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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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성휘(閔聖徽)

서지사항
항목명민성휘(閔聖徽)
용어구분인명사전
분야정치·행정가
유형인물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총론]
[1582년(선조15)∼1647년(인조25) = 66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의 문신. 초명은 민성징(閔聖徵). 자는 사상(士尙), 호는 졸당(拙堂) · 용졸(用拙)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호조 정랑 민유부(閔有孚)이고, 어머니 해주정씨(海州鄭氏)는 우승지(右丞旨) 정척(鄭惕)의 딸이다. 돈녕부(敦寧府) 도정(都正)민유경(閔有慶)의 5촌이고, 호조 좌랑 민성도(閔聖徒)의 형이다.

[광해군 시대 활동]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어 다른 형제들과 함께 5촌 당숙 민유경의 집에서 자랐다. 1606년(선조39) 사마시에 합격하고, 1609년(광해군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8세였다.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고, 행 호군(護軍) · 사용(司勇)을 지냈으나, 조정 내의 부조리를 보고 외직으로 나가기를 자청하여, 함경도도사(咸鏡道都事)에 임명되었다. 1611년(광해군3) 조정으로 돌아와서 예조 · 공조 · 형조의 낭관을 역임하고, 이듬해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에 임명되었다. 1613년(광해군5) 공조 좌랑이 되었다가, 이듬해 영변부통판(寧邊府通判)으로 나갔다. 당시 그의 외4촌 정조(鄭造)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는 논의를 주도하면서 그에게 참여를 권유하였으나,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1617년(광해군9) 관직을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강원도관찰사가 그가 도사(都事) 재직 중에 군사 제도를 개혁한 공로를 조정에 보고하여,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되고 금산군수(錦山郡守)에 임명되었다. 1620년(광해군12) 벼슬에서 물러나 전원으로 돌아왔으나, 곧 여주목사(驪州牧使)에 임명되었다. 그때 여가를 이용하여 소암(疎菴) 임숙영(任叔英) · 택당(澤堂) 이식(李植) 등을 초청하여 술자리를 마련하여 시를 지으면서 즐거워하였다. 그는 문필에도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서인으로 반정에 참여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좌부승지 · 우승지로 승진하였다. 1624년(인조2) 경상도관찰사로 나갔을 때,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통제사(統制使)구인후(具仁垕)가 경상도 양산(梁山)에서 귀양살이하고 있는 권진(權縉)이 이괄에게 호응할까 두려워 관찰사 민성휘에게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반란이 진압된 뒤에 민성휘는 왕명을 받지 않고 재상을 마음대로 죽였다고 하여 파직되었다가, 1625년(인조3)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전주(全州)에 내려갔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분조(分朝)가 전주로 내려왔다. 그는 전라도관찰사로 군무(軍務)의 책임을 잘 수행하여 호란이 끝나자 바로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 숭정제(崇禎帝)가 새로 즉위하자, 등극사(登極使)의 부사(副使)가 되어 뱃길로 중국 명나라 연경(燕京: 북경)에 다녀왔다.

그 후 안동부사(安東府使)가 되었다가 1630년(인조8)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어 부체찰부(副體察府)를 겸임하였는데, 실제로 8도의 군사를 총괄하였다. 1631년(인조9) 명나라 패잔병 출신 도독(都督) 모문룡(毛文龍)이 평안도 가도(椵島)를 점거하고 조선에 군량미 1천 휘[斛]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가 현지에 가서 모문룡을 설득하여 그의 무모한 요구를 철회시키고 소량의 식량을 원조하기로 합의하였다. 1633년(인조11) 평안도관찰사의 임기가 차게 되었으나,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요청으로 그대로 유임되었다. 1634년(인조12)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그는 함경도관찰사로 북병사(北兵使) 서우신(徐祐申)과 함께 함경도의 보병과 기병 1만 3천 명을 거느리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이르렀으나, 이미 인조가 청(淸)나라에 항복한 뒤였으므로, 군사를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1637년(인조15) 다시 평안도관찰사로 임명되어, 양서(兩西) 지방의 관향사(館餉使)를 겸임하였다. 1640년(인조18) 척화파로 지목되어 심양(瀋陽)에 잡혀갔다가 2년 만에 귀국하였다. 1642년(인조20)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1643년(인조21) 호조 판서가 되었는데,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管)을 겸임하였다. 1645년(인조23) 형조 판서가 되었다가, 이듬해 내의원(內醫院) 제조(提調)가 되었다. 1647년(인조11) 사은사(謝恩使)의 부사에 임명되어 청나라 연경에 가는 도중에 영평부(永平府)에서 병이 났으나, 무리하게 여행을 하여, 연경에 도착하자마자 그해 12월 27일 병사하였는데, 향년이 66세였다.

저서로는 『송경방고록(松京訪古錄)』이 있다.

[성품과 일화]
민성휘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성품은 강직하고 청렴하여, 신의와 지조를 지켰다. 또한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직설적이어서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인조에게 직언(直言)하였는데, 어떤 때는 자기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고 격앙된 어조로 말하였으므로, 처음에는 인조도 감동하여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소청(所請)을 들어주었으나, 나중에는 임금도 감정이 상하여 자주 파직시켜 내쫓았다. 또 재상의 잘못도 임금에게 곧잘 아뢰었으므로 재상들도 그를 몹시 싫어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직언을 하여, 직언을 잘 하는 재상으로 유명해졌다. 또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어렵고 힘든 일을 처리하는 데에 뛰어났다. 명 · 청 교체기에 그는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외교의 중책을 맡아서, 어려운 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음성과 얼굴빛이 동요되지 않고 순식간에 그 상황에 맞도록 처결하였다.

그가 후금(後金)의 차사(差使) 용골대(龍骨大)를 맞아 협상을 논의할 때 청어(淸語) 역관(譯官) 정명수(鄭命壽)가 온갖 횡포를 부려서 말썽을 일으켰다. 민성휘가 “이웃 나라와의 교제는 믿음으로 해야 하는데, 너 때문에 이것이 허물어지게 되었으니, 반드시 네놈 목을 베어야만 화의(和議)가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그를 꾸짖으니, 정명수가 조선의 조정에서 오직 민성휘만을 무서워하였다.

1627년(인조5)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후금의 요동 점령으로 육로(陸路)가 막혀서 등주(登州) · 내주(萊州)로 가는 바닷길 수천 리를 배를 타고 갔다. 도중에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될 뻔하여 모두가 어쩔 줄 몰라 하였으나 그는 태연하였다. 이를 두고 계곡(溪谷) 장유(張維)는 “바다를 건너가는데 오직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사상(士尙) 민성휘만이 두렵게 여기는 기색이 없었으니, 나는 그들을 매우 훌륭하게 여긴다.” 하였다.

[묘소와 비문]
시호는 숙민(肅敏)이다. 묘소는 황해도 평산(平山) 수월산(水月山)의 선영에 있는데, 그의 친구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평양(平壤)과 정주(定州)에 그의 생사당(生祠堂)이 있다. 첫째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완양군(完陽君) 이의정(李義貞)의 딸로, 은산현감(恩山縣監)을 지낸 민진량(閔晉亮)을 낳았다. 둘째 부인 한산이씨(韓山李氏)는 장령(掌令)이흡(李洽)의 딸인데, 후사가 없다. 셋째 부인 창원황씨(昌原黃氏)는 진사 황정열(黃庭悅)의 딸로, 딸 2명을 낳았다. 그가 1647년 사행길을 나설 때 두 딸을 잇달아 잃었으나 사적인 슬픔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계곡집(谿谷集)』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미수기언(眉叟記言)』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집(象村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한수재집(寒水齋集)』

■ [집필자] 이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