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시 곤스케(林權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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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사업]한국학 국영문 사전 편찬사업
한국외교사전(근대편)
서지사항
분야정치‧법제
유형제도
시대근대
생년1860
졸년1939
관직근대 일본의 외교관
관직주한공사
집필자방광석

본문

1860년 아이즈번(會津藩)의 번사 하야시 마타사부로(林又三郎)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7년 번교(藩校) 닛신칸(日新館)에 입학, 이듬해 일어난 보신(戊辰)전쟁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전사했고 곤스케도 어린 나이로 아이즈와카마츠성(会津若松城) 농성에 참가하여 신정부과 싸웠다.
1879년 오사카(大阪) 전문학교에 입학, 1881년 도쿄대학 예비문(豫備門)으로 전학, 1887년 제국대학 법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외무성에 들어가 교제관(交際官) 시보에 임명되었다.
1887년 10월부터 지부(芝罘) 부영사, 1888년 11월부터 인천 영사, 1892년 3월부터 상해(上海) 주재 영사를 거쳐 1896년 9월 영국공사관 1등서기관, 1898년 1월 청국공사관 1등서기관으로 부임, 무술정변 후 양계초(梁啓超, 량치차오)의 일본망명에 진력하였다.
귀국 후 1899년 외무성 통상국장으로 발탁되었고, 1900년 주한공사로 임명되어 대한, 대러시아 강경외교를 펼쳤다. 러시아의 마산포 해군기지 건설을 저지하고 한국의 영세중립에 관한 러시아의 제의를 거부하였다.
러일전쟁 중에는 한국정부를 압박해 한일의정서를 조인시켰으며, 이어서 제1차 한일협약, 1905년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도 그의 주도 아래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의해 조선은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기고 이후 통감부가 설치되어 조선이 식민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06년 주청공사, 1908년에는 주이탈리아 대사에 임명되었다. 1910년 한국병합이 실현되자 가츠라 다로(桂太郞),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등과 함께 병합의 공적을 평가받아 남작(男爵) 작위를 받았다.
1916년 주중대사에 임명되어 간도문제 등의 해결에 노력하고 장훈(張勳, 장쉰) 복벽사건 때에는 단기서(段祺瑞, 돤치루이)의 장훈 토벌을 은밀히 지원함으로써 일본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중국정세의 안정화를 꾀하였다.
1919년 관동(關東)장관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주영대사를 맡아 1921년 스위스에서 열린 국제연맹 총회 및 근동(近東)평화회의에 일본대표로 참석했다. 1925년 주영대사에서 면직되었으나 그대로 영국에 체재하며 궁내성 어용괘(御用掛)로서 영국 유학중인 지치부노미야(秩父宮)를 수행했다. 1927년 6월 귀국한 뒤 1928년 식부(式部)장관에 임명되었다가 1934년 추밀원 고문관이 되었다.
추밀고문관 재임 중인 80세 때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