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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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사업]한국학 국영문 사전 편찬사업
한국외교사전(근대편)
서지사항
분야정치‧법제
유형제도
시대근대
집필자조재곤

본문

국외 독립군 기지 개척운동은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한 개화자강파의 무장투쟁을 위한 무력양성운동으로서 신민회가 주체가 되어 추진한 운동이었다. 신민회는 국권의 회복과 공화정체의 국민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아 국내에서는 문화적 경제적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고, 국외에서는 독립군 기지의 건설에 의한 군사적 실력양성을 꾀하다가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해체되었다.
신민회에서는 만주에서 양성한 독립군으로 전쟁을 일으켜 국내에 진입해 들어가고, 국내에서는 애국계몽운동가들이 그동안 실력을 양성한 각계각층의 국민과 단체를 통일 연합하는 형식으로 내외에서 호응하여 일본제국주의 세력을 물리치고 국권을 회복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1910년 가을에는 이동녕(李東寧), 주진수(朱鎭洙) 등이 만주일대를 답사하여 후보지를 선정하고, 그해 12월부터 비밀리에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한 단체이주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감지하고 식민통치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1911년 1월 ‘안악사건’과 ‘양기탁 등 보안법위반사건’을 명분으로 신민회 중앙본부와 황해도 지회 회원 16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일제 당국은 가혹한 고문을 통한 허위자백으로 7월 안악사건 관련자 중 안명근(安明根)에게는 무기징역을, 다른 인사들과 보안법 위반자들에게는 각기 중징역형을 선고하였다. 9월에는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암살미수사건을 날조하여 전국의 애국계몽운동가를 대대적으로 체포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1심 공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105명이어서 일명 ‘105인사건’으로 불렸다.
일제는 평안도의 평양, 정주, 선천, 납청정, 곽산, 철산, 신의주, 용천과 황해도 신천 등에서 기독교 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총독을 암살하려 한다고 조작하였다. 조작된 그들의 자료에 따르면 중앙 신민회의 지도 아래 여섯 차례에 걸쳐 총독암살 계획이 진행되었고, 이에 필요한 자금과 무기를 마련하는 등 준비 작업을 한 후, 1910년 11월 27일부터 12월 2일 사이 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경의선 철도로 데라우치 총독이 오게 되자 그를 암살하려고 총을 준비하고 각 지역의 역으로 갔다는 것이다. 경성복심법원 판결문에서 일제는 사건의 개요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명치 43년 8월 29일에 이르러 제국[일본]이 구한국을 병합시키자 피고 윤치호, 양기탁, 임치정, 이인환(이승훈), 안태국, 옥관빈 등은 분개를 참지 못하다가 동년 9월(일자 미상) 경성 서대문 밖에 있는 피고 임치정의 집 건넌방에 모여 국가가 금일의 상태를 당하여 한 사람도 불평 불만하는 자가 없다는 것은 조선인민 전체가 병합에 열복하는 것이 되어 외국의 동정도 받을 수 없으니 이로써 인민을 선동하여 병합에 복종치 않음을 표명할 필요가 있다. 근일 중에 데라우치(寺內) 총독이 평안북도를 순시한다는 풍설이 있으니, 이 기회에 사내총독을 암살하여 병합반대의 기염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평안남북도의 사람이 아니면 실행하기 곤란하므로 옥관빈을 평양과 서북지방의 각 군에 파견하여 뜻을 같이하는 자를 모집하여 실행할 것을 모의 결정하였지만 데라우치 총독 서순(西巡)의 일은 단순히 풍설에 그침으로써 이 일을 실행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던 것이다.”([京城覆審法院判決文], [寺內朝鮮總督謀殺未遂被告事件]{百五人事件資料集} 제1권, 1986, 高麗書林, 75-78쪽)
일제는 1911년 1월 소위 ‘보안법위반사건’ 혐의로 신민회 주요 인사들을 체포 구금하였고, 다시 그해 9월 초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을 날조하여 양기탁(梁起鐸) 등 애국지사 105인을 체포하였다.
1911년 9월부터 윤치호(尹致昊), 이승훈(李承薰), 양기탁(梁起鐸), 유동렬(柳東說), 안태국(安泰國)을 비롯하여 전국에 걸쳐 600여 명을 검거하였고, 이들에게 고문 등을 통해 허위자백을 강요하였다. 피의자 신문과정에서 김근형(金根瀅), 정희순 등은 잔인한 고문으로 사망하였고, 많은 사람들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일제 측이 허위로 작성한 신문조서를 시인하게 되었다. 결국 1912년 6월 28일 경성지방법원의 1심 공판부터 1913년 10월 9일 고등법원의 결심공판까지 5차례에 걸친 재판을 진행하여 각기 5년에서 10년의 유죄판결을 내렸다. 제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105인은 모두 고등법원에 항소하여 주모자로 지목된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임치정, 옥관빈(玉觀彬) 6명을 제외한 나머지 99명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일제 당국은 1913년 7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윤치호 등에게 5∼6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이들도 특별사면으로 1915년 2월 12일 석방되었다. 이들 중 양기탁은 1916년 중국으로 탈출하여 만주와 천진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 후 연금생활을 하였다.
이 사건에 연루되었던 많은 애국지사들은 이후 해외로 망명하여 항일독립투쟁에 적극 가담하게 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만주 등지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무관학교에서는 현대식 군사교육을 받은 유능한 장교들이 양성되어 이들을 중심으로 독립군이 조직되었으며, 의병들도 다시 훈련되어 독립군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1919년 3.1운동 이후 항일무장투쟁의 원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