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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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유중(閔維重)

서지사항
항목명민유중(閔維重)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왕족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630년(인조8)~1687년(숙종13) = 58세]. 조선 후기 효종~숙종 때의 문신. 숙종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아버지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이다.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관찰사 민광훈(閔光勳)이고, 어머니 연안이씨(延安李氏)는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경주부윤(慶州府尹) 민기(閔機)의 손자이고, 대사헌 민시중(閔蓍重)과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의 동생이다.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고, 송준길의 사위이다.

[효종 시대 활동]
1648년(인조26)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0년(효종1) 증광(增廣) 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1세였다.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에 들어가서 검열(檢閱) · 대교(待敎) ·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는데,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를 겸임하였다. 1653년(효종4)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고, 사헌부 감찰(監察)로 옮겼다가 예조 · 병조의 좌랑(佐郞)으로 옮겼다.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상기를 끝마치고 1655년(효종6)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으며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를 겸임하였다. 1656년(효종7) 병조의 낭관(郎官)을 거쳐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고 시강원 사서를 겸임하였다. 마침 흉년이 거듭되므로 이보다 앞서 조정에서 1천 휘[斛]의 쌀을 저자 백성들에게 빌려 주고 가을철에 돈으로 갚게 하였다. 그러나 당시 돈이 시중에 잘 돌지 않아서 원래대로 쌀로 거두어 들였는데, 민유중(閔維重)이 이것은 백성들을 속이는 것이라고 비난하며 묘당(廟堂)의 대신들을 공격하니, 대신들이 모두 사퇴하였다.

그때 장령(掌令)오두인(吳斗寅)과 함께 낭성군(朗善君: 선조의 손자) 이우(李俁)의 종을 체포하여 살인 혐의를 심문하던 가운데 그 종이 죽었다. 효종이 낭성군의 말을 듣고 매우 노하여, 오두인은 북청 판관(北靑判官)으로, 민유중은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좌천시켰다. 그가 급히 경성으로 떠날 때 아버지 민광훈은 “집에서 멀리 떠나는 것을 염려하지 말고, 고을을 어떻게 잘 다스릴까를 염려하라.”고 타일렀다. 그가 경성에서 선정(善政)을 베풀고 효제(孝悌)의 도리로써 고을 자제들을 가르치니, 온 고을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였다. 이듬해 특별히 효종의 용서를 받고 예조 정랑에 임명되어 돌아올 때 온 고을 사람들이 수레를 막고 울면서 작별하였고 고을 안에 송덕비(頌德碑)를 7개나 세웠다. 1658년(효종9)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헌납(獻納)으로 옮겼다. 1659년(효종10)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고, 중학(中學) 교수(敎授)를 겸임하였다. 이때 암행어사(暗行御史)에 임명되어 경상도의 민정을 염찰하던 중에 효종이 갑자기 승하하여 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효종이 청나라에게 당한 치욕을 씻으려고 북벌(北伐)을 계획할 때 그가 여러 가지 계책을 올리지 않은 날이 없었고 하루에도 10여 가지 이상을 진언(進言)하기도 하였는데, 효종이 모두 받아들였다고 한다.

[현종 시대 활동]
1659년(현종즉위)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교리(校理)로 옮겼다. 이무렵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상기(喪期)를 끝마치고 1662년(현종3)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는데, 이때 의주부윤(義州府尹) 이시술(李時術)이 청나라와 분쟁을 일으켜서 위기가 고조되었다. 그가 비밀히 구제할 방책을 진언하여 변방의 안정을 되찾았다. 이후 그는 벼슬을 그만두고 여주(驪州)로 돌아갔는데, 그 사이에 이조의 낭관과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663년(현종4) 홍문관 부응교(副應敎)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 사간(司諫)을 거쳐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 대사헌 송준길이 그의 장인이었으므로, 상피(相避) 관계에 있다고 하여 면직되었다. 곧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는데, 정언 이혜(李嵆)가 그의 처남이었으므로, 이번에도 상피 관계라는 이유로 체임되었다. 그 결과 각도의 도사(都事)들이 부임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이는 사간원에서 도사를 서경(署經)할 때에는 반드시 세 사람이 구비되어야 하는데 그가 사간원에 출사하지 않아 두 사람만이 서경하였기 때문이었다.

1664년(현종5) 암행어사(暗行御史)에 임명되어 평안도의 민정을 염찰(廉察)하였고 돌아와서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 이어 사헌부 집의로 옮겼고, 사도시(司䆃寺) 정(正)을 거쳐 다시 홍문관 응교에 임명되었다. 1665년(현종6) 의정부 사인(舍人)을 거쳐,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1666년(현종7) 중추부 첨지사에 임명되었고, 장례원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고,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승문원 부제조(副提調)를 겸임하였다. 1667년(현종8)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부제학으로 옮겼고, 형조 참의를 거쳐 우승지에 임명되었다. 1668년(현종9)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671년(현종12)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송사를 심리하고 결단하는 것이 귀신같아서 옥중이 거의 비었다. 1672년(현종13)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으로 승진하였고,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 옮겼으며 세자 우빈객(右賓客)이 되었다. 이때 그의 장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이 죽었다. 1673년(현종14) 호조 판서가 되었고, 총융사(摠戎使)를 겸임하였다. 1674년(현종15) 청나라 사신의 원접사(遠接使)로 임명되어 의주(義州)로 갔는데, 복명하기 전에 현종이 갑자기 승하하였다.

[숙종 시대 활동]
1675년(숙종1)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에 임명되었고, 총융사를 겸임하였다. 그러나 남인 윤휴(尹鑴) · 허적(許積) 등이 정권을 잡자 좌의정 송시열을 거제도(巨濟島)로 귀양 보내고, 죽은 동춘당 송준길의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였다. 민정중(閔鼎重) · 민유중 형제도 관직을 삭탈(削奪)당하고 성문 밖으로 쫓겨났는데, 그 뒤에 고신(告身)마저 모두 빼앗겼다. 이때에 형제가 충주(忠州)로 내려가서 가까운 곳에 살았는데, 필마(匹馬)로 왕래하면서 술을 마시고 강설(講說)하는 것을 지극한 즐거움으로 삼으니, 배우려는 향리(鄕里)의 자제들이 매우 많았다. 1677년(숙종3) 숙종이 민유중의 문외출송(門外出送)을 풀어주도록 명하여 이듬해 봄에 사유(赦宥)를 입고 풀려나서 직첩(職牒)을 돌려받았다. 그 뒤에 숙종이 두 번이나 민유중을 서용하라고 명하였으나, 남인들이 반대하여 저지당하였다. 1679년(숙종5) 남인들은 민정중을 장흥(長興)에, 민유중을 흥해(興海)로 각각 귀양보냈다. 그는 흥해로 귀양가서 문밖에 나오지 않고 종일 글을 읽으면서 세월을 보냈다. 귀양간 지 6개월 만에 민정중과 민유중 형제는 귀양에서 풀려나 충주의 옛 집으로 돌아왔다.

1680년(숙종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서 남인 허적과 윤휴가 처형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자, 민정중은 우의정이 되었다. 민유중은 공조 판서에 임명되어 경연 지사를 겸임하다가, 호조 판서로 옮겨 선혜청(宣惠廳) 당상관을 겸임하였다. 도총관(都摠管)을 거쳐 의금부 판사에 임명되었을 때, 허견(許堅)이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枏)을 옹립하려고 불궤(不軌)를 도모한 옥사가 일어나서, 왕명을 받고 역모한 정상을 자세하게 밝혀내어 숙종의 신임을 받았다. 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승하하자, 국장도감(國葬都監) 제조(提調)가 되어 국장을 치렀는데, 그 공으로 정1품하 보국 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승품하였다. 도총관(都摠管)을 거쳐, 병조 판서가 되었다. 1681년(숙종7) 3월에 그의 둘째 딸이 숙종의 왕비로 간택되어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되자, 그는 관례에 따라 돈녕부(敦寧府) 영사(領事)에 제수되고, 여양부원군에 봉해졌다. 1683년(숙종9) 겨울에 숙종이 두진(痘疹)을 앓았는데, 왕명을 받고 직숙(直宿)하였다. 1684년(숙종10) 왕궁의 호위를 맡아보는 금위영(禁衛營)을 창설하여 호위대장(扈衛大將)을 맡고 또 오위도총부 총관(摠管)을 겸임하였는데, 외척이 병권을 오로지한다는 비난이 일어나자 일체의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평소에 풍담(風痰)을 앓았는데 1687년(숙종13) 여름에 그 병이 재발하였다. 숙종이 명의(名醫)를 보내어 돌보게 하였으나 그해 6월 29일 안국방(安國坊) 사제(賜第)의 정침(正寢)에서 58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경서에 밝았는데, 저서로는 『민문정유집((閔文貞遺集)』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민유중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기상과 외모는 장중하고 번듯하며, 풍채가 빼어나고 빛났다. 성격은 강직하고 천성이 총명하여 사리에 통달하였다. 그는 중형 민정중과 함께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에게 경학(經學)을 배우고 벼슬길에 진출하여 사림(士林)들의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그는 후학들을 격려하여 반드시 학업을 성취시켰으며, 그가 미처 그들을 천거하지 못할까봐 항상 염려하였다. 조정에서 벼슬할 때에는 언론이 준엄하여 공론(公論)을 주도하였고, 집에서는 예법(禮法)을 지키고 상스러운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자제들을 가르칠 때에는 법도를 엄격하게 하였으므로, 감히 그 앞에서는 누구도 실없이 말하거나 웃지 못하였다. 그 기상이 엄숙하여 곧으며 정숙하고 우아하였다. 노년에 지위와 명성이 더욱 높아졌으나, 가난한 선비처럼 겸손하게 행동하였고, 숙종의 국구(國舅)가 되어서도 의복이나 탈 것을 바꾸지 않았다.

그의 총명함과 관련된 일화가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임금이 피난갈 곳이라고 소문이 난 강화도로 모두 피난을 갔다. 그는 임금이 이르는 곳이라면 적도 이를 수 있다며, 다른 곳으로 피난 갈 것을 주장하였다. 7세 아이의 말이었으나 어머니 이씨가 기특하게 여기고 가족을 데리고 영남으로 피난을 가서 모두가 무사하였다고 한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 동쪽 섬악리(蟾樂里) 언덕에 있는데, 부인 이씨와 송씨가 그의 무덤 곁에 묻혔다. 그의 후배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효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고, 장흥의 연곡서원(淵谷書院), 벽동의 구봉서원(九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첫째 부인 덕수이씨(德水李氏)는 이조 판서 이경증(李景曾)의 딸로 자녀가 없었고, 둘째 부인 은진송씨(恩津宋氏)는 동춘당 송준길의 딸로 자녀는 2남 3녀를 두었으며 셋째 부인 풍양조씨(豊壤趙氏)는 진사(進士) 조귀중(趙貴中)의 딸로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다. 장자 민진후(閔鎭厚)는 문과에 급제하여 참찬(參贊)을 지냈고, 차자 민진원(閔鎭遠)은 문과와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좌의정을 지냈다. 민진후 · 민진원과 인현왕후(仁顯王后)는 송씨의 소생으로 송준길의 외손이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문정공유고(文" 貞公遺稿)』
■ 『경세유표(經世遺表)』
■ 『동춘당집(同春堂集)』
■ 『명의록(明義錄)』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호전서(白湖全書)』
■ 『서계집(西溪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암집(燕巖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한수재집(寒水齋集)』
■ 『홍재전서(弘齋全書)』

■ [집필자] 이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