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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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복(武服)

서지사항
항목명무복(武服)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갑의(甲衣), 구군복(具軍服), 군복(軍服), 융복(戎服), 철릭(天翼)
분야생활 풍속
유형의복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무관이 입는 옷을 통칭하는 말.

[개설]
무관의 옷으로 갑옷, 철릭, 구군복 등이 있다. 군복에는 두석린갑(豆錫鱗甲), 두정갑(頭釘甲), 피갑(皮甲), 쇄자갑(鎖子甲), 면갑(綿甲) 등이 있다. 철릭은 조선시대 문·무관이 모두 즐겨 입었던 포이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주로 융복(戎服)으로 입었다. 조선후기에는 소매통이 좁고 활동하기 간편한 의복으로 동다리, 전복, 전대를 갖춘 구군복을 입었다.

[연원 및 변천]
무복(武服)은 무관의 옷으로 갑옷, 철릭, 구군복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군복은 철제 갑주에서 갑옷, 그리고 포제인 철릭, 구군복으로 발전하였는데, 전투방법이나 무기 등의 변천에 따라 기능성을 반영했다. 갑옷이 더 이상 방어의 의미가 없어지자 갑옷 속의 이의(裏衣)에 받쳐 입던 철릭을 융복으로 입게 되었으며, 시간이 지나 실용성이 없어지자 간편한 구군복으로 변하게 되었다.

갑옷에는 두석린갑(豆錫鱗甲), 두정갑(頭釘甲), 피갑(皮甲), 쇄자갑(鏁子甲), 면갑(綿甲)이 있다. 두석린갑은 놋쇠를 고기비늘과 같이 미늘을 겉에서 연철한 것이다. 두정갑은 겉에 두정을 박은 갑옷으로 4~6㎝의 직사각형 철편을 갑옷 안쪽에 넣거나, 두정만을 박은 것도 있다. 피갑은 겉에서 보면 두정만 보이는데 철편 대신 가죽을 3겹 정도 붙여 비늘을 만들어 두정으로 시정한 것이다. 쇄자갑은 1㎝ 정도의 철환을 이어 만든 것으로 속옷으로 사용하였으며,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있는 쇄자갑은 표의로 사용된 것 같다.

무복에 관한 기사는 “동지왕세자조하의(正至王世子朝賀儀) 시 문관은 조복(朝服)을 입고, 무관은 무복을 입는다.”[『세종실록』 오례 가례의식 정지왕세자조하의]고 한 것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다.

제사에 참여한 집사관(執事官)은 모두 무복 차림이었다[『태조실록』 2년 1월 16일]. 제사 지내기 하루 전부터 그날 행사 전까지 헌관 이하 행사할 집사관이 모두 무복을 입는다[『세종실록』 6년 9월 22일], 3각 전에 집사관과 배제관(陪祭官)은 모두 무복을 입는다[『세종실록』 22년 6월 13일] 등의 기사를 통하여 제사에 참여한 집사관이 무복을 입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대소의 행행(行幸)에 시위(侍衛)하는 인원은 모두 무복을 입었고[『성종실록』 2년 2월 18일], 옛날 온천에 행행할 때 어가가 본부(本府)에 들렀는데 복색은 으레 군복을 입었고, 현륭원(顯隆園)에 행행할 때에도 군복을 입었다. 온천에 행행할 때에도 여러 날이 걸리기 때문에 복색을 편리한 대로 따르도록 하는 규례가 있어 평융복(平戎服)을 쓰기도 하고 혹 군복을 쓰기도 했다.

『홍재전서(弘齋全書)』를 살펴보면, 군복의 제도 개선에 관한 기록이 많은데, 계절에 따라 군복을 바꾸어 입는 것을 사치라 하여 금하는 내용, 즉, “별군직(別軍職)선전관(宣傳官) 등이 새로 제수하면 대단(大緞), 갑사(甲紗), 단사(單紗)를 계절에 따라 바꾸어 입는 사치 풍조를 금해야 한다.”는 내용과 군복의 소매 끝에 푸른색 옷감으로 장식하는 것과 군복의 소매가 넓은 것을 금지하는 제도 등에 관한 내용이 있다. 또한, “융(戎)이라는 말은 군(軍)이라는 뜻이다. 융이 군이고 군이 또한 융이니 실은 한 가지이다. 그런데 우리 왕조에서는 융복과 군복이라 하여 이름을 달리하고 제도를 달리하여 한갓 번거로운 형식이 되었으니 자못 의의가 없다.”라고 한 것으로 융복이 군복의 의미와 같음을 알 수 있다.

『만기요람(萬機要覽)』의 군기 목록을 보면, “무명군복[木軍服], 홍색무명쾌자[木綿紅掛子], 황색·홍색 무명호의[黃號衣 木綿黃號衣], 흑색무명협수[黑木甲挾袖] 등이 있다. 제품(祭品)은 각사(各司)에서 마련한다. 헌관(獻官) 중군과 여러 집사 지구관과 기패관은 군복을 입고, 여러 장관 및 마군과 보군의 기총(旗摠)·대총(隊摠)·인기수(認旗手)는 모두 갑주를 갖추고, 영신(迎神)·송신(送神) 및 삼헌(三獻)의 의식에는 모두 포를 쏘고 쇠북[金]을 울리며 크게 취타(吹打)를 연주한다.”라고 하여 군복, 쾌자(快子), 협수(夾袖) 등이 군복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에는 여러 호위하는 관원과 사금(司禁)이 각각 기복(器服)을 입고 모두 합문 밖으로 나아가 사후(伺候)한다는 내용이 있다. 기복은 보통은 기물(器物)과 의복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무관이 입는 군복을 말한다.

[용도]
전투나 제사, 행행 등의 행차 시 몸을 간편하게 움직여야 할 경우 착용하였다.

[참고문헌]
■ 『만기요람(萬機要覽)』
■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
■ 『홍재전서(弘齋全書)』
■ 김정자, 「한국 군복의 변천 연구」, 『대한가정학회지』제24권 4호 , 1986.
■ 박가영, 「조선시대 갑주(甲冑) 유물의 감정을 위한 현황파악과 시대구분」, 『복식』58권 5호 , 2008.
■ 임명미, 「介冑와 軍服과 戎服에 관한 연구」, 『한국의류학회지』3권 1호 ,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