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 점령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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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사업]한국학 국영문 사전 편찬사업
한국외교사전(근대편)
서지사항
분야정치‧법제
유형제도
시대근대
집필자한승훈

본문

서구 열강은 거문도를 해밀턴 항(Port Hamilton)이라 명명했다. 이는 1845년 이 섬을 발견한 영국인 벨처(E. Belcher)가 당시 영국 해군성 부상 해밀턴의 이름을 거문도에 붙였던 데서 유래한다. 서구 열강은 19세기 중반부터 거문도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866년 12월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 벨(H. H. Bell)은 해군성 장관 웰스(G. Welles)에게 거문도 점령을 건의했다. 벨의 명령을 받은 슈펠트(R. W. Shufeldt)는 거문도를 지중해의 지브롤터에 비유하면서 해군 요충지로 적격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거문도는 점차 동아시아 해군요충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거문도 점령을 구체적으로 계획한 국가는 영국이었다. 일본 주재 영국공사 파크스(Harry S. Parkes)는 조일 양국의 갈등이 무력충돌로 확대될 조짐이 보이자, 1875년 7월과 12월에 외무성에 거문도 점령을 주장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이유는 일본이 러시아와 함께 조선을 점령할 것이라는 정보에 따른 것이었다. 영국의 중국함대 사령관 라이더(A. P. Ryder) 제독도 거문도가 전시에 상해(上海)의 해군창이나 요코하마(橫濱)의 저탄소를 대신해서 해군 요충지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조선 점령시도가 사실이 아님을 확인한 외무성은 파크스의 제안을 승인하지 않았다.
중국함대 사령관 윌리스(G. O. Willes)는 1882년 6월에 영국 전권공사로 조선과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에 임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조선 측에 거문도를 영국 군함 정박지로 지정하는 내용을 조약에 삽입할 것을 주장했지만, 조선 측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영국이 거문도 점령을 구체적으로 검토한 시점은 1885년 2월이었다. 1884년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에 인접한 투르키스탄을 합병했다. 러시아의 남하에 위협을 느낀 영국은 러시아와 국경문제를 매듭짓기 위해서 1885년 1월 헤라트 인근에서 국경문제위원회 회의를 개최했지만 러시아 위원이 불참했다. 뒤이어 3월 30일 러시아 군대가 펜제(Penjdeh 또는 Panjdeh)에서 영국군의 훈련을 받은 아프가니스탄 군대를 전멸시킨 사건이 발생했다. 중앙아시아에서 영 ‧ 러 대립이 최고조에 이르는 가운데, 영국은 러시아 극동 함대의 배후지인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조선의 거문도를 지목했다. 그리고 거문도를 점령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이미 1885년 2월 외무성 사서 허츨렛(E. Hertslet)이 거문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각서를 작성한 상태였다. 외무성은 2월 14일 허츨렛의 각서를 해군성에 송부함과 동시에 거문도 점령에 대한 해군성의 견해를 물었다. 해군성은 4월 4일 외무성에 보내는 보고서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목적과 장래 조선에서 영국의 경제적 이익을 고려해서 거문도 점령에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제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돌입했다. 4월 10일에 수상관저에서 거문도 점령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4월 11일 의회에서 거문도 점령을 결정했다. 4월 14일 영국해군성은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주둔하고 있는 중국해 사령관 도웰(W.Dowell)에게 거문도를 점령할 것을 명령했다. 도웰은 4월 15일에 해군성에 “아가멤던 호(Agamemnon), 페가수스 호(Pegasus), 그리고 파이어브랜드 호(Firebrand)가 거문도(Port Hamilton)항구를 점령하기 위해서 즉시 그 곳으로 떠났다. 러시아 군함이 그 곳에 오지 않는 한 국기를 게양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전신을 발송했다. 드디어 영국 군함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군함 3척에 617명의 승무원을 이끌고 거문도를 점령했다. 거문도에 주둔한 영국군은 상해와 거문도를 연결하는 해저전신을 설치했다. 1885년 11월 장기 주둔을 위한 영구막사를 준공했으며, 러시아 함대의 진입을 막기 위해서 목책과 육상 포대를 구축했다.
사실 영국 군함이 거문도를 점령할 것이라는 소문은 이미 홍콩(香港), 상해, 요코하마, 나가사키 등지에서 퍼진 상황이었다. 4월 4일자 더 타임즈(The Times)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사건(British Annexion : Port Hamilton)을 기사화하기도 했다. 영국 주재 청국공사 증기택(曾紀澤)은 4월 8일 중국 공사관의 참사관 매카트니를 영국 외무성에 보내어서 그 진위를 확인하고자 했지만, 영국 외무성은 공식적으로 실제 점령이 이루어지기까지 부인했다.
4월 15일 영국해군이 거문도를 점령한 사실이 전신으로 보고되자, 다음날인 4월 16일 외무성은 거문도 점령 사실을 청국 정부에 통보했다. 그리고 외무상 그랜빌(G. L. G. Granville)은 4월 27일 청국이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합의서를 제안함으로써, 청국의 협조를 요청했다.
청국 총서와 이홍장(李鴻章)은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반대하지 않았다. 이를 기회로 영국으로부터 조선에서 청국의 종주권을 인정받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5월 1일 청국은 돌연 합의문 서명에 반대했다. 러시아와 일본이 영국의 뒤를 이어서 조선의 또 다른 섬을 점령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영국과 청국 사이에 진행된 협상은 커다란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
일본은 영국의 거문도 점령으로 일본 근해가 영 ‧ 러 전쟁의 장이 될 수 있으며, 러시아가 거문도와 가까운 일본 소유의 섬을 점령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일본 주재 영국공사 플런켓(Plunkett)은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에게 영국의 거문도 점령 자체가 일본이 우려하는 상황에 대비한 예방조치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노우에 가오루는 영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청국을 통해서는 거문도에 주둔한 영국군대가 철수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일본의 이중적 정책을 두고 영국 외무성과 청국주재 영국 공사 오코너(O'Conor)는 일본이 청국과 조선이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반대하는데 충동질을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청국과 일본은 러시아의 존재 때문에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찬성할 수 없었다. 실제 청국 주재 러시아 공사 포포프(S. I. Popov)는 5월 18일 청국이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허용할 경우 러시아도 조선의 다른 항구를 점령하겠다고 공언했다. 동시에 러시아 정부는 일본주재 러시아 공사관의 슈페이에르(A. N. Shpeier)참사관을 서울로 파견했다. 슈페이에르의 파견 목적은 조선이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반대하도록 압박을 가하기 위함이었다.
슈페이에르는 6월 10일 조선 주재 미국공사 포크(G. C. Foulk)와 대담에서 영국이 거문도 점령을 계속한다면 러시아는 이보다 10배에 달하는 조선 영토를 획득하라는 훈령을 받았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슈페이에르는 김윤식(金允植)으로부터 조선정부가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반대한다는 대답을 획득했다. 하지만 조선정부로부터 러시아 교관 파견 요청을 이끌어 내는 데는 실패했다. 이후 러시아는 청국과의 우호 관계 속에서 거문도에서 영국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은 조선을 둘러싼 청, 일본, 그리고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얽힌 국제문제로 확대되었다. 그런데 정작 조선은 영국의 거문도 점령 사실을 5월 7일에서야 인지하게 되었다. 5월 16일 거문도에 도착한 엄세영(嚴世永)과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öllendorf, 穆麟德)는 거문도에 주둔해 있는 영국 해군 대령 맥클리어에게 거문도 점령의 불법성을 지적했다. 이어서 그들은 5월 18일 나가사키를 방문, 도웰에게 거문도 점령을 강경하게 항의했다.
조선정부는 5월 20일 오코너와 대리총영사 칼스(W. R. Carles)에게 거문도 점령을 항의하는 문서를 전달했을 뿐만 아니라, 청국 총판, 미국 ․ 독일 ․ 일본 외교관들에게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비난하는 조회문을 송부했다. 청국 총판, 일본 외교관, 독일 외교관은 개인적인 입장이라는 전제 아래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하지만 미국 대리공사 포크는 영국이 거문도를 영구히 점령할 의도가 없다면서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우호적으로 평가했다.
오코너는 5월 29일 이홍장을 통해서 조선이 더 이상 항의하지 않게 한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이는 조선의 항의를 사실상 무시하고 청국만을 협상 파트너로 인정한 처사라 할 수 있다. 조선 주재 영국 총영사 애스톤(W. G. Aston), 부영사 칼스 역시 조선과 교섭 자체를 회피했다. 그러자 조선정부는 6월 27일 청국, 미국, 일본, 독일정부에 영국의 거문도 점령 사건을 중재해 줄 것을 요청하는 조회문을 송부했다.
애스톤은 김윤식에게 도쿄에서 조선과 러시아의 비밀 회동을 언급하면서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정당화하고 러시아의 침략을 경고했다. 아울러 그는 조선이 각국에 공문을 보내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한편 오코너는 청국에 조선정부의 항의를 종주권을 무시한 처사라며, 청국이 조선의 항의를 방치하면 비우호적인 행동으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했다.
그 대신 영국은 거문도를 임대하기 위한 교섭을 추진했다. 조선정부의 열악한 재정상황을 알고 있던 애스톤은 조선정부가 이화양행에게 변제해야 할 금액을 상환할 것을 주장하면서 조선정부를 압박했다. 이에 9월 25일 김윤식은 50만 달러 차관을 담보로 거문도를 매매하는데 아무런 반대를 표명하지 않음으로써, 거문도 매매가 현실로 다가왔다.
그런데 1885년 9월 아프가니스탄을 사이에 두고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진행되었던 극한 대립양상이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할 명분이 사라진 것이다. 이홍장은 10월 13일 오코너에게 러시아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점을 내세우며 영국이 거문도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 외무성은 12월 12일 오코너에게 거문도에서 철수할 방침을 오코너에게 전달했다. 그 대신 다른 국가가 그 섬을 점령하지 못하도록 청국으로부터 보장을 받아야 한다는 단서 조항을 청국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사실 영국 내부에서는 거문도 점령에 대한 회의적인 견해가 제기된 상태였다. 1885년 9월 중국해 사령관으로 부임한 해밀턴은 12월 7일 제출한 보고서에서 거문도는 방어에 난점이 노출되었음, 요새 구축 또한 용의하지 않음, 거문도에 군함을 배치할 경우 홍콩과 싱가포르의 방어에 문제가 있음, 영국 군함 자체의 신속성으로 거문도를 요새화할 필요가 없음, 블라디보스토크의 가치가 과대평가 됨, 거문도를 유지하는데 많은 비용이 든다는 이유 등을 지적하면서 거문도 철수를 주장했다. 해군성은 해밀턴의 견해가 전임자였던 도웰, 윌레스 모두가 동의한 사항이라고 밝히면서, 외무성이 거문도 철수 문제를 신속하게 결정할 것을 요청했다.
외무성은 1886년 6월 12일 거문도를 더 이상 점령할 필요가 없으니 해군성에서 이에 필요한 조치를 취해 줄 것을 바란다는 문서를 해군성에 전달했다. 그 대신 8월 12일 외무성은 청국에 영국이 거문도에서 철수할 경우, 러시아가 이 섬을 점령하지 못하도록 보장해 줄 것을 재차 요구했다.
그런데 청국과 러시아는 이미 1886년 7월에 훈춘조약을 통해서 양국 간 쟁점이었던 국경문제를 매듭지은 상태였다. 게다가 청국은 러시아 아무르 총독 바라노프(Baranov I. G.)와 청국 주재 러시아 대리공사 라디젠스키(Ladyjensky. N, 拉德仁)로부터 영국이 거문도에서 철수하더라도, 러시아는 조선의 영토를 점령할 뜻이 없다는 발언을 확보했다. 이홍장과 총서는 러시아와의 교섭 결과를 영국 측에 통보했다. 결국 월섬은 1886년 12월 24일에 영국이 거문도에서 철수할 것이라는 조회문을 총서에 전달했다. 12월 29일 이홍장은 원세개(遠世凱)에게 영국이 거문도에서 철수할 것이니, 조선정부가 거문도를 접수할 것을 통보하라고 지시했다.
영국은 1887년 2월 27일 거문도에서 철수를 완료함으로써, 1년 10개월 간 지속되었던 영국의 거문도 점령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하는 동안 묄렌도르프, 조선 주재 독일 부영사 부들러(Budeler, Hermann,卜德樂), 유길준(兪吉濬)에 의해서 조선 중립화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청의 종주권이 강화되는 가운데 중립화론은 실현되지 않았다.
한편 거문도에 주둔했던 영국군은 근대적인 의술을 바탕으로 거문도 주민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영국군은 거문도 주민의 마을과 집 내부를 방문할 수 있었으며, 거문도 주민 역시 영국 함정에 초대되기도 했으며 영국 담배, 과자와 차를 받기도 했다. 현재 거문도에는 당시 주둔 중에 사망한 영국 수병의 묘지 3구가 남아있어서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