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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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기(金應箕)

서지사항
항목명김응기(金應箕)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인물
유형문신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455년(세조 1)∼1519년(중종 14) = 65세]. 조선 중기 성종(成宗)~중종(中宗) 때의 문신. 의정부 좌의정(左議政) 등을 지냈다. 자는 백춘(伯春) 또는 미수(眉叟), 백미(白眉)이고, 호는 병암(屛菴)이며, 시호는 문대(文戴)이다. 본관은 선산(善山)이고, 거주지는 서울과 춘천(春川)이다. 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김지경(金之慶)이고, 어머니 신천 강씨(信川康氏)는 영덕현감(盈德縣監) 강거례(康居禮)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덕산현감(德山縣監) 김지(金地)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문경현감(聞慶縣監) 김양보(金揚普)이다. 고려를 섬긴 김주(金澍)의 현손이자, 좌의정 안당(安瑭)의 매부(妹夫)이기도 하다. 성리학의 원리와 천문⋅역법(曆法)⋅음악의 이론 등에 밝아서 ‘동방의 성인’이라고 일컬어 졌으나, 종중 때 조광조(趙光祖)의 사림파(士林派)에서 그를 대표적인 훈구파(勳舊波)로 간주하여 탄핵하였다.

[성종 시대 활동]
1477년(성종 8)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3세였다.[『방목(榜目)』] 이어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보임된 후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1482년(성종 13)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에 임명되었다. 이때 경연청(經筵廳) 검토관(檢討官)을 겸임하고, 경연(經筵)에서 10여 년 동안 김종직(金宗直)·유숭조(柳崇祖) 등과 함께 진강(進講)하며 젊은 성종에게 학문을 가르쳤다.[『성종실록』 13년 11월 2일],[『성종실록』 13년 11월 29일] 1488년(성종 19) 예조 정랑(正郞)이 되어 경연청 시독관(試讀官)을 겸임하고, 성종의 요청으로 『율려신서(律呂新書)』를 진강하였다.[『성종실록』 19년 1월 6일],[『성종실록』 20년 4월 12일] 1490년(성종 21)에는 홍문관 전한(典翰)이 되어 관상감(觀象監) 제조(提調)를 겸임하였는데, 그해 12월 혜성이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자 관상감을 이끌며 임금에게 혜성에 대한 관측을 자세히 보고하였다.[『성종실록』 21년 10월 15일],[『성종실록』 21년 11월 24일] 1491년(성종 22)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홍문관 전한이 되어 관상감 제조를 겸임하였다.[『성종실록』 22년 6월 17일],[『성종실록』 22년 11월 5일]

1492년(성종 23)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성종의 신임과 총애를 받았으며, 그해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다.[『성종실록』 23년 9월 10일] 1492년(성종 23) 승정원 좌승지(左承旨)로 승진하였다가, 1493년(성종 24) 마침내 승정원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어, 성종의 측근으로서 성종의 정치를 보필하였다.[『성종실록』 23년 12월 19일],[『성종실록』 24년 6월 27일]

[연산군 시대 활동]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燕山君)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승정원 도승지 김응기는 승정원 좌승지 권경우(權景祐)와 함께 형편에 알맞게 왕명을 출납하여 사람들이 그 재능에 탄복하였다.[『연산군일기』 5년 2월 19일] 이어 1496년(연산군 2)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가 1497년(연산군 3) 성균관(成均館) 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고, 정조사(正朝使)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설을 하례(賀禮)한 후 돌아와서 호조 참판(參判)이 되었다.[『연산군일기』 2년 3월 14일],[『연산군일기』 3년 7월 4일],[『연산군일기』 3년 12월 27일] 1498년(연산군 4)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으나, 곧 이어 천추사(千秋使)에 임명되어 명나라 황태자의 탄신을 축하하고 돌아와 공조 참판이 되었다.[『연산군일기』 4년 4월 4일],[『연산군일기』 5년 7월 16일],[『연산군일기』 5년 11월 23일] 1500년(연산군 6)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가, 형조 판서(判書)로 승진하였고, 그해 겨울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나갔다.[『연산군일기』 6년 4월 11일],[『연산군일기』 6년 7월 3일],[『연산군일기』 6년 12월 12일]

1502년(연산군 8) 의금부 지사(知事)를 겸임하면서 연산군 후반기의 수많은 옥사(獄事)를 심문하였고, 이어 중추부(中樞府) 지사(知事)에 임명되어서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우빈객(右賓客)을 겸임하였다.[『연산군일기』 8년 5월 24일] [『연산군일기』 8년 11월 5일] 1503년(연산군 9) 공조 판서를 거쳐 예조 판서가 되었다.[『연산군일기』 9년 1월 4일],[『연산군일기』 9년 11월 1일] 이때 이세좌(李世佐)가 양로연(養老宴)에서 어사주(御賜酒)를 어의(御衣)에 엎지르는 바람에 연산군의 분노를 사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김응기가 재상 노공필(盧公弼)과 함께 “이세좌의 죄는 종묘(宗廟) 사직(社稷)에 관계되지 않습니다.” 하고 용서해주기를 간청하였다.[『연산군일기』 9년 9월 19일] 그런데 이듬해인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가 발생하였고,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윤비(廢妃尹妃)에게 사약을 전하였던 당시 승정원 승지 이세좌는 사사(賜死)되었다. 그러면서 이전에 그를 변호하였던 김응기와 노공필도 모두 유배되었다.[『연산군일기』 10년 6월 16일]

[중종 시대 활동]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자, 청사위사(請辭位使)에 임명되어 청승습사(請承襲使) 임유겸(任由謙)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연산군이 왕위를 사양하게 된 경위와 동생 중종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 사연을 설명한 후 명나라의 고명(誥命)을 받아 돌아왔다.[『중종실록』 1년 9월 4일] 1507년(중종 2)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다가 예조 판서로 승진하였다.[『중종실록』 2년 3월 1일],[『중종실록』 2년 2월 4일] 1508년(중종 3) 이조 판서에 임명되고, 1509년(중종 4) 형조 판서를 거쳐 병조 판서로 옮겼다.[『중종실록』 3년 7월 4일],[『중종실록』 4년 3월 20일],[『중종실록』 4년 1월 16일]

1510년(중종 5)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자 체찰사(體察使)에 임명되어, 3포(浦)의 왜구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 공으로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으로 승진하였다.[『중종실록』 5년 6월 27일] 1511년(중종 6) 성균관 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고, 1512년(중종 7) 다시 의정부 우찬성이 되어 경연에서 유숭조와 함께 『역학계몽(易學啓夢)』을 진강하였다.[『중종실록』 6년 4월 28일],[『중종실록』 7년 1월 17일] 1513년(중종 8) 다시 예조 판서가 되어 의금부 판사(判事)를 겸임하며, <신윤무(辛允武)의 난(亂)>을 다스렸다.[『중종실록』 8년 6월 27일] 그 공으로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는데, 이때 영의정은 유순(柳洵)이고, 좌의정은 정광필(鄭光弼)이었다.[『중종실록』 8년 10월 27일] 1516년(중종 11) 좌의정으로 승진하여, 영의정 정광필, 우의정 신용개(申用漑)와 함께 중종 중반기의 안정과 개혁을 추진하며, 조광조의 사림파를 조정에 등용하였다.[『중종실록』 11년 4월 9일] 그러나 조광조의 사림파가 대간(臺諫)을 장악하고, 반정 공신의 위훈(僞勳)을 삭제하는 한편, 좌의정 김응기를 훈구파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지목하여 “김응기는 의정에 합당하지 않습니다”라고 탄핵하였다. 이에 김응기는 사직을 청하고, 녹봉을 받지 않았다.[『중종실록』 12년 7월 8일],[『중종실록』 12년 10월 14일]

1518년(중종 13) 중종은 김응기를 한직인 중추부 영사(領事)로 내보내고, 신용개를 좌의정으로, 안당(安瑭)을 우의정으로 임명하였다.[『중종실록』 13년 1월 5일] 안당은 이조 판서 때 조광조의 사림파를 대거 등용한 장본인으로 김응기의 처남이었다. 김응기는 평소 중풍을 앓았는데, 여기에 탄핵까지 당하자 지병이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그 뒤 1년이 지나도록 중병을 앓다가, 1519년(중종 14) 6월 서울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65세였다.[『중종실록』 14년 6월 9일]

[성품과 일화]
성품이 단정하고 근엄하며, 행동이 규율과 법도가 있었다.[『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29] 그는 효도와 우애, 공순과 검소를 천성으로 타고났다. 말을 빨리 하거나 안색이 갑자기 변하지 않았으며, 구차스럽게 남에게 웃거나 말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잠자는 것과 밥 먹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학문은 근본 이치를 연구하였는데, 특히 심오한 성리학 이론에 정통하였으며, 천문⋅역법과 음악의 이론까지도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집에 있을 때에는 가산을 경영하지 않고 첩을 두지 않았으며, 벼슬할 때에는 밤낮으로 정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평생 정도(正道)를 지키고 청렴결백하게 살면서, 나라를 걱정하였다. 김응기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위로는 공경대부(公卿大夫)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백성들에게 이르기까지 너나없이 애석해 하면서 말하기를, “착한 사람이 돌아갔다”라고 하였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2 「김응기(金應箕)」]

1488년(성종 19) 5월 예조 정랑 김응기가 경연의 시독관(試讀官)을 겸임하고 있을 때였다. 성종이 경연에 나아가서, 김응기에게 명하여 동양 음악의 이론을 엮은 『율려신서』를 진강하게 하였다. 이때 성종은 동양 음악의 ‘격팔상생법(隔八相生法)’을 배우고자 하여 조강(朝講)이 파한 뒤에도 김응기만을 남게 하였다.[『국조보감(國朝寶鑑)』 권17] 김응기는 음악뿐만 아니라 천문 역법에도 정통하였는데, 그가 관상감 제조를 겸임하고 혜성을 관측하여 성종과 연산군에게 자세히 보고한 부분은 상당히 주목할 만하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도 선산 동면(東面) 도개리(道開里)의 선영에 있는데, 저자 미상의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첫째 부인 해평 김씨(海平金氏)는 전생서(典牲署) 영(令) 김맹치(金孟恥)의 딸인데, 자녀는 1남을 낳았다. 둘째 부인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성균관 사예(司藝)안돈후(安敦厚)의 딸인데, 자녀가 없었다. 외아들 김세효(金世孝)는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여 형조 정랑을 지냈다.[비문]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종묘의궤(宗廟儀軌)』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 『홍재전서(弘齋全書)』

■ [집필자] 이현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