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환은 1861년 서울 전동(지금의 견지동)에서 출생하였다. 숙종 계비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여양부원군 민유중(閔維重)은 그의 7대조가 되고 흥선대원군의 막내처남 민겸호(閔謙鎬)가 그의 친아버지였다. 따라서 민영환은 고종황제와 내외종간이었다. 그런데 민겸호는 민치구(閔致久)의 아들로 민태호(閔台鎬) ․ 민승호(閔升鎬)와 형제간이며 민승호는 명성황후 민씨의 부친인 민치록(閔致祿)의 양자였다. 결국 민영환은 명성황후 민씨의 친정 조카, 민씨는 그의 고모가 되는 셈이다.
그는 1877년 동몽교관이 되었으며, 17세의 나이로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홍문관정자 ․ 검열 ․ 설서 ․ 수찬 ․ 검상 ․ 사인 등을 역임하고 1881년에는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동부승지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민영환은 큰아버지 민태호에게 입양되었으나 생부는 1882년 임오군란 당시 군인들에게 피살되었고, 양부는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에게 살해되었다. 생부는 개화정책을 추진하다가 이에 반대하는 하층민들에게 피살되었고, 양부는 수구대신이라고 개화당에게 살해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친부와 양부의 타살은 역사에서는 합목적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민영환 개인에게는 큰 충격이자 불행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생부를 잃은 그는 관직을 사직하고 3년 상을 치렀고 1884년 이후 이조참의가 되었다. 연이어 도승지 ‧ 전환국총판 ․ 홍문관부제학 ․ 이조참판 ․ 내무협판 ․ 개성유수 ․ 해방총관 ․ 친군연해방어사 ․ 한성우윤 ․ 기기국총판 ․ 친군전영사를 역임하였다. 1886년 민영익(閔泳翊) 실각 이후 민영환은 민씨 집권층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문과출신임에도 군제개혁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1886년 7월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을 창설하여 근대적 해군양성에 주력하였다.
1887년 친군전영사 ․ 상리국총판 ․ 예조판서, 1888년과 1890년 두 차례에 걸쳐 병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군사권을 장악한 바 있던 그는 1893년 형조판서 ․ 한성부윤, 1894년 독판내무부사 ․ 형조판서, 1895년 8월 주미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달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감행했고 그의 미국행도 불발로 돌아갔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친미 ․ 친러 내각이 들어서자, 그해 4월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였다. 특별히 민영환이 임명된 이유는 정동구락부 일원으로 구미 공사관 사람들과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고 정부 내에서 영향력이 있으면서도 비교적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최초의 세계 일주였다. 전통시대에 외국으로 갈 수 있던 사람들은 극히 일부였다. 그 대상도 중국과 일본 정도였다. 그러나 근대로 접어들면서 서양 각국과 근대적 조약이 체결되면서 또한 근대 문물을 배우기 위해 보빙사 ․ 수신사 등의 외교사절단이 파견되었고, 서양에 한국이 알려지면서 서양의 외교관과 선교사를 필두로 다양한 사람들이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민영환은 러시아의 근대식 군사제도와 신식 무기 등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두 차례의 병조판서를 지낸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기행문인 『해천추범(海天秋帆)』에는 러시아의 징병제, 병역의무 등 양병(養兵) 방식과 러시아의 군함과 해군에 관한 소개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사신 일행은 다양한 서구문화를 경험하고 시베리아를 거쳐 그해 10월 21일 귀국했고 러시아와 외교교섭을 통해 군사교관 및 재정고문 파견의 성과를 얻었다.
그는 러시아 방문 이후 다시 군부대신에 임명되어 근대적 군대양성에 주력하여 ‘조선 육군을 세계에 못하지 않게 만들기를’ 기대하였다. 군인들에게 국문교육도 실시했고 「독립신문」에서도 이를 환영하였다. 그 후 민영환은 다시 한 번 유럽을 여행할 기회를 얻었다. 2차 사행이었다. 1897년 3월 1일 민영환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년 축하식 참석차 유럽에 갔다. 6월 5일 런던에 도착한 그는 빅토리아 여왕을 만나 국서와 국왕의 친서를 전달했고, 6월 22일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런던에서는 40여 일간 체류하면서 영국의 국민생활과 선진 문물을 견학하였다. 이를 기록한 것이 『사구속초(使歐續草)』다. 그러나 제2차 사행에서는 별다른 외교적 성과는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미 방문은 민영환의 인식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종래의 민판서가 아니라 새 사람이 되었다”는 「독립신문」 건양 원년 11월 24일자의 지적은 이 점을 적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그의 경험의 많은 부분은 근대국가 수립을 당면과제로 하고 있던 한말 현실 정치무대에 적극 반영되었다.
민영환은 이미 1894년 무렵 『천일책(千一策)』에서 시국해결 방안을 제안하였다. 그중 「시세사조(時勢四條)」에서는 러시아와 일본에 대한 방어책과 ‘동학란’ 평정 방법을, 「비어십책(備禦十策)」에서는 인재등용과 과거제 폐지, 육해군 창설, 산업장려, 신식무기 구입과 제조, 포대설치, 인삼전매, 지폐발행, 근대적 학교설립 등 내수(內修)와 자강(自强)의 방책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민영환은 당시 일반인들에게 비난받는 존재였다. 그것은 왕실의 핵심외척이라는 가문의 배경과 이를 등에 업은 급격한 출세뿐 아니라 백성들에 대한 그의 인식태도 등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대다수 관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국가(왕실)’는 있었지만 ‘민(民)’은 없었다. 그것은 1894년 농민전쟁 지도자 전봉준이 토로하듯이 ‘나라를 들어먹고 백성을 학대하는 자’로 세간에 회자되고 있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던 그가 조선이라는 한 나라를 벗어나 세계를 경험하고 나서 ‘종래의 민판서’에서 환골탈태하여 ‘새 사람’이 된 것은 자명하다.
독립협회 핵심 인사이자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를 저술한 정교(鄭喬)는 정부 요인 가운데 인민들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민영환과 한규설(韓圭卨)뿐이라고 말하면서 그를 군부대신과 경무사에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민영환은 군부대신 겸 내무대신에 임명되어 군사권과 경찰권을 장악하고 독립협회 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황제와 보수파는 공화정을 수립하고 군주제를 폐지하려 한다는 모략으로 독립협회를 탄압하여 해산시켰고, 민영환도 일시 파면되었다가 다시 참정대신 ․ 탁지부 대신에 임명되었다.
두 차례의 외유 후 민영환은 서구의 근대식 제도를 모방하여 정치 ․ 군사 제도 등을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특히 군제를 개편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자고 황제에게 상주했는데 이는 국정에 채택되어 1899년 6월 육군을 통솔하는 황제 직속의 최고 군령기구로서 원수부를 설치하게 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원수부의 회계국총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1900년 독일인 에케르트를 초빙하여 군악대 창설과 국가(國歌) 제정을 주도하고, 1902년 표훈원총재 시절 장충단(獎忠壇) 표석을 세웠고, 해외이민 담당기관인 유민원(綬民院)을 설립하여 총재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을 감행했고 2월 23일 “대한제국 내에서 군사적으로 필요한 긴급조치와 군사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였다. 8월 22일,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재정고문과 외교고문 각 1명을 두고, 재정과 외교에 관한 사항은 일체 그들의 의견을 물어 시행”하도록 하는 제1차 한일협약으로 외교권과 재정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1905년 7월 29일 미국과의 가츠라-태프트밀약, 8월 12일 영국과의 제2차 영일동맹, 9월 5일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인 포츠머스조약을 통해 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공인받았다. 그 결과 민영환은 일제 및 친일 각료들의 배척을 받아 시종무관장으로 좌천되었다. 이 무렵 민영환과 한규설은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장기 투옥 후 석방된 이승만(李承晩)을 미국에 파견하여 대한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로 결정하고 그를 미국에 파견한 상태였다.
일본은 급기야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통감을 두고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張志淵)의 「시일야방성대곡(時日也放聲大哭)」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저항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조약이 체결되던 때 민영환은 전 부인의 산소 이장 문제로 경기도 용인에 내려가 있다가 소식을 들었다. 곧 서울로 올라와 매국 대신들을 성토하고 조약 파기를 위해 11월 27일 원임 의정대신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백관을 거느리고 조약에 서명한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등 매국5적의 처단과 조약 파기를 상소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와 위협으로 황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에 민영환과 조병세는 재차 상소를 올리고 경운궁 대안문 밖에 엎드려 회답을 기다렸지만 일제는 헌병을 동원해 이들을 잡아 가두었다.
11월 29일, 평리원 감옥에서 석방된 민영환은 대세를 바로잡을 길이 없음을 개탄하면서 남은 길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11월 30일 2천만 동포와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 2통을 남기고 회나무골 청지기 이완식의 집에서 단도로 목을 찔러 45세의 나이로 자결하였다. 그 소식과 유서 내용은 일제히 각 신문에 상세하게 보도되어 온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연이어 전 좌의정 조병세, 전 대사헌 송병선(宋秉璿), 전 참판 홍만식(洪萬植), 학부 주사 이상철, 군인 김봉학 등도 순절하였다. 민영환의 자결은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혈죽(血竹)’은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鄭夢周)와 선죽교의 일화에 비유되기도 하였다.
고종황제는 그를 “의지와 기개가 전일하고 단정하며 왕실의 근친으로서 곁에 가까이 있으면서 보좌한 것이 많았고 공적도 컸고, 짐이 일찍이 곁에 두고 의지하며 도움 받던 사람”이라 평가했고, 12월 17일의 그의 발인 시 대안문(大安門)에 직접 마중까지 나갔다. 이때 각국 공사들도 조문하였다. 민영환에게는 시호를 충정(忠正)으로 내리고 의정대신으로 추증하였다.
식민지화라는 국가존망의 위기 속에서 대한제국 국정을 주관하던 고위인사들에게 망국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 민영환 역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19세기가 끝날 무렵 두 차례의 국제경험은 그의 눈을 띄워주었다. 그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정한 역할을 할 수는 있었지만 적극적인 입장에서 시국을 개혁하려는 마인드는 가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환경에서 비슷한 입장에 있던 인사 대부분이 입신영달과 자기변신에 급급했던 것과는 달리 민영환은 양심을 잃지 않고 자결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