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주역대전>편찬,표점,주해,번역,해제의 DB구축

전통사회에서 『주역』은 모든 경전의 근간이었다. 그동안 한국의 『주역』에 대한 연구자료는 그 방대함이나, 학문적 문화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연구토대가 미약하였다. 효과적으로 가공된 『한국주역대전』의 편찬과 편리한 DB 구축은 한국사상 연구의 주요 토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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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대전 : 해제_7. 송시열(宋時烈)의 『역설(易說)』

서지사항
서명주역대전
편명해제
제목7. 송시열(宋時烈)의 『역설(易說)』
자료문의성균관대학교 주역대전편찬팀(연구책임자 : 최영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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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저술이다.[주 13] 저자는 본관이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또는 우재(尤齋)이다.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에게 학문을 배웠다. 1633年에 『주역』의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에 대한 글로 생원시에 장원을 하였고, 2년 후에 봉림대군(후일의 효종)의 사부가 되었다.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낙향하였다가 효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벼슬에 나아갔다. 그 후로 여러 번 벼슬에서 물러나기도 하였고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 때에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를 당하였고, 6월에 서울로 압송되던 도중에 정읍에서 사사(賜死)되었다. 그러나 후에 무죄로 인정을 받아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1744년(영조20년)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저자는 주자의 학설을 계승하고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여 그의 학문을 정초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정치에 투신하였던 만큼, 학문적 체계를 세우는 일보다는 실천적 수양과 정치‧사회적 적용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수양론은 ‘곧음으로 기운을 기르는것[이직양기(以直養氣)]’으로 압축된다. 그는 스스로 직(直)의 실천을 일생의 지표로 삼았고, 제자들과 후손들에게도 이것을 매우 강조하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예로 다스리는 것(禮治)’을 강조하여 “예가 다스려지면 정치도 다스려지고, 예가 문란하게 되면 정치도 문란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런 결과로 이른바 「예송(禮訟)」에도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저자는 주자학의 연구에 평생 진력하여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을 저술하였고, 그 이외에도 많은 저술을 남겼다. 또 그의 문집은 현재 『송자대전(宋子大全)』으로 간행되어 있다. 그러나 『역설(易說)』은 『송자대전』에 실려 있지 않다.
주역을 연구하는데 있어 큰 흐름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상(象)과 수(數)를 중시하는 사수학파(象數學派)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 혹은 철학의 입장에서 경문(經文)을 해석하는 의리학파(義理學派)이다. 상수학파에는 점서역(占筮易)‧기상역(禨祥易)‧도서역(圖書易)이 있고 의리학파에는 도가역(道家易)‧유가역(儒家易)‧사사역(史事易)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주역을 연구하는데 있이 상(象)‧의(義)‧점(占)이 다 중요하다고 보아 정이천이 의리만 이야기하고 상수를 논하지 않은 것에 대해 반대하였다. 예를 들어 건괘의 초구를 설명할 때 『정전』의 관점으로 본다면 효가 반드시 그러한지, 사람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된다고 하였다.
서문은 제목이 『우암역설(尤庵易說)』이라고 되어 있는데 누가 쓴 것인지 명기되어 있지 않다. 다만 ‘송자(宋子)’라고 기록되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저자 자신이 쓴 것은 아닌 것 같다. 「역도(易圖)」에는 “상수는 하도에서 드러나 있고 의리는 낙서에 드러나 있다(象數見於圖, 義理見乎書)”고 기록하고 있다. 「하락설(河洛說)」에서는 하도(河圖)를 체(體), 낙서(洛書)를 용(用)으로 설명하고 있다. 「구륙설(九六說)」에서는 양을 9, 음을 6이라고 부르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저자에 의하면 1부터 5까지의 수에서 양수인 1‧3‧5를 합치면 9가 되고 음수인 2‧4를 합치면 6이 되므로, 양을 9, 음을 6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괘획설(卦畵說)」에서 저자는 논리적으로 괘의 수는 무한히 늘려갈 수 있으나, 육십사괘만 가지면 천지의 만사‧만물을 다 미루어 나갈 수 있으므로, 그 이상은 있더라도 논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있다. 「설괘취상(說卦取象)」에서는 괘의 상을 설명하고 있다. 「역경(易經)」에서는 각 괘의 효를 설명하고 있다. 「계사전(繫辭傳)」 이하에서는 지하(之下), 이하(以下)로 묶어서 설명하거나 각 장의 대지만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역설』은 주자의 설을 따르는 경우가 많지만,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경우도 많은데, 괘변설에 대한 입장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괘변설이란 한 괘가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설괘전」은 진(震), 손(巽), 감(坎), 리(離), 간(艮), 태(兌)의 육괘가 모두 건곤으로부터 나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한대의 이르러 우번(虞翻)은 각 괘가 건곤의 괘뿐만 아니라 다른 괘로부터도 올 수 있다는 설을 제기하였다. 주자도 이 설을 받아들여 「설괘전」을 따르는 정이천과는 달리 괘가 건곤이 아닌 다른 괘로부터 온다고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주자는 수괘(隨卦)가 서합괘, 미제괘로부터도 변화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비괘(賁卦)에 대해서도 그것이 손괘로부터 온 것도 있고, 기제괘로부터 온 것도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암은 어떤 괘가 어떤 괘로부터 왔다는 설은 우번으로부터 온 것인데, 그것이 매우 번거로워서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게 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설괘전」에 근거를 둔 정자의 설이 분명하고 적절하며 이해하기 쉽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우암은 주자의 설을 일방적으로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따르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판하면서 자신의 역학사상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암은 그의 『우암역설』에서 기본적으로 정이천보다는 주자의 견해를 따랐다. 그러나 주자의 괘변설을 따르지 않은데서 보여주듯이 주자의 견해를 묵수하는 것은 아니고, 자신이 우선 괘의 상을 파악한 다음 그것을 기준으로 이전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참고하여 취사선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과정에서 정이천의 『역전』이나 주자의 『본의』에 대해서도 따르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며, 그것들과 다른 자신의 견해를 내세우기도 한다.
이상 검토해본 바에 따르면 우암은 다른 경전과는 달리 『주역』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만큼은 어떤 사람의 견해도 그대로 추종하지 않고(그 사람이 비록 주자일지라도), 자기가 파악한 괘의 상을 기준으로 자유롭게 해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설』은 역 해석이 의리에 앞서 괘효사의 상에 대한 해명을 우선해야 한다는 상수역학적 해석 원칙을 천명한다. 그런데 『역설』의 상수적 역 해석 방법은 한대 상수역학 이론의 수용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명대의 상수역학자인 래지덕(來知德)의 역 이론을 수용하여 이를 적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역설』은 래지덕 역학의 핵심 역 이론인 착종설(錯綜說)은 물론 효변론(爻變論), 중효설(中爻說) 등을 적용하여 『주역』 괘효사를 주석하였다. 그러나 『역설』이 래지덕의 역설을 수용하였다고 하여 래지덕의 해석을 그대로 따른 것은 아니었으며, 래지덕의 역 이론을 수용하되 다시 자신의 해석 관점에 따라 독자적으로 해석하였다. 이는 주자의 역 해석을 수용하면서도 자신의 독자적 관점을 통해 검토‧비판하고 다른 해석을 내세웠던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역설』은 조선후기 상수역학 해석의 여러 흐름 가운데 래지덕의 역 해석을 수용하여 독자적인 상수역 해석을 이룬 사례로 그 의미가 크다. 래지덕 역학의 수용은 비슷한 시기 다른 학자들에게서도 나타났으나, 이를 가장 깊이 받아들인 것은 『역설』이었다. 상수를 통해 의리를 밝힌다는 역학적 입장을 따르면서도 래지덕의 역 해석을 참고하여 상수적 방법에 의해 『주역』 경문을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은 조선 상수역 해석의 한 특징을 보여주는 저술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임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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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 ]
13) 김영우는 “우암의 저작으로 알려져 온 이 저술은 송시열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난 18세기 중반에야 만들어진 저술이었다. 그러나 이 책이 우암과 전혀 관계없는 것은 아니며 적어도 우암의 역 해석 정신을 서문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관련성을 갖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김영우, 『우암역설』 연구, 『동양철학』40집, 2014). 한국주역대전편찬팀도 『역설』을 번역을 하고 세미나를 통해 검토를 하면서 우암의 사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주역절중』을 인용하고 있어서 『역설』 전체가 우암의 직접 저술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우암의 『역설』이 있고 그 책에 가필하여 현재 전해지고 있는 『역설』을 만들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므로, 더 진전된 연구가 있을 때까지는 우선 우암의 저술로 간주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