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밀사

홈 > 연구성과별 자료검색
[연구사업]한국학 국영문 사전 편찬사업
한국외교사전(근대편)
서지사항
분야정치‧법제
유형제도
시대근대
집필자김영수

본문

제2차 만국평화회의는 러시아 주도로 개최되었던 1899년 1차 만국평화회의와는 달리 미국의 루즈벨트(T. Roosevelt) 대통령이 1904년 10월 발의했지만, 결국 러시아정부에게 개최 권한을 양보하였다. 제2차 만국평화회의는 44개국 256명의 대표가 참석하여 군축문제 뿐만 아니라 국제분쟁을 무력이 아닌 중재재판이라는 법적장치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문제에 대한 국제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데 그 본연의 목적이 있었다. 이에 만국평화회의는 러일전쟁의 패전으로 군사력을 상실한 러시아에게 무력이 아닌 법적인 방식으로 일본을 견제할 수 있는 효과적인 분쟁해결 수단이 될 수 있었다. 국제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인정받을 경우, 러시아 외무대신 람즈도르프(Ламздорф)는 러일전쟁 직후에도 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던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지속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고종의 밀사인 이용익(李容翊)은 1905년 9월 러시아로 건너가 국내와 비밀접촉을 하면서 만국평화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주러 한국공사 이범진,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단체인 동의회(同義會)는 함께 헤이그특사 파견을 계획하였다. 국내에서는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와 연결되어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전덕기(全德基), 정순만(鄭淳萬), 이준(李儁), 안창호(安昌浩), 이승훈(李昇薰), 김구(金九) 등이 이준과 이상설을 특사로 보내기로 의견을 모았다. ‘을사조약’의 무효를 전 세계에 알릴 필요가 있다고 보고 이를 고종에게 요청하기로 하였다.
대한제국은 일제의 강압으로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외교와 군사 분야의 실질적인 주권을 잃게 되었다. 대한제국은 이미 1902년 초부터 1907년 6월 1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고종은 1902년 2월 16일 외무대신 박제순(朴齊純)을 통해 만국평화회의 총재에게 공문을 발송하여 회의 참가를 요청하였다. 또한 고종은 프랑스, 벨기에 주재 공사 민영찬(閔泳瓚)에게 이 문제를 협의하라는 훈령을 내렸고, 러일전쟁 이후 불어학교 교사로 활동하던 마르텔을 비밀리에 북경(北京)에 파견하여 북경주재 러시아공사를 만나 헤이그 회의에 대한제국 대표를 초청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한제국은 네덜란드로부터 1906년 2월 14일자와 4월 3일자로 초청장을 받았다.
그런데 1906년 10월 9일, 주일 러시아공사 바흐메찌예프(Ю. П. Бахметьев)는 일본 외무대신 하야시 다다스(林董)를 만나 헤이그평화회의에 한국 참가가 불가능하다고 통고하였다. 이는 1905년 10월 9일 러시아 정부가 주러 한국공사 이범진(李範晉)에게 헤이그 평화회의에 한국을 초청한다고 통고한 결정을 완전히 뒤집는 조치였고, 1906년 5월 러시아 신임 외무대신으로 임명된 이즈볼스키(А. П. Извольский)의 동아시아 정책변화와 관련이 있었다.
패전과 혁명의 상황에서 국내 개혁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평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이즈볼스키는 기존의 동아시아정책과 결별하고 국경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외교정책의 일대 변화를 추구하였다. 이는 전통적인 적성국인 영국과 교전국이었던 일본과의 타협을 이룸으로써 완성될 수 있었다. 러시아는 유럽에서 3국 협상체제를 구축하고 3국동맹과 세력균형을 이룸으로써 평화를 담보할 수 있었고, 동아시아에서는 일본과 몽골과 한국을 교환하는 세력권 분할을 통해 명분보다는 실리를 챙길 수 있었다. 결국 러‧일간의 분쟁을 촉발시킬 수 있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한국을 지목한 이즈볼스키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승인 받고자 한 기존의 람즈도르프의 정책을 포기하고, 한국카드를 이용하여 대일타협정책을 추구하였다.
1906년 8월 러시아총영사 플란손(Г. А. Плансон)은 서울에 도착하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방문하고 총영사의 업무 범위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즈볼스키의 지시에 따라 플란손은 종래의 적극적인 동아시아 진출론을 접어두고 자신의 임무를 단지 영사업무에 한정할 수밖에 없었다. 1907년 5월 9일 플란손은 만국평화회의에 한국대표의 파견은 무의미하다고 고종의 측근에게 전달하였다. 1907년 6월 11일 이즈볼스키가 한국의 특사들이 헤이그로 가기 위해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접하고, 주중 러시아대사이자 평화회의 의장인 넬리도프(А. И. Нелидов)에게 “이들이 헤이그에 도착하여 넬리도프의 협조를 구할 경우, 이를 거절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헤이그에 밀파된 특사는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李相卨), 전 평리원검사 이준(李儁), 주러 한국공사관 참서관(參書官) 이위종(李瑋鍾) 등 모두 3인이었다. 세 특사 외에도 헐버트(Homer B. Hulbert)가 처음부터 사절단을 도왔다. 이준은 중명전에서 고종을 알현한 후 1907년 4월 20일경 임명장을 받았다.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호소하기 위해 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로 떠났다. 이준은 특사 위임장, 러시아 황제와 미국 대통령, 만국평회회의 등에 보내는 황제의 친서를 전달받아 서울을 출발하여 4월 22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이준 일행은 1907년 5월 초순 길림성 용정(龍井)에서 온 이상설(李相卨)과 합류하였다. 이들은 6월 4일 러시아 페테르부르크로 가서 탄원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이위종을 만나 함께 독일 베를린으로 출발하였다. 헤이그 특사는 6월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역에 도착한 후 바흔스트라앗(Wagenstraat) 124번지 융 호텔(Hotel De Jong) 3층에 투숙하였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 중이었다.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들은 6월 27일자로 서명된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지니고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집요한 방해 공작과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들은 중재재판을 취급하는 만국평화회의 제1분과위원회를 찾아가 한국문제를 다루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헤이그 특사들은 1907년 6월 29일 만국평화회의 의장 넬리도프에게 면담을 요청했으나 역시 거절당하였다. 6월 30일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의 대표위원을 만나 지원을 호소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하였다.
이미 특사의 타원서와 숙소 주소가 적힌 명함을 받은 네덜란드 수석대표 보퍼르(W. H. de Beaufort)는 세 특사를 방문하였다. 7월 1일부터 17일까지 한꺼번에 기록한 그의 일기를 살펴보면 그는 한국특사들의 도착소식을 듣고 그들을 만나기 이전에 넬리도프에게 조언을 구하였다. 그러나 넬리도프는 “러시아는 대한제국의 운명을 전적으로 일본에게 위임하였으며, 대한제국의 저항은 쓸모없는 것”이라고 하여 사실상 대한제국을 도와줄 수 없음을 밝혔다. 그리고 보퍼르는 이러한 러시아의 입장을 한국특사들에게 전달했음이 기록되었다. 또한 보퍼르는 “그들에게 네덜란드 정부에 그들의 정체성을 알릴 것을 권했다”며 한국특사에게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였다. 그 이유는 보퍼르가 “일본이 대한제국과 만주에 정착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결코 좋은 결과가 아니다. 향후 우리 인도 군도(群島)들에도 시선이 향할 것이다”며 일본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특사들이 만국평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하는 것이 끝내 거부되자, 헤이그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만국평화회의보(Courrier de la Conference de la Paix)’의 영국인 스테드(W.T. Stead) 편집장은 1907년 7월 7일 고종의 위임장이 위작(僞作)이라고 주장한 미국 뉴욕헤럴드(New York Herald) 기사에 대한 반대의견을 피력하였다. 스테드는 한국의 특사들의 신임장이 진짜이고, 고종이 심각한 결과를 우려하여 자유롭게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주장하였다. 스테드는 7월 9일 ‘만국평화회의보’에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한국 등 약소국의 예를 들며 이들이 진정으로 참석하지 못하는 한 만국평화회의는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만국평화회의를 전세계적인 의회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한국인의 항의와 지적을 회피해서는 안 되며, 그런 점에서 각국은 한국인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7월 8일 이위종은 헤이그 국제협회(International Circle)에서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주제 하에 일제의 한국 침략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위종의 연설내용은 7월 9일 ‘만국평화회의보’에 실렸다.
이위종은 연설을 통해 을사조약을 강요하던 1905년 11월 15일 이후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 즉 일본의 강압 및 위협적인 요구와 고종황제의 대응, 을사조약의 불법 체결과정, 민중의 저항, 열강에 대한 호소, 민영환(閔泳煥)을 비롯한 한국인의 자결, 의병항쟁과 일본의 잔인한 유혈 진압, 친일파에 대한 민중의 복수, 국채보상운동과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을 열거하였다. 이에 대해 스테드는 한국의 이야기가 평화주의자와 문명사회의 진부한 상황을 보여주는 예라고 언급하였다.
고종의 특사로서 3명의 특사보다 일찍 헤이그에 도착하여 활동을 전개했던 헐버트는 미국으로 돌아갔고, 1907년 7월 10일 3명의 특사 중 이준은 단식에 들어갔다. 7월 14일 이준이 순국하자 이상설은 서울에 있는 이준 가족과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 있던 이위종에게 전보로 이 사실을 알렸다. 그 후 이상설은 이위종과 다시 합류하여 7월 19일 헤이그를 출발하여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떠났다. 이상설과 이위종은 9월 5일 헤이그에 들어가 그 동안 임시로 묻어 두었던 이준의 유해를 현지의 청년기독협회의 도움으로 니우 에익 엔 되이넨(Nieuw Eik en Duinen) 공동묘지 영구사용을 계약하여 안장하였다. 헤이그 2차 만국평화회의는 1907년 10월 18일 막을 내렸다.
일제는 한국 법부를 강압하여 특사들을 ‘사명을 띤 관인사칭죄’를 적용하여 기소하고, 1907년 7월 20일 평리원에서 궐석재판을 개정하여 이상설에게는 주범으로서 사형을,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각각 종신형을 언도하였다. 일본정부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을사조약’ 위반행위로 몰아 7월 22일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고종의 강제퇴위 후 한일협약 체결,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을 통해 일본정부의 국권침탈은 가속화되었다. 이어 일본은 정부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여 그들로 하여금 행정 업무를 담당하게 하는 ‘한일협약’을 새롭게 체결하는 한편,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어 경찰권과 감옥 사무권 마저 빼앗아 대한제국의 주요 행정 업무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러한 준비 작업을 바탕으로 1910년 8월 일본의 한국병합은 완료되었고,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