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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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사업]한국학 국영문 사전 편찬사업
한국외교사전(근대편)
서지사항
분야정치‧법제
유형제도
시대근대
생년1820
졸년1899
관직고종의 생부
관직고종 즉위 후 10년간 조선 국정 장악
집필자연갑수

본문

이름은 하응(昰應),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이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은 인평대군(麟坪大君, 인조의 아들)의 6대손으로서, 1815년 은신군(恩信君, 영조의 아들)의 후사가 되었는데, 유일한 종친으로서 순조(純祖)의 지우(知遇)를 받았다.
흥선대원군은 남연군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서 1834년 흥선부정(종3품)이 되어 종친으로서의 의례적인 관직을 시작하였다. 1843년 흥선군으로 봉군되었고, 1847년 종친부 유사당상이 되어 종친부의 업무를 주관하였다. 1860년 왕실 족보 즉 선원록(璿源錄)에 관한 권한도 종부시(宗簿寺)로부터 넘겨 받아와서 『선원속보(璿源續報)』의 간행을 주도하는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1863년 12월 철종(哲宗)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였고, 흥선군 이하응은 대원군에 봉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집권하게 된 흥선대원군은 심각한 내우외환에 직면하고 있었다. 즉 1860년에는 영‧불연합군이 북경(北京)을 함락시켜 청국의 황제가 피신하기도 하였고, 1862년에는 부세제도의 문란 등에 항의하는 전국적인 농민들의 소요가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다양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최고의 권력기구로서 외척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기반이 되었던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복설하였다. 그리고 의정부와 동일한 위상을 갖는 최고의 군사기관으로 삼군부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권력구조의 개편과 병행하여 무신, 남인, 북인 등 그동안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세력들도 과감히 등용하였다. 이 같은 개혁의 구심점으로서 국왕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을 위한 경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무리한 정책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1866년에는 고액 화폐인 당백전을 주조, 유통시켰다. 당백전을 주조하여 유통시킴으로써 정부는 이익을 얻었으나 물가가 앙등되었다. 당백전은 6개월도 안되어 주조가 중단되었지만 1867년부터는 청전을 유통시켰다. 청전은 청나라에서도 유통이 잘되지 않던 악화인데, 그 수입과 유통을 공인함으로써 다시 물가 상승을 부추겼다. 부유한 백성들에게 원납전을 사실상 강제로 징수하였는데, 원납전은 경복궁 중건뿐만 아니라 군비확충을 위해서도 배정되는 경우가 많아서 백성들의 원망을 많이 샀다.
한편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하여 실시한 전주 이씨들에 대한 우대책은 흥선대원군정권이 세도정권적 속성을 갖고 있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관료제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하여 부정한 관료들을 엄벌에 처하였는데, 이러한 엄벌은 서학교도들에 대한 가혹한 박해와 함께 흥선대원군정권이 일종의 공포정치를 행한 인상을 주게 되었다.
정치개혁과 함께 부세제도 등에 대한 개혁도 추진하였다. 문란해진 환곡제도를 바로 잡기 위해 일부 지역에서는 환곡을 폐지하여 토지세로 전환하기도 하였다. 향리층의 주도로 군현단위로 시행되던 환곡제도와는 달리 면 단위에서 사족이나 부유한 백성들이 주도하는 사창제도를 시행함으로써 환곡제도를 보완하였다.
양반 사족층(士族層)들은 개인별로 납부하는 군포의 부과에서 사실상 제외되고 있었는데, 호(戶) 단위로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호포법(戶布法)을 시행함으로써 부세 대상을 넓히는 한편 양반 사족층의 신분적 특권을 배제하였다. 한편 사액서원 중 47개소만 남겨두고 전국의 모든 서원을 철폐하였다. 이로써 지방 사족들의 사회적 기반도 약화되었다.
이 같은 정치, 사회, 경제적 개혁을 추진하면서 각종 법령과 제도도 정비하였다. 이를 위하여 『대전회통(大典會通)』, 『육전조례(六典條例)』, 『은대편고(銀臺偏攷)』, 『양전편고(兩銓偏攷)』 등의 법전이나 『홍문관지(弘文館志)』 등과 같은 관서지를 간행하였다.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격변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1860년 북경조약(北京條約)의 결과물로 연해주(沿海州)를 영토로 획득함으로써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조선과 새로 국경을 접한 러시아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흥선대원군은 조선에 잠입해 있던 프랑스 신부들과 접촉하기도 하였다. 프랑스 신부들과의 접촉은 프랑스 및 영국과의 제휴도 염두에 둔 파격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프랑스 신부들이 전해준 러시아의 위협에 대한 정보는 과장된 것으로써 현실성이 없었다. 게다가 이들은 조선의 정국에 관여하려한 혐의도 있었으며, 흥선대원군과의 비밀접촉 사실도 누설되었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그동안 접촉하였던 서학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으로 급선회하였으니 이것이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였다.
병인박해 과정에서 프랑스 신부들도 함께 처형되자, 이를 빌미로 프랑스는 1866년 조선을 침공하였다(병인양요). 즉 프랑스는 청국 정부가 중개하는 조선의 협상 시도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강화도를 점령하여, 조선의 조운로(漕運路)를 차단하면서 조선 정부를 압박하였다. 흥선대원군정권은 프랑스의 침략에 단호한 척화(斥和)정책으로 맞섰으며, 결국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군은 강화에서 철수하였다. 1868년에는 프랑스 페롱(Feron) 신부의 사주를 받은 독일인 오페르트(E. J. Oppert)의 남연군묘 도굴 사건으로 인하여 프랑스를 비롯한 서양에 대한 조선의 적대적 감정은 더욱 고양되었다.
한편 1866년 미국국적의 무장상선인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平壤)에까지 와서 통상을 요구하며 약탈을 하다가 전소된 사건이 있었다. 미국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면서 조선과 조난선 구휼에 관한 협정의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정권은 미국과의 공식적인 통상관계가 진행되는 것을 거부하는 입장이었다. 1871년 미국은 조난선 구휼뿐만 아니라 통상조약체결을 요구하며 아시아함대를 인솔하여 강화도에 출현하였다(신미양요).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가기 전에 조선 영해인 손돌목에 들어온 미국 군함에 대한 조선 측의 포격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은 광성보 등 조선 측 군사시설을 파괴하는 무력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무력시위의 결과 조선 정부가 유약한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주로 손돌목 포격 사건에 대한 책임문제에 대하여 지루한 공방만을 거듭하다가 결국은 통상조약에 대한 본격적인 협상도 제대로 벌이지도 못한 채 미국 함대가 철수하였다.
프랑스와 미국의 무모한 군사적 도발은 흥선대원군정권의 강렬한 척화정책을 북돋았을 뿐이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계기로 흥선대원군 정권은 외세를 물리쳤다는 강한 자부심을 얻었으나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한 유연한 접근성은 정권초기보다도 경직되었다.
두 차례의 양요(洋擾)를 겪으면서 흥선대원군정권은 강력한 군사력 편성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전국에 약 3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포군을 설치하였다. 화약무기의 개발에도 박차를 가해서 청국에서 간행된 『해국도지』의 내용을 보고 수뢰포 등을 제작하였고, 화약무기의 개량과 효율적인 사용을 위해 청국의 화포전문서적인 『연포도설집요(演砲圖說執拗)』 등을 번각 출판하여 보급하기도 하였다.
1873년 11월 고종의 친정(親政)으로 흥선대원군은 권좌에서 물러났고, 이듬해 7월 양주(楊洲) 직곡으로 은거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은거는 영남 남인들이 대원군봉환을 요청하는 만인소 운동으로 반정부투쟁을 벌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결국 실패하였고, 1875년 6월 흥선대원군 스스로 운현궁(雲峴宮)으로 돌아왔다.
운현궁으로 돌아온 흥선대원군은 마침 조선의 주요한 외교 현안이었던 일본 서계 수리문제에 대하여 일본이 조선과 약정한 방식의 서계가 아니면 받아들이지 말라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1876년 조일수호조규가 군사적 충돌 없이 원만히 마무리되자 더 이상의 반대운동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조선 정부의 외교정책이 교린(交隣)국가였던 일본과의 수호조규를 넘어서서 미국과의 수교로 방향을 잡아 나가게 되자 위정척사운동은 다시 고양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의 정치세력도 동요하였다. 1881년 안기영(安驥泳) 등이 흥선대원군의 서자인 이재선(李載先)을 추대하여 반정을 일으키려던 음모가 발각되기도 하였다. 1882년 6월에는 민씨척족정권의 부패와 차별대우 등에 불만을 품은 구식군대가 봉기하여 민씨척족정권을 몰아내고, 일본공사관 등을 습격하였다(임오군란). 고종은 사태 수습의 전권을 흥선대원군에게 의뢰하였고, 흥선대원군은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새로 성립한 흥선대원군정권은 개화정책의 핵심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철폐하고, 삼군부를 부활시켰다. 반개화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도 새로 수교한 미국과의 조약을 파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7월 13일 흥선대원군이 청국 군대에 의하여 청국으로 납치됨에 따라 33일만에 정권은 붕괴되었다.
청나라 천진(天津)으로 연행된 흥선대원군은 청국의 심문을 받은 후 보정부(保定府)에 연금되었다. 임오군란 이후 청국의 조선에 대한 속방화(屬邦化)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고, 이에 대항하는 고종의 반청자주화 정책도 지속되었다. 갑신정변 이후 고종이 러시아와의 밀약을 시도하자 청국은 고종을 견제하기 위하여 그동안 보정부에 연금시켰던 흥선대원군을 1885년 8월 조선에 귀국시켰다. 흥선대원군이 귀국은 했으나 이번에는 조선정부에 의하여 운현궁에서 사실상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다시 정치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된 계기는 1894년 청일전쟁이었다. 동학농민봉기를 계기로 청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게 되었고, 일본군은 청국군의 철병제의를 거부한 채 그해 6월 경복궁을 점령하여 흥선대원군을 섭정의 자리에 앉혔다. 일본의 의도는 흥선대원군을 명목적인 섭정에 놓으려는 것이었지만 흥선대원군은 자파 세력을 점차 확충해나가면서 개화파와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청국군과 동학농민군에게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결국 일본의 강압으로 그해 10월 정계 은퇴를 선언하게 되었다.
1895년 8월 명성왕후(明聖王后) 살해사건에 흥선대원군이 동원되었다. 즉 명성왕후 살해사건이 조선의 내부 정변에 의한 것으로 위장하려던 일본의 각본에 의하여 낭인배 등에 의하여 모셔진 채 살해 현장인 경복궁에 뒤늦게 도착하였다. 그러나 1896년 2월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일 정권이 붕괴하면서 흥선대원군도 그 입지를 상실하였다. 결국 1898년 2월 세상을 떠났고, 장지는 그가 생전에 정해두었던 공덕리로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