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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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假吏)

서지사항
항목명가리(假吏)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서원(書員), 일수(日守)
분야사회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에 지방 행정을 수행하는 여러 계층의 향리 중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하층 아전.

[개설]
가리(假吏)는 향리가 부족한 지역에서 행정 실무를 담당하던 양민이나 천민 출신 아전을 의미한다. 조선전기에는 지방 행정을 담당하는 향리 수의 감소를 보충하기 위하여 일반 양민 중에서 서원(書員)이나 일수(日守) 등과 같은 하급 아전을 충당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주로 노비 중에서 가리를 충당하였다가 이후부터는 일반 양민 층에서도 가리를 선발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가리는 ‘가(假)’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임시직 향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향리가 부족한 지역에서 문자를 아는 관노비(官奴婢)를 채용하면서 비롯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향리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그 수가 확대되었는데, 이는 가리직 진출을 통한 피역(避役) 내지 신분 상승을 원하는 민(民)의 입장과 일치된 것이기도 했다.

[조직 및 역할]
가리의 신분은 관노·사노·양인 등 다양했는데, 향리와 일정한 친인척 관계를 가진 경우도 있었다. 가리는 향리와 신분적으로 구분되고 차별을 받았기 때문에 ‘아전의 아전’이라고도 인식되었다. 이러한 가리 층이 점차 향리 층으로 진입하려고 하면서 향리 층은 이들에 대한 차별과 규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변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연산군대에 처음 가리라는 명칭이 보이고[『연산군일기』 10년 윤4월 3일], 영조대에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점으로 보아[『영조실록』 5년 4월 6일] 대개 조선시대 전시기에 걸쳐서 존재했던 계층임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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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필자] 김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