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중립화 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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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사업]한국학 국영문 사전 편찬사업
한국외교사전(근대편)
서지사항
분야정치‧법제
유형제도
시대근대
집필자현광호

본문

대한제국 시기에는 러시아의 동북아정책과 관련하여 제국주의 열강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동북아정세는 대한제국정부로 하여금 중립화-영세중립국 지위 획득-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중립화는 이미 1880년부터 정부차원에서 검토한 바 있었고, 대한제국이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추진한 외교방안이었다.
대한제국의 최고 주권자인 고종은 대한제국의 외교를 주관하였다. 고종은 외국어에 능통한 측근을 통해 직접 외국사절과 접촉하는 한편 정세의 변동에 대응하면서 외국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고종은 외압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중립화를 염원해 왔다. 고종은 이를 위해 역대 주한미국공사들에게 빈번히 미국정부가 열강에 대해 대한제국의 중립화를 제의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고종은 1899년 10월 경에는 중립정책의 자문을 구하려는 목적으로 주한미국공사관 서기관 샌즈(William F. Sands)를 궁내부고문으로 고빙하였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대한제국문제에 대해 철저히 불개입원칙을 고수하였다.
이와 같은 미국의 대한정책은 의화단사건 당시 극명하게 드러났다. 즉 고종은 의화단사건으로 청이 분할위기에 놓이자 1900년 8월 조병식(趙秉式)을 특명전권공사로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정부에 대해 대한제국을 스위스 ․ 벨기에와 같이 중립화하는 데 동의해 줄 것을 요청한 바 있었다. 이 때 조병식은 일본정부가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자 곧 바로 주일미국공사에게 미국정부가 열강과 협력해서 대한제국의 독립과 중립에 대한 국제적인 보장을 확보하는 데에 노력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고종은 유럽열강과의 관계 강화를 통해 중립화를 보장받으려는 목적으로 거액의 내탕금을 지출하여 유럽에 특명전권공사를 파견하였다. 종래 대한제국에서 구미각국에 공사를 파견했으나 대부분은 부임하지 않아 대외교섭에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다. 고종은 이상과 같은 한계를 인식했음인지 유럽의 주요 열강과의 직접 외교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그 중재 역할을 한 국가는 프랑스였다. 프랑스가 적극적인 대한정책을 전개한 것은 극동에서의 현상유지를 기대했기 때문이었고, 대한제국정부의 중립정책은 이와 같은 프랑스의 극동정책에 부합하였다.
고종은 1901년 3월 종래 러시아 ․ 프랑스 ․ 오스트리아공사를 겸직하고 있던 이범진(李範晉)을 러시아공사로 임명하여 러시아와의 외교에 전념하게 하고, 민영찬(閔泳讚)을 주프랑스공사로 파견하였다. 또 영국 ․ 독일 ․ 이태리 특명전권공사를 겸직했던 민철훈(閔哲勳)을독일과 오스트리아공사로 임명하고, 민영돈(閔泳敦)을 영국과 이태리 특명전권공사로 임명하였다. 그 결과 대한제국은 러시아 ․ 프랑스 ․ 독일 ․ 영국 등에 상주공사관을 두게 되었고, 미국 일변도의 외교정책을 탈피하게 되었다. 고종이 유럽에 특명전권공사를 파견한 것은 유럽 국가들로 하여금 대한제국에 파견한 외교관의 지위를 변리공사 ․ 대리공사에서 전권공사로 승격시키도록 유도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승격된 유럽의 전권공사들로 하여금 러시아 ․ 일본공사의 강경한 대한정책을 조정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고종이 미국정부가 주한공사를 전권공사로 승격시킨 데 대해 크게 만족을 표명한 것은 자신의 의도가 결실을 거두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종은 유럽에 파견한 특명전권공사들로 하여금 중립화 방안 등을 해당 국가와 협의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새로 임명된 특명전권공사는 대체로 민씨척족이었다. 민씨척족 중 일부가 중립화안에 관여했음을 고려할 때 특명전권공사의 주된 임무가 중립화 타진에 있었음은 명확하다. 고종은 이후에도 주요 열강의 주권자에게 훈장을 보내거나 국서를 발송하는 방식으로 열강의 대한제국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내려고 하였다.
대한제국은 의화단사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중립화를 추진하였다. 고종은 1901년 중반 러시아와 일본이 각각 만주와 한반도를 지배한다는 만한교환설(滿韓交換說)이 유포되자 중립화에 더욱 열의를 보였고, 대한제국에 주재하고 있는 벨기에 ․ 프랑스 ․ 독일공사관 측과 긴밀한 외교적 관계를 맺으려고 하였다. 고종은 한반도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러 ․ 일보다 다른 열강에 접근하여 중립화를 타진하였다. 즉 러 ․ 일 이외의 제3국가들에 의해 중립화에 관한 보장을 받은 뒤 러 ․ 일에 이를 제의하려 한 것이다. 고종은 1902년의 영일동맹과 이에 대항한 노불선언(露佛宣言)이 발표되자 두 동맹들로 인해 중립화의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인식하였다. 이에 고종은 중립화 실현에 강한 의지를 보였으며 러시아, 프랑스, 영국, 일본 등 동맹당사국들을 중립화추진의 주요 대상국으로 중시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은 열강과의 외교에 치중하는 한편 국제법이나 국제기구를 통한 중립화를 추진하였다. 대한제국은 만국평화회의 ․ 적십자회의 등 국제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 하였다. 대한제국은 만국평화회의가 국제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각국 대표들이 조약을 체결하여 만든 기구로서, 분쟁이 발생할 경우 참여국들이 거중조정한다고 인식하였으므로 이에 큰 관심을 가졌다. 한편 대한제국이 만국평화회의와 함께 관심을 기울인 것은 적십자회의였다. 적십자회의는 1864년 스위스에서 채택된 제네바조약을 기초로 전시부상자 보호를 표방하였다. 또 적십자사의 활동지역은 중립지역으로 공인받았다. 대한제국정부가 1901년 스위스정부로부터 제네바협정안을 입수한 것은 전쟁이 발발할 경우 적십자를 이용하여 대한제국을 중립지역으로 인정받게 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한편 고종은 벨기에와의 수교를 적극 추진하였다. 이는 벨기에의 중립정책을 파악하려는 의도 외에 벨기에에 소재하고 있는 각종 국제기구 사무국을 통해 국제사회에 진출하려는 의지가 깔려 있었다. 고종은 벨기에와의 통상조약이 비준되기도 전인 1900년 5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으로 하여금 벨기에 전권대신에게 헤이그평화회의에참석할수있게협조를의뢰하게하였다.뱅카르(Léon Vincart) 벨기에 총영사는 이를 수용하여 본국정부로부터 만국평화회의에 관한 모든 문서를 교부받아 대한제국정부에 전달한 뒤 계속 협의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후 고종은벨기에인아데마델크와느(Adhémar Delcoigne)를 내부고문에 고빙하여 중립정책을 담당하게 하였다.
대한제국은 열강의 보장에 의한 중립화가 실현되지 않자 더욱 국제기구에 기대를 가졌다. 고종은 1902년 초 민영찬을 주프랑스공사 및 주벨기에공사로 임명한 뒤 네덜란드 소재 만국평화회의 사무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도록 지시하였다. 이는 국제기구를 통해 중립화를 실현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후 고종은 민영찬을 만국평화회의 총재에게 보내 적십자회 가입과 만국평화회의에의 사절단 파견 등을 타진하였다. 1902년 12월에는 스위스대통령에게 적십자회 가입에 대한 국서를 봉정하고 1903년 1월 가입 허가를 받았다. 이후 고종은 7월 민영찬을 적십자회의 위원으로 임명하고 9월 개최되는 제네바회의에 참석할 것을 지시하였다.
중립정책을 주도한 세력은 친미계열과 이용익계열이었다. 먼저 친미계열은 샌즈를 중심으로 민영환, 민상호(閔商鎬), 강석호(姜錫鎬), 이학균(李學均)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미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 했지만 차관도입에 실패하여 타격을 받았으며, 중립화안의 좌절로 더욱 입지가 약화되었다. 샌즈의 중립화안은 프랑스공사만이 지지했을 뿐 러시아공사, 일본공사의 강력한 반대를 받았다. 친미파는 이용익이 실권을 장악하는 가운데 정계에서 소외되기 시작하였고, 중립정책의 주도권도 상실하였다. 다음으로 내장원경이자 탁지부대신서리인 이용익은 고종의 절대적인 신임으로 내정은 물론 외교분야에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용익은 만주문제로 러 ․ 일의 대립이 첨예화되자 러 ․ 일 사이에서 중립을 견지하였다. 그는 강석호 ․ 이학균 ․ 현상건(玄相健) ․ 이인영(李麟榮)등과 연합하는 한편 자신이 중립정책을 진두지휘하였다. 중립화 주도세력은 전쟁이 발발할 경우를 대비하여 적십자를 창설하려 하였다. 즉 전쟁이 발발할 경우 적십자기를 설치하면 교전국의 군대에 의해 국토가 유린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에 따라 이들은 벨기에고문, 외국어학교 교사 등과 함께 궁중에 적십자사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고종의 승인을 받았다.다음으로이들은벨기에고문 ․ 영국 ․ 미국 ․ 프랑스 ․ 독일어학교등외국어교사들과연합하여국외중립선언을준비한끝에 1904년 1월 21일 프랑스공사관의 협조를 얻어 국외중립을 선언하였다. 이들은 중립선언이 성공적으로 발표되자 고무되었다. 즉 러 ․ 일전쟁은 러 ․ 일간의 문제이므로 대한제국은 전쟁에서 무사할 것이라고 예측했고, 중립선언으로 대한제국이 전쟁의 위험에서 탈피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고종 역시 중립 선언에 대해 영국 ․ 프랑스 ․ 독일 등이 접수를 통보하자 독립불가침을 승인받은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처럼 집권 세력은 중립이 열강들에 의해 인정되었으므로 전쟁이 발생해도 두려울 것이 없다고 낙관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만이 대한제국의 중립화를 긍정적으로 검토했을 뿐 일 ․ 미 등 중립화실현에 핵심적인 국가들은 중립선언에 무관심하거나 거부하는 입장을 보였다. 사실상 대한제국의 중립선언을 지지한 열강은 거의 없었으며,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전쟁 계획을 지지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국제정세의 흐름과 열강의 동향을 정확하게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던 셈이다. 특히 중립정책 주도세력은 국제법에 근거한 국외중립선언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고, 나아가 열강이 중립선언을 받아들여 국권 수호가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대한제국은 국제법 ․ 국제회의 ․ 국제기구에 큰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만국평화회의 ․ 국제법 등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침략성을 은폐하기 위해 만든 것이거나 제국주의 국가의 활동을 제약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대한제국이 이들에 대해 큰 기대를 했다는 사실은 자위력을 확보하는 등의 내실 있는 중립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대한제국은 전제군주제 유지에 적합한 용병제를 고수하여 국방력에 심각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 무렵 군제개혁의 세계적 추세는 국민군적 성격을 지닌 징병제의 채택이었다. 국권 상실의 위기에 처한 대한제국으로서는 국왕 및 지배층의 정치적 양보를 통한 정치체제의 변혁으로 국민통합을 추진하여야 했다. 그러나 집권층은 체제변혁을 우려하여 국민군 창설을 적극적으로 검토하지 않았다. 따라서 러 ․ 일전쟁이 발발할 경우 국외중립의 의무는 용병제군대가 담당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용병은 러 ․ 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의 경성 침략을 수수방관하며 그 한계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