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乙巳五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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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사업]한국학 국영문 사전 편찬사업
한국외교사전(근대편)
서지사항
분야정치‧법제
유형제도
시대근대
집필자이송순

본문

1905년 11월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을 내용으로 하는 한일협약안을 체결하기 위해 특파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한국정부에 압력을 가하며 체결을 강요하였지만, 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공사가 한국정부의 각부 대신들을 일본공사관에 불러 한일협약의 승인을 꾀하였으나 오후 3시가 되도록 결론을 얻지 못하자, 궁중에 들어가 어전회의를 열었다. 이 날 궁궐 주위 및 시내의 요소요소에는 무장한 일본군이 경계를 선 가운데 쉴 새 없이 시내를 시위행진하고 본회의장인 궁궐 안에까지 무장한 헌병과 경찰이 거리낌 없이 드나들며 위협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어전회의에서는 일본 측이 제안한 조약을 거부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대동하고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온 이토는 다시 회의를 열고,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조약 체결에 관한 찬부를 물었다. 결국 ‘을사오적’이라 불리는 박제순 ‧ 이지용 ‧ 이근택 ‧ 이완용 ‧ 권중현 5명의 대신이 찬성하여 을사조약은 1905년 11월 18일 오후 2시경 체결되었다.
이 날 회의에 참석한 대신은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이었다. 이 가운데 한규설과 민영기는 조약 체결에 적극 반대하였다. 이하영과 권중현은 소극적인 반대 의견을 내다가 권중현은 나중에 찬의를 표하였다. 다른 대신들은 이토의 강압에 못 이겨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 의사를 밝혔다. 이날 밤 이토는 조약 체결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다시 회의를 열고 자필로 약간의 수정을 가한 뒤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조약을 승인받았다.
이완용(1858~1926)은 을사조약 체결 시 학부대신으로서 조약 체결을 주도하였다. 조약 체결을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면서 일본인에게 “만약 권고를 받게 되고 이 몸이 참정대신이 된다면 새로운 조약을 반포하는 일을 스스로 떠맡겠다” 고 공언할 정도였으며, 이에 당시 사람들은 이완용을 ‘재앙의 우두머리’라고 하였다. 이러한 을사조약 체결의 공을 인정받아 1907년 6월 내각 총리대신에 임명되어 1910년 8월 29일 일제에 주권을 완전히 넘기고 식민지로 전락할 때까지 직위를 유지하며 정미7조약과 한일합병조약 체결을 주도하였다. 1907년 7월 18일 고종 퇴위에 참여하였으며, 같은 해 7월 24일 정미7조약 체결을 주도하며 조인하였고, 같은 해 7월 31일 순종에게 군대해산 조칙을 받아내었다. 또한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에 의한 군대해산에 저항하여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민종식(閔宗植), 허위(許蔿) 등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였고, 나아가 한국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의병 토벌을 요청하였으며, 1909월 7월 사법 및 감옥사무 위탁 각서와 한국중앙은행에 관한 각서에 조인하며 합병 이전 조선의 정치 ‧ 외교 ‧ 사법 ‧ 경제 주권을 일본에 넘기는데 앞장섰고, 결국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을 위한 전권위원으로 한일합병조약에 조인하였다.
이완용은 합병 이후 일본정부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았고, 1920년 후작으로 승작하였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그는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며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함을 대내외적으로 폭로하였을 때 1919년 4월 5일부터 1919년 5월 30일까지 매일신보에 ‘3‧1만세운동에 대한 경고문’을 3차에 걸쳐 게재하여 조선인들의 독립의지를 꺾고, 일제의 3‧1운동 탄압에 앞장섰다. 1926년 사망 시에 한일합병과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한 공로를 인정하여 일본 정부는 국가 최고 훈장인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추서하였다.
박제순(1858~1916)은 외부대신으로서 을사조약에 찬성하고 조약을 체결한 당사자였다. 1905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 와서 일본 천황의 친서를 보이며 고종을 위협, 조약 체결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박제순은 처음 고종과 각료들이 이의 처리문제를 둘러싸고 회담을 할 때에는 참정대신 한규설과 함께 조약 체결에 반대하였다. 이에 한규설은 “다른 대신들이 설혹 다른 의견을 제출한다 해도 주무대신이 끝까지 버티고 부결하면 무슨 조약이더라도 성립이 될 수 없으니 두 어깨가 무겁겠소”라고 격려하였다. 그러나 박제순은 자신의 뜻을 지키지 못하고 결국 변명을 늘어놓다가 침묵하며 동조하였다. 이토는 “당신은 절대적으로 이 협약안에 반대한다고는 볼 수 없다. 폐하의 명령만 내린다면 조인할 것으로 본다고 믿는다”고 하자 박제순은 더 이상 말을 못하였다. 즉 주무대신으로서 반대의 뜻을 명확히 밝히지 못하고 “조약체결에 대해서는 나는 모르겠소,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하여 결국 조약 체결에 동의하고 말았다.
을사조약을 체결한 공로로 박제순은 참정대신이 되었다. 1907년 일진회의 내각 사퇴 주장과 이 ‘을사오적’에 대한 암살 기도가 잇따르자 참정대신을 사임하였다. 이에 이토는 이완용내각을 조직하였고 박제순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다시 송병준(宋秉畯) 실각으로 1909년 내부대신이 되었다. 이처럼 박제순은 이토의 신임이 두터웠던 관계로 이완용이 이재명(李在明)에게 부상을 당해 치료를 받는 동안 내각 총리대신 임시서리로 활약하였다. 한일합병 이후 일본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 경학원 대제학이 되어 일제 총독정치를 선전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지용(1870~1928)은 1904년 외부대신 임시서리로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본이 배후의 안전을 확보하고 전쟁물자 조달의 편의를 제공받기 위해 한국 정부에 강요한 ‘한일의정서’ 체결에 조인하였고, 을사조약 당시 내부대신으로서 거리낌 없이 찬성하며 조인하였다. 그는 “젊은 나이로 경박하고 무식하며 권력을 탐하는 사람”이라는 세평을 들었고, “내가 최지천(병자호란 때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의 호)이 행한 일을 했다”고 떠벌여 지탄을 받았다. 합병 이후 일본정부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또한 1922년 12월 보부상의 상업상 권리를 진행시킨다는 취지를 내걸면서 독립운동 밀고와 파괴활동에 앞장 선 상무연구회(상무사)의 사장에 선임되었고, 1927년 9월 ‘일선융화(日鮮融和)’ 추진단체인 동민회(同民會) 고문으로 선임되는 등 일제의 동화정책에 적극 협력하였다.
이근택(1865~1919)은 군부대신으로서 을사조약 조인에 찬성하였다. 이근택은 대한제국시기 경무사, 경위원총관, 헌병사령관, 원수부 검사국장 등 경찰 ‧ 군사부문에서 활약하였다. 이 시기는 이용익(李容翊) 등과 함께 고종의 측근으로서 근황주의(近皇主義)적 인물이었고 정권의 핵심이었다.
한편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고,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해 이들 친러 ‧ 반일적인 정부대신들을 매수 ‧ 회유하여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권모술수에 능하고 정치적 수완이 탁월했던 이근택은 일본의 세력이 커가는 것을 보고 친일적 경향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에 의해 한일의정서와 한일협정서가 강제 체결되면서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식민지화가 가속화되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친일적 입장을 보였다. 그는 일본으로부터 30만원의 기밀 정탐비를 받고 궁중과 부중의 모든 기밀 사항을 모조리 제보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드디어 친러파라는 혐의를 풀고 1905년 9월 군부대신에 오르게 되었고, 이어 을사조약 체결에 적극 찬성하였다. 이 시기 그의 친일성향에 대해 “한국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형제의를 맺었고, 이토에게 의탁하여 의자(義子)가 되었다.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었으며 일본 신발까지 신고 일본 수레에 앉아 항상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출입하였다” 고 하였다. 을사조약 체결 직후 그는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기도 하였으며, 파렴치한 행동으로 민중의 분노와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한일합병 이후 일본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이와 함께 그의 형인 이근호(李根澔), 동생인 이근상(李根湘)도 동시에 자작 작위를 받았는데, 일가(一家)가 일제에 적극 협력하고 귀족 작위를 받아 가문의 영달을 누렸다는 점에서도 특이하다 할 것이다.
권중현(1854~1934)은 농상공부대신으로서 을사조약 체결에 찬성하였다. 권중현에 대한 세평은 “성질이 교활하고 겉모양을 잘 꾸며 외국인에게 아부하는데 오로지 뜻을 두었다. 이 때문에 그 몸에서 벼슬이 떠나질 않았다. 그리고 아첨과 농락하는 것이 그 평생의 장기였다”는 것이었다. 그는 을사조약 체결 이전부터 적극적인 친일 행적을 보였는데, 1904년 7월 육군부장으로 재직 중 5개월 동안 중국 요양(遼陽), 여순(旅順순) 등지를 방문하고 러일전쟁에 참전중인 일본군을 격려 위문하였으며, 일본의 군사행동에 대해 편리를 제공하였다.
그는 이러한 공으로 한일합병 이후 일본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또한 1922년 12월 조선총독부 산하에 설립된 조선사편찬위원회 고문, 1925년 7월 조선사편찬위원회가 확대 개편된 조선사편수회의 고문으로 기용되어 사망할 때까지 일제 식민사관에 의한 한국사의 왜곡 편찬사업에 가담하였다.
이러한 을사오적의 반민족적이고 파렴치한 친일행위에 대한 일반 백성들의 분노는 매우 커 이들의 집을 불태우고, 암살하고자 하는 개인 테러행위 - 나인영(羅寅永), 오기호(吳基鎬) 등의 ‘을사오적’ 암살 기도 - 도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