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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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록(璿源錄)

서지사항
항목명선원록(璿源錄)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보첩(譜牒)
관련어종친록(宗親錄), 유부록(類附錄)
분야왕실
유형문헌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에 왕의 일정한 범위 안에 있는 자손을 수록한 왕실 보첩(譜牒) 가운데 가장 오래된 족보.

[개설]

『선원록』은 조선 초기부터 편찬했으나, 1681년(숙종 7) 이후에 간행한 『선원록』부터 현존한다. 『선원록』은 처음 편찬된 태종대에는 조계(祖系)[태조직계] 만을 기록하였고, 조선후기에 이르러 왕의 일정한 범위 안의 본종(本宗)과 종친, 종녀와 서얼, 즉 역대 왕의 자손을 종친은 9대손까지, 외파(外派)는 6대손까지 수록한 왕실 보첩이다. 『선원록』은 조선 왕실에서 간행한 왕실 보첩류 가운데 가장 오래된 족보이다.

[편찬/발간 경위]
조선 왕실에서는 건국 초 고려 왕실의 전통에 따라 『선원록』을 편찬하였다. 이때 간행된 『선원록』은 왕의 일정한 범위 안에 드는 자손을 본종과 외파, 자녀를 서얼의 구분 없이 모두 수록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1412년(태종 12)에 이와 같은 『선원록』의 편찬 방식이 크게 변화하였다. 태종은 태조의 서형제(庶兄弟)인 이원계(李元桂)와 이화(李和) 등을 『선원록』에 올리면 후사(後嗣)가 혼동될까 염려된다며 다시 족보를 만들게 하였다. 이때부터 왕실의 보첩은 조계(祖系)를 서술한 『선원록』, ‘종자(宗子)’를 서술한 『종친록(宗親錄)』, 종녀(宗女)와 서얼(庶孼)을 서술한 『유부록(類附錄)』으로 구분한 삼록 체제로 편찬되었다[『태종실록』12년 10월 26일].

1428년(세종 10) 10월부터 『선원록』은 10년에 1번 개수하고, 종실 보첩인 『종친록』과 『유부록』은 3년마다 수정하였다[『세종실록』10년 10월 24일]. 그리고 이때 『선원록』의 수록 대상은 왕의 내·외 6대손으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 편찬된 『선원록』은 임진왜란으로 유실되었으며, 1603년(선조 36)에 전주 사고(史庫)의 『선원록』을 저본으로 수정·보완 작업이 시작되어[『선조실록』36년 8월 8일, 『선조실록』36년 8월 8일 7번째 기사], 1606년(선조 39)에 완료되었다. 그 후에도 『선원록』은 여러 차례 수정되었으나 미흡함이 지적되었다. 이에 1676년(숙종 2) 1월 25일에 낭원군(郎原君) 이간(李偘)이 『선원록』 수정을 건의하였으나 실행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이후 1679년에 숙종은 『선원록』을 바로잡는 일을 종부시(宗簿寺) 정(正) 이만봉(李萬封)에게 맡겼다. 그러나 일의 양이 많다고 하여 낭선군(郎善君) 이우(李俁)가 이정청(釐正廳)을 설치하자고 건의하였다. 1679년 9월 12일에도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 창성군 필(昌城君泌), 해령군(海寧君) 이급(李伋) 등이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선원록』을 여러 차례 개수하였으나 여전히 문제가 많음을 세세히 지적하면서 태백산본을 정본으로 삼아 이정(釐正)하자고 건의하였다. 결국 같은 해 10월에 이정청(釐正廳)이 신설되고 도제조에 허적(許積)을 비롯하여 11명의 관원이 임명되어 본격적인 수정 작업이 이루어졌다.

1680년 10월에 21일에 수정 작업을 마친 『선원록』 정본 50권이 완성되었다. 정서(正書)된 『선원록』은 종부시에 보내 4부를 더 베껴서 사고(史庫)에 보관하게 하였다. 이때 완성된 『선원록』은 이전과 달리 각 왕의 자손을 종친은 9대손까지, 외파는 6대손까지 수록하였고, 『유부록』의 수록 대상이었던 종친과 종녀, 서얼도 종합하여 수록하였다. 이후 『선원록』은 영조대까지 3년에 한 번씩 『당대선원록』을 작성하였으나 10년마다 하게 되어 있는 중수(重修)는 하지 않았고, 정조대 이후로는 『당대선원록』조차 작성하지 않았다. 따라서 『선원록』은 1681년에 편찬된 것이 최종본이다.

[서지 사항]
현존하는 『선원록』은 필사본으로 본집 50권, 목록 1권의 총 51책이다.

[구성/내용]
1681년에 간행된 최종본 『선원록』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권1~3은 태조대왕종친록 유록부(太祖大王宗親錄 類錄附), 권4~12는 정종대왕종친록 유록부(定宗大王宗親錄 類錄附), 권13~26은 태종대왕종친록 유록부(太宗大王宗親錄 類錄附), 권27~33은 세종대왕종친록 유록부(世宗大王宗親錄 類錄附), 권33은 문종대왕 유부록(文宗大王 類附錄)과 단종대왕자손록(端宗大王子孫錄), 권34~35는 세조대왕종친록 유록부(世祖大王宗親錄 類錄附), 권36은 덕종대왕종친록 유록부(德宗大王宗親錄 類錄附)와 예종대왕종친록 유록부(睿宗大王宗親錄 類錄附), 권37~44는 성종대왕종친록 유록부(成宗大王宗親錄 類錄附), 권45~49는 중종대왕종친록 유록부(中宗大王宗親錄 類錄附), 권49에는 명종대왕종친록(明宗大王宗親錄)도 수록되었으며, 권50에는 선조대왕종친록 유록부(宣祖大王宗親錄 類錄附), 원종대왕종친록 유록부(元宗大王宗親錄 類錄附), 인조대왕종친록 유록부(仁祖大王宗親錄 類錄附), 효종대왕 유록부(孝宗大王類附錄), 현종대왕 유부록(顯宗大王 類附錄) 등이 수록되어 있다.

목록(目錄)은 1책인데 수록된 내용은 이정선원록 서(釐正璿源錄序), 진선원록전(進璿源錄箋), 선원록 범례(璿源錄凡例), 목록, 봉교이정선원록 관원직명(奉敎釐正璿源錄官員職名), 봉교교정선원록 관원직명(奉敎校正璿源錄官員職名) 등이 있다.

1681년에 간행된 『선원록』은 사가(私家)의 족보와 달리 수록 방식과 내용에 큰 차이가 있다. 사가 족보에는 시조부터 족보를 간행할 시점까지의 모든 자녀가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선원록』은 각 왕의 종성(宗姓)은 9대손 외파는 6대손까지 적서 구분 없이 내외자손 모두를 수록하였다.

수록 방식은 한 면에 극항(極行)을 두고 그 아래를 6단으로 나누어 각 왕을 기준으로 6대손을 기록하고, 7대손에서부터 9대손은 각 종파의 마지막 부분에 장을 달리하여 “○○大君(君)派”라고 수록하였다. 공주(公主)옹주(翁主)의 자손인 외손도 선남후녀(先男後女) 형식으로 6대에 이르기까지 적서와 내외손 구분 없이 모두를 수록하였다. 각 왕대별로 대군·공주·왕자군·옹주의 자손 순서로 수록하되, 이들의 자녀는 선남후녀의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극항에 모후(母后)를 기록하여 대군·공주·왕자·옹주의 출생모가 누구인지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종실의 처가 사족이면 씨(氏)라 하고, 가문이 한미한 경우에는 모(某)의 녀(女)라 하였다. 양첩(良妾)과 천첩(賤妾)에게 자녀가 있는 경우에는 년갑(年甲) 즉 나이에 관계없이 양첩 소생의 자녀를 먼저 수록하고, 천첩 소생의 자녀는 다음에 기록하였다. 첩 소생은 출생 순서, 이름(名), 생년 간지(干支), 모(母)의 신분, 모의 이름(名), 배우자의 본관과 성씨, 부(父)의 이름과 관직 등을 기록하였다. 이처럼 『선원록』에는 여성의 이름과 출생 년이 기록되어 있고, 첩녀(妾女) 즉, 첩의 딸인 경우에는 모의 신분과 성명, 딸이 재취로 혼인한 사실, 첩녀가 다시 양반의 첩으로 시집간 사실, 초취와 재취가 있을 경우 자녀의 모 등 사가 족보나 다른 왕실 보첩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기록이 있어 『선원록』은 자료적 가치가 높다.

[참고문헌]
■ 『承政院日記』
■ 『璿源錄釐正廳儀軌』
■ 김일환·원창애·홍우의, 『(장서각 소장)왕실 보첩류 목록 및 해제』민속원, 2010.
■ 성봉현, 「장서각 소장 왕실 보첩류의 종류와 현황」, 『한국학논집』44, 2011.
■ 원창애, 「조선 후기 선원보첩류의 편찬 체제와 그 성격」, 『장서각』17, 2007.

■ [집필자] 성봉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