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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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흠(申欽)

서지사항
항목명신흠(申欽)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66년(명종 21)∼1628년(인조 6) = 63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의 문신. 영의정(領議政)을 지냈다. 자는 경숙(敬叔)이고, 호는 현헌(玄軒) · 상촌(象村) · 현옹(玄翁) · 방옹(放翁)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개성부 도사(開城府都事) 신승서(申承緖)이고, 어머니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좌참찬(左參贊)송기수(宋麒壽)의 딸이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라면서 외조부 송기수와 외 6촌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에게 글을 배웠고,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85년(선조 18)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 · 진사과(進士科) 양과에 합격하였는데, 1586년(선조 19) 21세로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 그 해 9월 성균관(成均館) 권지(權知) 학유(學諭)에 보임(補任)되었다가, 동인(東人)으로부터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당파라고 공격을 받아서, 12월 함경도 경원(慶源)의 훈도(訓導)로 좌천되었다. 1587년(선조 20) 광주(廣州)의 훈도로 옮겼다가, 1588년(선조 21) 사재감(司宰監)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가, 일을 잘못하여 파직당하여 동호(東湖)의 명허정(明虛亭)에서 강학(講學)하였다. 1590년(선조 22)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서 검열(檢閱) · 대교(待敎) · 봉교(奉敎)로 차례로 승진되고, 1591년(선조 24) 여름에 관례에 따라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로 승진하였으며, 7월 병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가 파직당하였다.[『월사집(月沙集)』 권44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 신도비명(領議政贈諡文貞申公神道碑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왜적(倭賊)이 도성(都城)에 육박하였을 때 양재역 찰방(良才驛察訪)에 임명되었다. 신흠은 그날 바로 임지(任地)에 부임하였는데,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이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뒤따라 양재역에 이르렀으므로, 그가 흩어진 인원을 수습하여 신립의 군대를 따라 조령(鳥嶺)까지 갔다. 신립의 군대가 탄금(彈琴)대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패배하자, 신흠은 사잇길로 강화도(江華島)에 도착한 다음에, 장차 뱃길을 이용하여 서쪽으로 행재소(行在所)를 찾아가려고 하였다. 그때 마침 상국(相國) 정철(鄭澈)이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임명되어 양호(兩湖) 지방의 군대를 관장하면서, 그를 종사관(從事官)에 임명하고, 모든 병무(兵務)를 그에게 맡겼다.[『월사집』 권44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 신도비명」]

이리하여 <임진왜란> 때 갑자기 도체찰사 정철의 종사관이 되었는데, 그 해 9월 정철을 따라서 충청도 당진포(唐津浦)로 내려갔다. 종사관 신흠은 영리한 아전과 법규에 익숙한 관리 수십 명을 동원하여 장부와 문서를 나누어 주어 일제히 검토하게 하고, 또한 군사와 백성들에게 불편한 일을 글로 써서 올리게 하였다. 문서가 번잡하였고 하소연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나, 신흠은 즉석에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바로 판결하였는데,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연려실기술』 권28] 체찰사 정철이 이를 보고 감탄하였다. 그해 10월 신흠이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어, 성균관 직강(直講)을 겸임하였다. 당시 중국 명(明)나라 군문(軍門)의 통보가 연이었는데, 처음에 이호민(李好閔)이 전담하여 수발하다가, 얼마 뒤에 이호민이 모친상을 당해서 집으로 갔으므로 신흠이 대신하여 맡았는데, 문사(文辭)가 충분하고 일이 민첩하였으므로, 선조가 신흠을 신임하였다.[『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12월 1일]

1593년(선조 26) 2월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그해 3월 체찰사 정철을 따라 영유(永柔)의 행재소에 가서 선조를 알현하니, 곧바로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당시에 명나라 군대가 나라 안에 가득하여 우격(羽檄)이 번갈아 급히 전달되고 자문(咨文)과 주문(奏文) 등 문서가 날마다 몇 십 상자씩 쌓였는데, 그가 좌우로 응수하면서 뜻에 걸맞게 민첩하게 처리하였다. 10월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환도(還都)하였다. 윤11월 명나라 조사(詔使) 행인(行人) 사헌(司憲)이 조칙(詔勅)을 받들고 왔는데, 원접사(遠接使) 이항복(李恒福)의 종사관으로 임명되었다.[『월사집』 권44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 신도비명」] 12월 강화에 유배된 정철이 병사하자, 그는 스승을 잃은 것처럼 매우 슬퍼하였다.

1594년(선조 27) 1월 이조 정랑(正郞)이 되었다가,[『선조실록』 선조 27년 1월 20일] 2월 승문원(承文院) 교리(校理)에 임명되었다. 6월 역적(逆賊) 송유진(宋儒眞)이 체포되자, 선조가 친국(親鞫)하였는데, 그가 문사 낭청(問事郎廳)으로서 상세하게 심문하고 민첩하게 보고하였으므로, 선조가 신흠을 지목하여 일을 맡겼다. 옥사(獄事)가 끝나고 사헌부 집의(執義)로 승진하여,[『월사집』 권44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 신도비명」] 승문원 참교(參敎)를 겸임하였다. 12월 성균관 사성(司成)이 되었는데, 세자(世子) 책봉(冊封)을 요청하는 주청사(奏請使) 윤근수(尹根壽)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북경(北京)에 갔다가, 1595년(선조 28) 3월 명나라로부터 세자 책봉을 허락 받지 못하고 돌아왔다. 6월 군기시(軍器寺) 정(正)에 임명되었고, 8월 순안 어사(巡按御史)에 임명되어 함경도(咸鏡道) 지방을 순찰하면서, 민생의 절실한 병폐를 살피고 백성들을 위무(慰撫)하였다. 9월 성균관 사예(司藝)가 되었다가, 종부시(宗簿寺) 정(正)이 되었다.

1596년(선조 29) 2월 의정부 사인(舍人)에 임명되었고, 4월 도원수(都元帥)권율(權慄)의 종사관에 임명되어, 호서(湖西) 지방의 역적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원수 권율이 그 잔당(殘黨)을 모조리 죽이려고 하자, 그가 말하기를, “위협 때문에 따른 자들은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니, 원수 권율이 크게 깨닫고, 즉시 그를 조정에 보내어 선조에게 자세히 보고하게 하였는데, 선조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죄가 특히 무거운 자 7명만을 죽이는 데 그치고 나머지는 모두 용서하여 주니, 군민(軍民)들이 크게 안도하였다. 얼마 뒤에 평산 부사(平山府使)와 양주 목사(楊州牧使)에 연달아 임명되었으나, 대신들이 사명(辭命)을 관장해야 한다는 하여 그대로 머물게 하였다.[『월사집』 권44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 신도비명」] 11월 내자시(內資寺) 정(正)이 되었다.[『선조실록』 선조 29년 11월 22일]

1597년(선조 30) 1월 사섬시(司贍寺) 정(正)이 되었다가, 5월 예빈시(禮賓寺) 정(正)이 되어 승문원 참교를 겸임하였고, 12월 종부시 정이 되었다.[『월사집』 권44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 신도비명」, 『선조실록』 선조 30년 12월 29일] 10월 접반사(接伴使) 신점(申點)의 종사관이 되어서 요동(遼東)에 다녀왔다. 12월 평산 부사(平山府使)가 되었다가, 종부시 정이 되었다. 1598년(선조 31) 2월 장악원(掌樂院) 정(正)이 되었고, 3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필선(弼善)을 겸하였다. 4월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서 교리와 응교(應敎)가 되었다.[『월사집』 권44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 신도비명」] 때 정철이 최영경(崔永慶)을 무함했던 죄로 추론(追論)당하여 죽은 후에 삭직(削職)되었는데, 홍문관 응교 신흠이 이를 반대하다가, 동인으로부터 “신흠은 바로 정철의 앞잡이”라고 비난 받았다.[『선조실록』 선조 31년 4월 30일] 12월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다가, 사옹원(司饔院) 정(正)이 되었다.

1599년(선조 32) 2월 홍문관 전한(典翰)으로 승진하였고, 10월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 12월 형조 참의(參議)에 임명되고 승문원 부제조(副提調)를 겸임하였다.[『월사집』 권44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 신도비명」] 맏아들 신익성(申翊聖)이 선조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혼인하여 부마(駙馬)가 되었다. 1600년(선조 33) 4월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는데, 승문원 제조(提調)를 겸임하였다. 구례(舊例)에는 승선(承宣) 곧 승지의 직책을 가진 사람은 승문원 제조를 겸임할 수 없었으나, 대신이 특별히 유임하도록 청하였기 때문이다. 1600년(선조 33) 6월 예조 참의(參議)가 되었다가, 대사간(大司諫)이 되었고, 7월 병조 참지(參知)가 되었다가, 이조 참의가 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3년 6월 11일 · 6월 20일 · 7월 27일] 1601년(선조 34) 2월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고 10월 의금부(義禁府) 동지사(同知事)가 되어다. 1602년(선조 35) 2월 예조 참판(參判)이 되었다. [『월사집』 권44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 신도비명」] 그 해 윤2월 충무위 부호군(忠武衛副護軍)이 되었으며 4월 부총관(副摠官)이 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5년 윤2월 23일 · 4월 11일] 1603년(선조 36) 1월 병조 참판이 되었다가, 3월 예문관 제학(提學)에 임명되어, 춘추관(春秋館) 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다. 그해 7월 세자시강원 우부빈객(右副賓客)이 되어, 선조의 명을 받고 우리나라의 시문(詩文)을 뽑아서 『동인시문(東人詩文)』을 편찬하여 바쳤다.[『월사집』 권44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 신도비명」]

1604년(선조 37) 5월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가, 세자시강원 좌부빈객(左副賓客)이 되었고, 7월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9월에 병조 참판이 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7년 5월 16일 · 9월 19일] 1605년(선조 38) 1월 도승지(都承知)로 영전되었다가, 6월 병조 참판이 되었고,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가 11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선조실록』 선조 38년 1월 4일 · 6월 4일 · 10월 28일 · 11월 30일] 1606년(선조 39) 1월 예문관 제학을 겸임하였고, 4월 중국 명나라 조사(詔使) 주지번(朱之蕃)과 양유년(梁有年)이 나오자, 신흠이 영위사(迎慰使)가 되어 의주(義州)에 가서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였으며, 돌아와서 특명으로 『황화집(皇華集)』의 서문(序文)을 지었다. 얼마 안 되어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사람들은 신흠이 ‘유아(儒雅)를 즐기고 무사(武事)에는 익숙치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그가 군사에 관한 일을 제대로 잘게 처리하여 사람들이 놀랐다. 9월 병으로 사임하자,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월사집』 권44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 신도비명」]

1607년(선조 40) 3월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가[『선조실록』 선조 40년 3월 23일], 윤6월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이 되었다. 1608년(선조 41) 1월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2월 선조가 승하할 때 신흠 등 7명의 신임하는 조정의 중진들을 비밀히 내전으로 불러서 밀지(密旨)를 내렸다. 내전(內殿)에서 유교(遺敎) 1봉(封)을 내렸는데, 외면에 쓰기를 ‘유영경(柳永慶) · 한응인(韓應寅) · 박동량(朴東亮) · 서성(徐渻) · 신흠(申欽) · 허성(許筬) · 한준겸(韓浚謙) 등 제공(諸公)에게 유교(遺敎)한다.’고 하였고, 그 내용은 나이 어린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보필해 달라는 선조의 몇 마디 부탁이었다. 이들을 ‘유교(遺敎) 7신(臣)’이라고 하는데, 광해군 때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북(大北)에게 큰 박해를 받아서 소북(小北) 유영경 등은 죽음을 당하고 서인(西人) 신흠 등은 유배를 당하였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 4월 문형(文衡)을 맡은 예문관 제학이 되어서[『광해군일기』 광해군 즉위년 4월 1일] 애책문(哀冊文)을 지었다. 5월 그 공으로 특별히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로 가자되어, 한성부 판윤이 되었는데 의금부 지사를 겸임하였다.[『월사집』 권44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 신도비명」] 그해 10월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는데,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그 심문하는 데 참여하는 것을 피하려고 대사헌 신흠이 연거푸 차자를 올려 사직하자, 11월 광해군이 대답하기를, “이같이 연거푸 사직하니 체차하도록 하라.” 하여, 대사헌을 사임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즉위년 10월 29일 · 11월 24일] 1609년(광해군 1) 1월 예조 판서에 임명되어, 중국의 조사(詔使) 웅화(熊化)가 나오자, 신흠이 의주(義州) 영위사(迎慰使)에 임명되어, 의주에 가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1년 1월 19일 · 1월 20일] 9월 성균관 동지사가 되었다가, 11월 중추부(中樞府) 지사(知事)가 되었다. 12월 세자(世子)책봉(冊封)을 청하는 주청사(奏請使)에 임명되어 부사 구의강(具義剛), 서장관 한찬남(韓纘男)과 함께 중국 명나라 북경에 갔다가, 1610년(광해군 2) 4월 책봉을 허락 받고 돌아와서 복명(復命)하였다. 그해 5월 그 공로로써 종1품상 숭정대부(崇政大夫)로 가자되고 노비를 하사받았다. 7월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고 『선조실록(宣祖實錄)』을 수찬하자, 상국 이항복이 총재관(總裁官)이 되고 신흠은 부총재관이 되었다.[『월사집』 권44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 신도비명」] 8월 예조판서에 임명되고, 9월 성릉(成陵)을 봉심(奉審)하였다. 1611년(광해군 3) 4월 경연 동지사가 되었다가[『광해군일기』 광해군 3년 4월 13일], 11월 중추부 지사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이 사형수 박응서(朴應犀)를 사주하여, 박응서는 옥중에서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南)이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고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 고변(告變)하였다. 이에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서 김제남이 하옥되었다가 사사(賜死)되고, 그의 두 아들과 사위까지 죽음을 당하였다. 이 옥사에 연루되어 신흠을 비롯하여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서성, 예조 판서 이정귀(李廷龜), 돈녕부(敦寧府) 지사 김상용(金尙容), 호조 판서 황신(黃愼) 등이 체포되어 형신(刑訊)을 받았다. 이때 신흠이 공초하기를, “신이 김제남과는 과연 같은 해에 조정에 진출하여 서로 알게 된 연분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음관(蔭官)으로 벼슬길에 올랐고, 신은 이른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였기 때문에 친구 간의 의리가 있다고는 하지만, 서로들 빈번하게 왕래하는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국구(國舅)가 되어 부귀하게 된 이후로는 서로 접촉을 하지 않았고, 조정의 반열에서나 만나 보았을 뿐입니다.” 하였다.[『광해군일기』 광해군 5년 5월 17일]

신흠은 고문과 심문을 받으면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가을에 석방되어, 김포(金浦)로 돌아와서, 계부(季父)의 농장(農場)에 우거(寓居)하면서 집에 ‘아라암(何陋菴)’이라는 편액을 내걸었다. 1614년(광해군 6) 2월 동자산(童子山) 아래에 집을 새로 짓고, 5월 거처를 옮겼는데, 집안의 각 방과 마루 등에 이름을 지어 은거(隱居)하는 자기의 심경을 나타내고 시(詩)와 사(詞) 등을 지으면서 살았다. 집안의 실(室)에는 ‘감지와(坎止窩)’, 당(堂)에는 ‘수심당(睡心堂)’, 헌(軒)에는 ‘매월헌(海月軒)’, 재(齋)에는 ‘초연재(超然齋)’라고 편액(扁額)을 걸고 각기 그 명(銘)을 지었다.

1616년(광해군 8) 1월 신흠은 춘천(春川)으로, 한준겸은 충원(忠原)으로, 박동량은 아산(牙山)으로 각기 부처(付處)되었다.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이 ‘유교 7신’을 제거하려는 계략을 따른 것이다.[『속잡록』 권1] 대북의 권신 이이첨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려고 정청(庭請)을 전개하고, 마침내 ‘유교 7신’에게 죄를 더하여, 금부도사(禁府都事)로 하여금 그들을 유배지로 압송(押送)하게 하였다. 신흠은 춘천에 유배되었는데, 그는 배소(配所)에 이르러 우거(寓居)하는 곳을 ‘여암(旅菴)’이라 이름짓고, 유배지에 5년 동안 뜰 밖을 나가지 않고, 은거하면서 살았다. 신흠은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오로지 문학(文學)을 통하여 자기의 괴로운 심정을 달랬다. 1621년(광해군 12) 8월 사유(赦宥)를 받고 김포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1623년 1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기 직전에 부인 이씨(李氏)가 돌아갔다.[『월사집』 권44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 신도비명」]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3월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바로 이조 판서가 되었다. 신흠은 명민하고 진실하며 재주와 식견이 뛰어나 문장이 일가를 이루었으므로, 일찍부터 선비의 명망이 있었는데, <계축옥사> 때 ‘유교 7신’으로 체포되어 유배되었다가 이때에 전장(銓長)에 발탁되었으므로 여망이 흡족하게 여겼다.[『인조실록』 인조 1년 3월 15일] 그해 7월 우의정(右議政)이 되어, 인조에게 시무(時務)를 상소하여 정치를 새롭게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임하면서, 전주(銓注)를 공명정대하게 하여 새로운 인재를 발탁하여, 조정의 분위기를 일신하였다.[『월사집』 권44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 신도비명」]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인조가 그에게 길을 나누어 인목대비를 호위(扈衛)하여 강화도로 들어가도록 명하였으나, 그는 청대(請對)하여 분조(分朝)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강력히 진달하여, 마침내 다같이 공주(公州)로 피난가게 되었다. 환도하고 나서 인조가 호종한 신하들을 책훈(策勳)하려고 하자, 그가 반대하여 그 일이 중지되었다.[『월사집』 권44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 신도비명」] 12월 우의정 신흠이 차자를 올려 체직을 청하니, 인조가 윤허하지 않았다.[『인조실록』 인조 2년 12월 23일] 1625년(인조 3) 우의정 신흠이 병를 앓자, 7월 인조가 내의(內醫)를 보내어 우의정 신흠의 병을 간호하게 하였다.[『인조실록』 인조 3년 7월 4일] 1626년(인조 4) 별시(別試)를 시행할 때 우의정 신흠이 그 시험을 관장하게 되었는데, 그의 아들과 손자가 모두 대과(大科)에 응시하자, 그가 인혐(引嫌)하고 우의정을 고사(固辭)하였으나, 인조가 전시(殿試)에는 친혐(親嫌할 것이 없다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1627년(인조 5) 1월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나라가 위급해졌으므로, 그를 좌의정(左議政)에 임명하여 세자(世子) 사부(師傅)를 겸임하게 하고, 세자를 받들고 분조 거느리게 하였는데, 전주(全州)에 이르는 도중에 두 번이나 차자(箚子)를 올려서 적을 토벌하는 방법을 진달하였다. 9월 영의정(領議政)에 승진되어 세자 사부를 겸임하였다.[『인조실록』 인조 5년 9월 4일] 이때 병란을 겪은 뒤로 공사(公私) 간에 재정이 고갈되었는데, 영의정 신흠이 청하여 관직에 있는 자는 모두 포목을 내어 군수(軍需)를 돕게 하고, 솜옷을 내어 옷이 없는 서로(西路)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다.[『월사집』 권44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 신도비명」] 9월 영의정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였으나, 인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1628년(인조 6) 6월 29일 병으로 서울의 집에서 영의정 신흠이 돌아갔는데, 향년이 63세였다.[『인조실록』 인조 6년 6월 29일 「신흠 졸기」] 문집으로는 『상촌집(象村集)』이 있으며, 편저로는 『상촌야언(象村野言)』, 『승국유사(勝國遺事)』, 『현헌선생화도시(玄軒先生和陶詩)』, 『낙민루기(樂民樓記)』, 『황화집령(皇華集令)』 등이 있다.[『임하필기』 권18, 『청장관전서』 권56]

[상촌 신흠의 문학 세계]
상촌 신흠의 문장은 유학의 육경(六經)에 근본을 두었다. 붓을 잡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글을 지었는데, 마치 생각하지도 않고 글을 쓰는 듯 하면서도 노련하게 건전하고 무게 있는 글을 만들어 내었으나, 전혀 하자(瑕疵)가 없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상촌 신흠은 문장(文章)이 시(詩)보다 낫다.”고 하지만, 월사(月沙) 이정귀는 평하기를, “그의 시는 더욱 조촐하고 깨끗하여 우아한 취향이 있으며, 남의 글을 모방하여 짓지 않고 자신만의 경지를 개척하였으니, 역시 시가 문장보다 낫다고도 말할 수 있다. 요컨대, 시와 문장 양쪽 모두 훌륭하여, 문장의 대가(大家)의 위치를 차지했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월사집』 권44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 신도비명」] 중국 명나라 문장가 진근(陳瑾)이 『상촌집』 서문에서, “상촌 신흠의 여러 가지 체(體)의 시(詩)를 읽어보니, 중국 문장가의 수준에 육박하였고, 『주역(周易)』에 더욱 정통하여, 그의 오묘한 말들은 송(宋)나라 소옹(邵雍)의 글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나는 그의「화도시(和陶詩)」의 세속을 초월한 고상함과 맑은 운치를 유독 좋아하는데, 이 글은 심지어 소식(蘇軾)을 학우(學友)로 삼고 도연명(陶淵明)을 스승으로 삼으려고까지 하였으니, 그의 생각이 깊었다.” 하였다.[『상촌집』 서문]

신흠은 훈고(訓詁)나 전주(箋註)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중국 송(宋)나라 정호(程顥)와 소옹(邵雍)의 학문과 문장을 더욱 사모하였다. 만년에 유배당하여 더욱 더 세상일을 떨쳐버리고 경전(經傳)에 깊이 몰입하던 중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를 읽다가 홀연히 깨우쳐 스스로 『선천규관(先天窺管)』을 지었는데, 그 뒤에 소옹의 글인 『소자전서(邵子全書)』를 얻어서 비교해 보니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고 한다.[『월사집』 권44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 신도비명」]

상촌 신흠은 조선 중기 4대 문장가 중 한사람이다. 조선 중기 문학을 논할 때 흔히 ‘월상계택(月象谿澤)’의 정통 문학을 일컫는데, 이는 월사 이정귀, 상촌 신흠, 계곡(溪谷) 장유(張維),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글을 말한다. 김창협(金昌協)은 『농암집(農巖集)』에서, “상촌 신흠은 타고난 재주가 민첩하고 묘하나, 성품의 깊고 두터운 점이 부족한 데다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전국책(戰國策)』을 배우고, 또 명나라의 대가들을 좋아하였다. 그 때문에 그의 문장은 뛰어나게 아름다운 기품이 있고, 광채가 찬란한 반면에, 꾸밈없이 진실한 뜻과 의미심장한 맛이 부족하다. 월사 이정귀는 타고난 재주가 아름답고 넉넉하나, 청고(淸高)함과 간결함이 부족한 데다, 옛사람의 규범에 얽매이지 않아 문장을 짓기를 매우 쉽게 하였다. 그 때문에 그의 문장은 변화가 있고, 통창하여 난삽하고, 궁색한 모습이 전혀 없는 반면에, 체재에 엄격함이 부족하고, 격조가 고아하지 않다. 이 두 문장가의 장단점은 대체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다.[『농암집』 권34 「외편(外篇)」]

신흠은 젊어서는 호를 현헌(玄軒), 또는 상촌(象村)이라고 하였는데, 만년에는 현옹(玄翁)이라 하였고, 시골에 돌아가서 살 때에는 방옹(放翁)이라 일컬었으며, 유배되었을 때에는 여암(旅庵)이라는 편액(扁額)을 내걸기도 하였다. 호가 많았던 것은 그의 파란만장한 삶에 있어서 처해진 환경에 따라 그의 심정을 나타낸 것이고, 또 그때마다 그의 글도 달라졌다. 저술로는 『상촌집(象村集)』 33책, 『화도시(和陶詩)』 3책, 『구정록(求正錄)』 1책, 『선천규관(先天窺管)』 1책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월사집』 권44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 신도비명」] 신흠의 『야언(野言)』에 나오는 7언(言) 절구(絶句) 한시(漢詩)를 소개하면, “오동나무는 천년을 늙어도 항상 그 곡조를 간직하고,[桐千年老恒藏曲] 매화는 한평생 찬 겨울에 피지만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 달은 천번을 이지러지더라도 그 본바탕은 남아 있으며[月到千虧餘本質] 버드나무는 백번 꺾이더라도 또 새 가지가 돋아난다.[柳經百別又新枝]” 이다. 이는 신흠이 귀양갔을 때 변하지 않는 자기의 지조와 꺾이지 않는 절개를, 오동나무 거문고[棟], 매화 향기[梅], 본바탕이 변치 않는 달[月], 꺾이지 않는 버드나무[柳]에 비유하여 읊은 것이다. 당시 사색당파에서 정적(政敵)을 해오라기에 비유하여 읊은 유명한 시조를 보면, “냇가의 해오라비 무슨 일로 서 있는가. 무심(無心)한 저 고기를 여어 무엇하려는가. 두어라. 한 물에 있거니, 여어 무엇하리오.” 하여, 당파 싸움에서 무심한 사람들을 해치는 정적을 풍자하였다. 냇가에서 고기를 잡아먹으려고 엿보는 해오라기에게 한 물에 살고 있는 나약한 물고기를 엿보지 말라고 하소연하였는데, 이는 당시 조정에서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 이후에 동인과 서인의 거물들이 같은 조정에서 애매한 사람들을 서로 해치려고 하던 시대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만년에 벼슬을 떠나서 산촌에 은거하면서 한적한 생활을 읊은 시조를 보면, “산촌(山村)에 눈이 오니, 돌길이 묻혔어라. 싸리문[柴扉]을 열지 마라. 날 찾을 이 뉘 있으리. 밤중만 일편명월(一片明月)이 긔 벗인가 하노라.” 하여, 벼슬에서 떠나서 산촌에 은거한 사람의 한적한 생활을 운치있게 그려냈다. 길은 벼슬길을 나타내고, 싸리문은 세상과 통하는 세속의 문이고, 밤중은 세상과 인연을 끊은 은자의 정적인 셰계를 나타내고, 밝은 조각달은 은자(隱者)가 자연에서 느끼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즐거움을 표현한 것이다.

[성품과 일화]
신흠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품이 고매하고 도량(度量)이 화아(華雅)하였으며, 장중(莊重)하고 간결(簡潔)한 동시에 영특한 자질이 숙성(夙成)하였다고 한다. 태어나면서 모습이 남달랐고 눈동자는 샛별처럼 빛났으며 어릴 때 노는 것도 범상치 않았다. 7세 때 어머니가 송도(松都)에서 세상을 떠나고, 얼마 안 되어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으므로, 외조부 참찬 송기수가 데려다가 길렀다. 외조부 송기수가 글을 가르쳤는데, 워낙 총명하고 뛰어나서 번거롭게 가르쳐 주지 않아도 문의(文義)가 저절로 깨우쳐서 날로 진보하였다. 송씨 집안에는 원래 서적이 많았는데, 그가 입실(入室)하여 조용히 책을 보면서 침식(寢食)까지도 잊을 정도였으며, 경전(經傳)과 자사(子史)를 두루 열람한 뒤에는 상위(象緯)ㆍ율력(律曆)ㆍ산수(算數)ㆍ의복(醫卜) 등의 책까지도 틈틈이 읽었다.[『월사집』 권44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 신도비명」] 15세 때 청강 이제신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다. 청강 이제신은 『주역(周易)』에 정통하기로 이름이 났었는데, 어린 신흠이 『주역』을 배우기를 청하자, 청강 이제신이 몇 괘(卦)를 강(講)하다가, 경탄하면서 말하기를, “노부(老父)가 감히 사석(師席)을 감당치 못하겠다.” 하였다.

신흠은 벼슬길에 나가서는 서인 이이와 정철을 옹호하다가, 동인의 배척을 받았다. 1583영(선조 16) 삼사(三司)에서 율곡 이이를 매우 준엄하게 논죄할 때, 그의 외삼촌 송응개(宋應漑)가 당시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이이를 탄핵하는 글을 그에게 보여 주자, 그가 그 글을 보고 말하기를, “율곡은 사림(士林)의 중망(重望)을 받는 분인데 이처럼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대사간 송응개는 잠자코 있었으나, 속으로 매우 괘씸하게 여겼다. 그의 외갓집 외4촌 형제들이 신흠이 이이의 편을 편든다고 크게 비방하였다. 왜냐하면, 대사간 송응개는 동인의 중진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 신흠은 서인으로 활동하였는데, 1604년(선조 37) 기자헌(奇自獻)이 일찍이 신흠의 벼슬이 침체되어 있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서, 유대정(兪大禎)을 시켜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에게 부탁하여 앞날의 벼슬길을 열어 주려고 하였다. 그런데 영의정 유성룡이 말하기를, “신흠은 계미년(1583년)에 그의 외삼촌 송응개를 무함하여 귀양가게 하였으니, 사람됨이 무상(無狀)하여 앞길을 트이게 할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선조실록』 선조 36년 4월 25일]

형제끼리 우애가 있고 친족과 화목하는 것은 지성(至誠)에서 나왔다. 과부가 된 누나와는 30년 동안 함께 살면서 어머니처럼 섬겼다. 그는 궁중의 왕가와 혼인을 맺으면서부터 항상 근신하며 두려움을 가하였다. 맏아들 신익성이 옹주를 맞아들일 때 옛 집이 좁고 누추하다고 하여 해당 관청에 관례에 따라 수리해줄 것을 청하였는데, 그가 말하기를, “집이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예를 행하기에는 충분하다.” 하고, 끝내 기둥 하나도 바꾸지 않았다. 침실이 있는 처마가 기울어져 집안사람들이 고쳐줄 것을 청하였으나, 그는 말하기를, “나라 일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집안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빈곤한 생활에도 편안히 살면서 전혀 기호(嗜好)나 욕심이 없었으며, 일찍이 집안일에 신경을 쓴 적도 없었다. 산나물에 좁살밥[脫粟飯]을 곁들여 먹어도 괴롭게 여기지 않았다. 사람들과 어울려 찾아가 만나보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와 문을 닫아걸고 있으면 일개 한사(寒士)의 집안처럼 쓸쓸하였다.[『월사집』 권44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 신도비명」]

대제학에게는 주문연(主文硯)이라 하여 대제학의 상징 벼루가 주어졌는데, 교체될 때에는 마치 선가(禪家)의 의발(衣鉢)처럼 후임자에게 전해 주곤 하였다.[『계곡만필』 권2] 원래 주문연은 남곤(南袞)으로부터 이행(李荇)에게 전해진 뒤 서로 전해 내려오다가 이덕형(李德馨)에 이르러 <임진왜란> 때 잃어버렸다. 그런데 명나라 군대가 이를 얻어서 가져다가 단지를 괴는 돌로 쓰는 것을 우리나라 사람이 보고서 도로 가져와 홍문관에 둠으로써 다시 전해지게 되어 이이첨에 이르렀다. 이이첨이 패망하게 되자 다시 잃어버렸는데, 신흠이 대제학으로 있을 적에 안동(安東)의 마간석(馬肝石)으로 다시 큰 벼루 하나를 만들어 ‘전심연(傳心硯)’이라고 하였다.[『임하필기』 권22]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에 있고,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월사집(月沙集)』 권44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신도비명(領議政贈諡文貞申公神道碑銘)」] 지금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영동리에 있는데, 부인 전의 이씨와 합장한 단분(單墳)이고, 경기도 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절도사(節度使)이제신(李濟臣)의 딸인데, 자녀는 2남 5녀를 두었다. 장남 신익성(申翊聖)은 선조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에게 장가들어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고, 차남 신익전(申翊全)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참판을 지냈다. 장녀는 현감 박호(朴濠)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문과 출신의 좌랑 조계원(趙啓遠)에게 시집갔으며, 3녀는 전적 박의(朴漪)에게 시집갔고, 4녀는 시직(侍直) 강문성(姜文星)에게 시집갔으며, 4녀는 참봉(參奉)이욱(李旭)에게 시집갔다.[『월사집』 권44 「영의정 증시문정 신공 신도비명」]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간이집(簡易集)』
■ 『계곡집(谿谷集)』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고봉집(高峯集)』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축록(己丑錄)』
■ 『농암집(農巖集)』
■ 『동계집(桐溪集)』
■ 『동사강목(東史綱目)』
■ 『동춘당집(同春堂集)』
■ 『매천집(梅泉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묵재일기(黙齋日記)』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사집(白沙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사계전서(沙溪全書)』
■ 『삼봉집(三峯集)』
■ 『상촌잡록(象村雜錄)』
■ 『상촌집(象村集)』
■ 『서계집(西溪集)』
■ 『서애집(西厓集)』
■ 『석주집(石洲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성호사설(星湖僿說)』
■ 『속잡록(續雜錄)』
■ 『송도기이(松都記異)』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아계유고(鵝溪遺稿)』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암집(燕巖集)』
■ 『오음유고(梧陰遺稿)』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우계집(牛溪集)』
■ 『우복집(愚伏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일사기문(逸史記聞)』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정무록(丁戊錄)』
■ 『종묘의궤(宗廟儀軌)』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 "서(靑莊館全書)』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하곡집(霞谷集)』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 『한수재집(寒水齋集)』
■ 『해동역사(海東繹史)』
■ 『혼정편록(混定編錄)』
■ 『홍재전서(弘齋全書)』
■ 『겸재집(謙齋集)』
■ 『계당집(溪堂集)』
■ 『계음집(溪陰集)』
■ 『고담일고(孤潭逸稿)』
■ 『관란유고(觀瀾遺稿)』
■ 『낙전당집(樂全堂集)』
■ 『도곡집(陶谷集)』
■ 『동강집(東岡集)』
■ 『만오집(晩悟集)』
■ 『문곡집(文谷集)』
■ 『북저집(北渚集)』
■ 『백암집(柏巖集)』
■ 『백주집(白洲集)』
■ 『백헌집(白軒集)』
■ 『오리집(梧里集)』
■ 『약포유고(藥圃遺稿)』
■ 『월사집(月沙集)』
■ 『은봉전서(隱峯全書)』
■ 『죽천집(竹泉集)』
■ 『지천집(遲川集)』
■ 『지호집(芝湖集)』
■ 『청강집(淸江集)』
■ 『추파집(秋坡集)』
■ 『추포집(秋浦集)』
■ 『춘정집(春亭集)』
■ 『충암집(冲庵集)』

■ [집필자] 이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