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양(朴定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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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사업]한국학 국영문 사전 편찬사업
한국외교사전(근대편)
서지사항
분야정치‧법제
유형제도
시대근대
생년1841
졸년1904
관직조선후기 관료
관직외교가
관직주미 조선공사
관직독립협회 창설 관여
집필자김영수

본문

박제근(朴齊近)의 아들로 1841년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치중(致中), 호는 죽천(竹泉), 시호는 문익(文翼)이었다. 1866년 정시(庭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1874년 경상좌도 암행어사(慶尙左道暗行御史)를 역임하였다. 박정양은 1880년대 일본과 미국을 다녀온 인물이었다.
박정양은 1881년 조사일본시찰단(朝士日本視察團, 일명 紳士遊覽團) 조사(朝士)로 이상재(李商在)와 왕제응(王濟膺)을 수원(隨員), 통사로 김낙준(金洛俊)을 데리고 일본 내무성과 농상무성 관청을 조사하였다. 귀국 후 1881년 민겸호(閔謙鎬), 이근필(李根弼)과 함께 이용사(理用司)의 당상경리사(堂上經理事)에 임명되었다. 그는 1883년 기기국총판(機器局總辦)을 역임하였다.
박정양은 1887년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로 임명되어 참찬관(參贊官)으로 이완용(李完用)과 알렌(H.N. Allen), 서기관(書記官)으로 이하영(李夏榮)과 이상재(李商在), 번역관(飜譯官)으로 이채연(李采淵) 등과 함께 초대 미국 공사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공사시절 청국이 ‘영약삼단(另約三端)’을 요구하며 압력을 넣었지만 이를 무시하고 자주외교를 펼쳤다. ‘영약삼단’이란 조선공사가 미국 국무성을 예방할 때 청국공사와 같이 가야한다는 등 조선의 외교적 자주권을 침해한 규정이었다. 박정양은 미국서기관 알렌이 ‘수양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주한 외국 사절단 사이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박정양은 주미공사관 출신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정계에서 미국 연대의 핵심인물로 활동할 수 있었다.
박정양은 1889년 내아문협판(內衙門協辦)에 복직했고. 1891년 형조와 호조판서, 1892년 전환국관리, 1893년 내아문독판(內衙門督辦), 1894년 군국기무처회의원(軍國機務處會議員)을 역임하였다. 1895년 5월 내각총리대신, 1895년 7월 내부대신 등에 임명되었다. 박정양은 을미사변 직후 관직을 버렸지만 민비 장례식 준비에 참여하면서 1895년 8월 24일 중추원의장을 수락하였다. 그가 중추원의장으로 처음 처리한 안건이 서재필(徐載弼)의 중추원고문 초빙이었다.
아관파천 직후인 1896년 2월 내무대신 및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했고, 1896년 11월 탁지부대신 사무대리, 19897년 의정부참정으로 교전소(校典所) 임시의장를 대행하였다.
서구의 정치제도를 체험한 박정양은 미국의 정치제도를 삼권분립에 기초한 정치제도로 이해하였고, 행정부가 대통령의 담당부서로 양원의 ‘정법(政法)’을 실행하는 곳이라고 인식하였다. 박정양은 상원인 원로원(元老院)의 기능을 중시하면서 “대통령의 행정득실(行政得失)과 관리채용(官吏採用)의 가부 역시 반드시 해원(該院)에 질의하여 인가를 얻은 후에 시행한다”고 인식하였다. 또 “원로원(元老院)이 민선원(民選院) 발의안의 ‘가부결정권’을 담당하여 대통령에게 보내는 역할을 한다”고 하여 상원인 원로원이 법률을 심의하여 결정하는 기구라고 이해하였다. 박정양은 미국 대통령 워싱턴이 미국독립에 절대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워싱턴의 임기 8년 동안 “정규(正規) ‧ 법령(法令) ‧ 과세(課稅) ‧ 재용(財用) 등이 모두 편의를 얻게 되어 미국의 부강이 여기에 기반을 둔 것이다”라고 파악하였다.
박정양은 미국의 정치제도를 삼권분립으로 이해하면서 의회의 기능 중 하원보다는 상원을 중시하고, 워싱턴의 행적에 비추어 대통령의 중요성에 주목하였다. 그는 서재필이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자마자 중추원 규칙을 개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아관파천 이후 서재필과 더불어 중추원을 강화하기 위해 1898년 윤치호(尹致昊)와 함께 「중추원관제개정(中樞院官制改正)」에 참여하여 ‘신의정부’와 중추원의 위상을 대등하게 만들었다.
박정양은 1897년 7월 독립협회 회원에 가입하여 독립협회를 초기부터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이후 1898년 각종 정치사건에 연루되었다. 1898년 8월 소위 「대한청년애국회사건」에 김재풍, 민영환(閔泳煥), 민영준(閔泳駿), 안경수(安駉壽)와 함께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같은 해 10월 의정부참정으로서 정부관료 이종건(李鍾健), 서정순(徐正淳), 김명규(金明奎), 고영희(高永喜), 한규설(韓圭卨)과 함께 관민공동회에 참석하여 고종에게 헌의 6조를 채택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후 반대세력이 모의한 대통령을 박정양, 부통령을 윤치호, 내부대신을 이상재, 외부대신을 정교(鄭喬)로 한다는 익명서에 이름이 포함되면서 1898년 독립협회 해산과 함께 민영환, 한규설과 더불어 면직되었다.
1899년 양지아문(量地衙門) 총재관, 1904년 규장각학사 겸 시강원일강관을 수행하다 1904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문집으로는 『박정양전집(朴定陽全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