다음과 같은 슬로건을 내붙였다. 1) “길림 동포들이여. 여러분을 족쇄에서 해방시켜 줄 중앙군이 도착했습니다.” 2) “여러분 모두는 중앙군이 길림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3) “고통받는 동지들이여. 좀 더 같이 노력해서 강도 같은 제8군을 몰아냅시다.” 4) “동포들이여. 누가 여러분을 약탈했는지 양심껏 말씀해 보십시오. 강도 같은 제8군 아닙니까.” 따위이다.
국민당원들은 반소련 선전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국민당 부대들 가운데 쟝유신(Тянь Юй-син)이라는 한 부대장은 국민혁명군 제8군에게 다음과 같은 호소문을 썼다. “붉은군대가 억압받는 중국 인민을 해방시켰다고 지금까지도 여러분에게 이야기들을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반대입니다. 소련군은 우리의 모든 무기와 공장과 그밖에 많은 것을 자기네 나라로 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우리의 중앙군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곧 우리나라 여자들을 강간하려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게 소련군이 하고 있는 짓입니다.” 여순과 대련의 지방자치에 반대 지하 삐라들도 나오고 있다(첨부 참조).
반동분자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붉은군대에 대한 광범위한 중국 인민층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만주 전역에서 중국 인민의 지지를 받으며 계속해서 확대 발전하고 있는 민주주의 분자들의 활약이 이를 증명한다. 일례로 조소친선협회들은 눈부신 성공을 거뒀다. 현재 협회들은 우리 일꾼들의 도움을 받아 이미 각곳에 조직되어 있다. 협회들은 소중우호조약에 관한 설명사업을 진행하고, 중국 인민이 소련 각 민족의 삶을 알 수 있도록 보고와 강연을 조직하며, 중국어로 된 소련 서적 출판을 준비하고 있다.
12월에는 특히 스탈린헌법에 대한 대규모 설명 사업이 진행되었다. 중국 주민들은 스탈린헌법의 날을 대대적으로 기렸다. 준비 과정에서 [7]국 일꾼들은 지역 열성분자들과 공동으로 스탈린헌법에 관한 강연과 대담을 진행했다. 12월 5일 회합과 만찬회가 열렸다. 각 시는 소련과 중국 국기로 장식되었다. 신장시 주민들은 소련 문장이 그려져 있고 소비에트 인민에 대해 중국어와 러시아어로 감사인사가 쓰여진 붉은기를 소련사령부에 증정했다. 소중우호협회는 소련헌법과 제13차 임시 소비에트대회에서 스탈린 동지가 행한 헌법 초안에 대한 연설을 발표했다.
구두 선전을 통해 만주에서의 소련군 철수 문제, 소중우호조약, 스탈린 헌법, 붉은군대의 해방임무, 그리고 레닌과 스탈린에 관하여 타스통신이 보도한 것을 설명해 주었으며, 다음 주제들의 보도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소련은 중국 인민의 성실하고 믿음직한 친구이다”, “소련 각 민족의 행복한 삶”, “소련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관하여”, 그리고 10월혁명 28주년 관련 내용.
제39군 정치국 [7]과 장교들은 각 중소우호협회 열성분자들과 공동으로 대련, 여순, 금주의 지역 주민들을 위해 3만 명이 참가한 강연회와 보고회를 44차례 열었다. 제5군 장교들은 116차례의 보고회와 대담을 진행했다. 주민들은 강연회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제39군 정치국 7과는 각 소중우호협회 열성분자들을 유치하여 “위대한 10월사회주의혁명 28주년 기념 V.M.몰로토프의 강연” 출판물을 준비하여 10만부를 발행, 배포하였다. 강연물은 몰로토프 동지의 초상화가 담긴 팜플렛으로 인쇄되었다. 팜플렛은 요동반도의 모든 도시와 주거지에 배포되었다. 대련, 여순, 금주에서 중국어로 발행되는 신문들은 몰로토프 동지의 강연을 몇 부분으로 나누어 지면에 실었다. 중국어 노래 모음집은 5천부 발간되었다. 노래집에는 인민가와 반일가, 혁명가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노래집은 시장에서 수요가 컸고 빠르게 팔려나갔다. “연립정부에 관하여”라는 마오쩌둥의 팜플렛은 재판으로 2만부를 찍었다. “중국 해방구들의 투쟁의 삶”이라는 팜플렛도 2만부를 다시 출판했다. 수요가 굉장한 중국인용 러시아어 교재는 출간 준비가 끝난 상태이다. 코르네이추크(Корнейчук)의 희곡 〈볼셰비키 나라로 가는 퍼키슨씨의 임무〉는 세트로 되어 있다. 10월사회주의혁명 28주년에 바치는 잡지가 2만부 발행되었다. 일본어로 번역된 벨리치코(Величко)의 팜플렛 〈패배당한 베를린〉도 세트로 되어 있다. “소련의 국가 건설”이라는 팜플렛의 중국어 번역은 끝나가고 있다.
제5군 정치국에서는 “소련군의 만주 철군에 관한 타스통신 보도”라는 삐라를 5만장 발행했고, 몰로토프 동지의 10월혁명 28주년 기념 강연(팜플렛)과 러시아어, 중국어, 조선어로 된 군위수사령관의 명령도 발행했다.
이렇게 해서 12월 한 달간 제39군과 제5군에서 발행한 중국어 인쇄물이 9종에 20만부였고, 일본어 인쇄물 1종, 조선어 인쇄물 1종이었다. 중국어 인쇄물 3종과 일본어 인쇄물 1종은 출판 준비가 끝나 있다.
1945년 12월 21일 금주시에서 중국어 신문인 〈중소우호〉 1호가 나왔다.
요동반도에서는 확성기를 통한 방송이 33차례 이루어졌고, 청취자는 약 20만 명이었다. 제5군이 배치된 지구에서는 [그런] 목소리방송이 55차례 이루어졌다. 확성기를 들고 농촌으로 온 것은 제39군이 사업 출발을 잘한 것이다. 33차례 방송 중 12차례가 반도의 농촌에서 이루어졌다. 방송 주제는 다음과 같다.
1. “붉은군대는 중국 인민의 친구이자 보호자”
2. “붉은군대의 해방 임무”
3. “붉은군대는 소련의 강력한 군대이다”
4. 몰로토프 동지의 강연 제3부
5. 소련 헌법에서 “소련 시민의 권리와 의무” 장(章).
대련시에서는 소련 사진 전시회 준비가 끝났다. “중소 우호는 극동 평화의 토대이다”라는 주제의 예술 포스터들이 준비되었다.
대련, 여순, 금주에서는 소련과 미국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다. 미국 영화들은 정치국 장교들이 사전 검열을 한다. 대련에서는 지역 주민을 위해 연해주 연예극장의 노력으로 세 번의 쇼가 조직되어 8천이 넘는 관객이 들었다. 제39군 정치국 일꾼들은 12월 19일 소비에트 예술가들과 중국 인텔리들의 만남을 조직했다.
여순에서는 80명으로 구성된 시의 지도일꾼과 인텔리들을 위해 12월 13일부터 16일까지 3일에 걸쳐 세미나가 진행되었다. 세미나 참석자들이 청취한 강연 테마는 다음과 같다.
1. “국제 정세”
2. “2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
3. “2차 세계대전에서 민주주의 국가들의 역할”
4. “소련과 중국의 우호동맹조약의 의의”
5. “중국의 정치적 위기”
세미나의 기본 과제는 열성분자들이 국제정세와 중국의 국내정세 문제들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원들은 세미나 사업에 적극적이고 조직적으로 참여하였다.
제39군 정치부는 반도의 일본 주민을 상대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대련의 일본인 노동자‧사무원 직업동맹 설립을 위한 조직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직업동맹 결성 문제와 관련해 12월 16일 일본인 노동자 집회가 열렸다. 12월 16일 대련의 일본인 극장에서는 체홉의 희곡 〈벚나무 동산〉이 일본어로 공연되어 일본인 관객들 사이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주민들 사이에는 〈니혼심분〉 니혼게이자이심분(일본경제신문).
과 스탈린 동지의 초상화가 널리 유포되고 있다. 12월부터 제39군 정치국은 일본군 전쟁포로들을 상대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들에게 〈니혼심분〉 2천부와 스탈린 동지와 칼리닌 동지 초상화 2천부를 배포하였다.
제39군 정치부 장교들은 대련의 러시아 공민회관 관리를 지원하고 있다. 러시아어와 영어로 된 소련 관련 소규모 도서관이 설치되었고, 회관에 소련중앙신문이 제공되었다. 12월에는 연해주 연예극장 배우들의 쇼가 조직되었다. 러시아 공민들의 소련 귀화를 담당하는 정부측 위원회에도 계속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제39군 정치부 장교들과 각 사단 정치부 선임교관들은 장교, 부사관, 병사들을 위해 다음의 주제로 군부대에서 10회의 강연회를 가졌다.
1. 붉은군대의 요동반도 주둔 목적.
2. 지역 주민과의 상호관계.
3. 소련과 중국의 우호관계.
4. 외국 주둔 소련군의 가치와 명예, 그리고 경계태세.

결론
1. 제39군과 제5군 정치부서들의 1945년 12월 사업을 분석해 보면, 노동자농민붉은군대 총정치국장인 상장 시킨(Шикин) 동지가 각 부대의 사업과 관련해 내린 지시의 현실화 사업이 지금까지도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지역 주민을 상대로 한 매우 중요한 기초 문건과 자료들의 구술선전 규모도 아직 충분하지 않고, 또 제39군과 제5군 정치부서들의 장교 및 모든 구성원의 기능 향상을 위한 학습 조직화가 부재함이 드러난다.
이런 결함들을 제거하기 위해 관구 정치국 [7]과에서는 제39군과 제25군 [7]과의 선임교관들로 구성된 특수여단을 파견했다.
2. 중국어‧조선어‧일본어로 된 소련 정치서적과 예술서적, 그리고 소연방 관련 이동전시회 및 상설전시회 조직에 필요한 자료들이 충분하지 않은 점은 이후 지역 주민들과 함께 사업을 전개하고 개선시키는 데 장애물이 될 것이다. 소연방 문화예술에 대한 지역 주민의 관심이 급증하였으므로, 조선과 만주의 각 도시와 촌에 있는 영화관들에 소비에트 영화를 계획적이고 중앙집중적으로 공급하는 문제와, 소비에트 예술가들을 조선과 만주로 체계적으로 파견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연해주군관구 정치국 7과 부과장, 상장 추코프(Чуков)

46년 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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