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진(李範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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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사업]한국학 국영문 사전 편찬사업
한국외교사전(근대편)
서지사항
분야정치‧법제
유형제도
시대근대
생년1852
졸년1911
관직친러파
관직아관파천 주도
관직독립운동 활동
집필자김영수

본문

1852년에 태어난 이범진은 훈련대장을 역임한 이경하(李景夏)의 서자(庶子)였다.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明成皇后)를 구해준 인연으로 황후의 총애를 받아 민비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갑신정변 이후 고종의 특명에 의해 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으로 승진하고, 삼국간섭 이후 상의사장(尙依司長), 제용원장(濟用院長), 궁내부협판(宮內府協辦) 등 궁내부의 중요 관직에 발탁되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을 받은 이범진은 을미사변 이후 러시아공사관에 은신하면서 고종의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범진은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공사관과 연결되면서 그 동안 정계에서 소외받았던 인물들을 결속하였다. 춘생문사건에 가담한 궁내부 관료 중 대다수가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관직에 진출한 신진관료였다. 이 중 주석면(朱錫冕)과 김홍륙(金鴻陸)은 함경도 출신으로 춘생문사건 당시 러시아공사관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밖에 궁내부 관료 출신은 아니지만 아관파천 직후 관직에 발탁된 김도일(金道一)과 조윤승(曺潤承)이 함경도 출신이었다. 여기에 이학균(李學均)과 이병휘(李秉輝)도 춘생문사건 당시 러시아공사관과 연결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이범진은 함경도 출신을 중심으로 러시아와 관련된 인물을 결속하여 자신의 궁내부 인맥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고종이 중앙 정계에 정치세력을 형성하지 못한 함경도 출신을 궁내부에서 발탁하여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려했기 때문이었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당일 궁내부협판이었던 이범진은 “러시아와 미국 공사관에 도움을 요청하라”는 고종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이범진은 추성문과 영추문 사이의 담장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이미 군인들로 꽉 차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광화문도 마찬가지였다. 이범진은 궁궐 동남쪽 모서리인 동십자각으로 향했고 경비가 소홀하다는 것을 파악하였다. 이범진은 보초를 서고 있는 2명의 일본 병사가 멀리가기를 기다렸다가 4.5미터(15피트) 정도의 높이에서 뛰어내렸다. 대궐 담장이 높았기 때문에 다리를 다친 이범진은 절뚝거리면서 주한 미국과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해서 현장의 상황을 전달하였다.
이범진은 1895년 11월 28일 고종을 구출하려는 춘생문사건이 실패하자 피신하였다. 춘생문사건 실패 이후에도 이범진은 고종의 아관파천 의사를 확인했고, 미국 공사관으로 도피한 이윤용(李允用) ‧ 이완용(李完用)과 함께 김홍집내각에 대항할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범진은 러시아 공사의 지원을 확인하는 한편 고종에게 ‘궁중(宮中)의 여화(餘禍)’가 있을지 모른다는 서신을 보냈다.
이범진은 규장각 각감(閣監) 이기동(李基東)을 통해 사촌 누이동생인 이상궁(李尙宮)을 설득하여, 춘생문사건 당시 실패했던 가마를 이용한 파천 방법을 추진하였다. 이상궁과의 친분 관계를 바탕으로 이기동은 이상궁이 대궐로 들어갈 때 가마를 호위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이기동과 이상궁은 대궐을 자연스럽게 출입할 수 있었고, 대궐 수비대의 경계를 늦출 수 있었다. 이외에도 이범진은 춘생문사건 당시 동원하지 못한 장교 이승익(李承益)과 김원계(金元桂) 등을 통해 공병대를 투입하여 러시아공사관의 문밖과 통로를 경계시켰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은 가마를 타고 경복궁에서 정동에 소재한 주한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아관파천이 성공하자 고종은 측근 인물을 내각관료로 임명했는데, 그 중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이범진을 법부대신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고종은 이범진에게 을미사변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를 지시했고, 그 결과 ‘8월사변보고서’가 발간되었다.
아관파천 이후 이범진은 자신의 궁내부 인맥을 승진시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이범진은 법부대신에 임명된 직후 춘생문사건에 함께 가담한 이병휘(李秉煇)를 법부검사로 발탁하였고, 그 다음날 법부형사국장에 임명하였다. 법부를 장악했던 이범진은 을미사변 관련 혐의자 13명을 체포하여 김홍집(金弘集)내각과 연결된 인물을 제거하려 하였다. 또한 이범진은 주석면을 학부참서관으로 임명하고, 김홍륙을 외부협판으로 기용하고자 하였다. 두 사람은 윤치호(尹致昊) 등의 반발로 임명되지 못했지만 이후 각각 내부참서관(內部參書官)과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임명되었다.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노력과 함께 이범진은 자신의 인맥을 동원하여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외교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범진은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한국대표를 파견하여 러시아의 지원을 확고하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범진은 주석면과 김홍륙을 동원하여 외부주사인 김도일을 러특파참서관(露特派參書官)으로 승진시켰다. 이들은 김도일을 러시아로 파견하여 자신들과 연결된 정보망을 구축하였다.
이범진은 1896년 4월 미국 연대를 주장하는 정치세력의 반발 때문에 법부대신에서 규장원경으로 임명되었다. 규장원경에 임명된 이후에도 이범진이 간접적으로 정국에 관여하자 독립협회에 기반한 정치세력은 이범진의 정치적 영향력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시도하였다. 그 결과 이범진은 1896년 6월 주미 한국공사에 임명되었다.
이범진은 1896년 12월 워싱턴에 도착하여 외교관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고종은 1899년 3월 15일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3국 주재 한국공사로 이범진을 임명하였다. 이범진은 자신의 임명을 미국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에게 서면으로 알렸고, 1900년 3월 유럽을 향해 출발하였다. 런던을 거친 이범진은 1900년 6월 11일 파리에서 빈으로 출발했고, 1900년 7월 3일 1등 수행원 김도일과 그의 비서 남필우를 동반하여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였다. 1900년 7월 13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НиколайⅡ)를 알현한 자리에서 고종의 친서를 제출하였다.
이범진은 1900년 하반기부터 페테르부르크 소재 호텔 ‘노르트’(Норд, 현재 Октябрьская)에서 공사업무를 시작하였다. 1900년 12월 한국정부로부터 공사관운영을 위한 자금 7,870엔을 받았다. 그는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서 러시아 외무대신을 자주 만나려고 노력하였다. 1901년 3월 오스트리아 황제 및 프랑스 대통령에게 ‘금척대훈장’을 수여하기 위해서 페테르부르크에서 빈과 파리로 향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 외무차관을 면담하고 한국과 오스트리아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1904년 1월 21일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이 충돌할 경우에 중립을 준수할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하지만 이범진은 고종의 중립화 성명서에 관한 내용을 람즈도르프(Ламздорф)에게 제출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미 고종이 1903년 11월 특사 현상건(玄尙健)을 통해서 니콜라이 2세에게 전달한 동맹의 편지 내용과 모순되었고, 러시아정부와 외교적인 마찰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러일전쟁 이후 이범진은 페테르부르크 소재 한국공사관을 유지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우선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러시아 외무부의 재정 지원을 요청하였다. 당시 일본정부는 주러 한국공사관의 외교적 활동을 단절시키고자 하였다.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1904년 4월 16일 한국 외무부에 러시아에서 한국 외교관을 즉시 소환할 것을 요청하였다. 무엇보다도 하야시는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이범진이 체류하는 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고종은 일본의 압력 때문에 1904년 5월 18일 주러 한국공사관의 폐쇄와 이범진의 소환을 지시하였다.
이범진은 그의 소환이 일본의 음모라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러일전쟁 전후 주러 한국공사관을 유지하였다. 러시아 수도에 남은 이범진은 일본의 전쟁 수행 상황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1904년 10월 한국 내의 전쟁 상황에 관한 정보를 분석하고 정리한 문서를 러시아 외무대신 람즈도르프에게 전달하였다. 그는 람즈도르프가 군부대신 쿠로파트킨(А. Н. Куропаткин)에게 전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범진이 전달한 문서에는 친일세력의 성장, 서울과 함경도(咸鏡島) 사이의 일본의 활동, 일본군의 한반도 주둔에 관한 정보 등이었다.
람즈도르프는 러일전쟁 전후 이범진의 외교와 정치 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1906년 1월 이범진에게 1등급 스타니슬라브(Станислав) 훈장을 수여할 것을 러시아 정부에 추천하였다. 니콜라이 2세는 이범진의 활동을 평가하여 훈장을 수여하도록 허락하였다. 이에 따라 이범진은 매달 러시아 정부로부터 100루블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을사조약에 기초하여 일본정부는 주러 한국공사관의 폐쇄를 지시하였다. 이범진은 1901년부터 운영된 페테르부르크 소재 판텔레이몬스카야 5번지(Пантелеимоновская Д.5 현재 Пестеля)에 위치한 주러 한국공사관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1906년 11월 페테르부르크 교외에 위치한 ‘신농촌’(Новая деревня)이라는 도시의 체르나레치나야 5번가(Чернореченая улилица Д.5) 아파트를 임대하였다.
이범진은 페테르부르크 교외에 위치한 도시에서 한국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아파트는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국 이주민들의 모임장소로 활발히 이용되었다. 특히 1909년 여름 그의 아파트에서 20여명의 한국인들이 한국독립을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비밀회합을 가졌다. 이범진은 중국과 한국의 경계에 위치한 간도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전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 이범윤(李範允)에게 무기 구입을 위한 재정적인 지원을 제공하였다. 그 후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자 이범진은 1911년 5월 사망하여 페테르부르크 북부 공동묘지(Успенский кладбищ Сант-Петербурга)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