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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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의(鶴氅衣)

서지사항
항목명학창의(鶴氅衣)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포(袍)
관련어심의(深衣)
분야생활 풍속
유형의복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덕망 높은 도사나 학자가 입는 옷으로 흰색이나 청색 바탕에 검정색 선을 두른 포(袍).

[개설]
깃, 앞단, 도련 수구에 검정색 선을 두른 옷으로 덕망 높은 도사나 학자가 편복으로 입었다. 학창의는 심의(深衣)와 같이 두건을 병용하여 정자관(程子冠), 동파관(東坡冠), 와룡관(臥龍冠), 방건(方巾)과 함께 입었다.

[연원 및 변천]
학창의에 대한 기록은 중국 북송 때의 시(詩)인 왕우칭(王禹稱)의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황주죽루기」에는 공사(公事)가 끝나 퇴청한 뒤의 여가에 학창의를 입고 도사들이 쓰는 화양건(華陽巾)을 쓰고서 손에는 『주역(周易)』을 들고 향을 태우며 조용히 앉아 있으면 세상의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고 하였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전 원외랑(員外郎) 곽여(郭輿)가 오건(烏巾)과 학창의 차림으로 금중에서 항상 모시며 조용히 담론하고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금문도객이라고 불렀다.

조선에서는 중기 이후에 비로소 학창의가 보이기 시작한다. 『송자대전(宋子大全)』의 어록을 보면 학창의는 초야에 있을 때 입는 옷으로 야복(野服)이라고 했다. 선생은 평소에 반드시 도포나 심의를 입었으며, 만년에는 학창의를 많이 입었다고 했다. 송시열(宋時烈)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 역시 학창의를 많이 입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조선에서는 학창의가 야복으로 유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한가롭게 지낼 때에는 반드시 와룡관을 쓰고 학창의를 입었는데, 학창의는 사마광(司馬光)의 심의를 모방한 것이라고 했다[『정조실록』 13년 10월 7일]. 와룡(臥龍)은 제갈량(諸葛亮)의 별칭으로 창의란 이름은 제갈량의 학창의에서 시작되었다.

옛날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심의에 검은 연이 있었으며, 당나라 마주(馬周)의 난삼(襴衫)에도 난(襴)과 거(裾)를 달아 선유의 복장을 삼았으니 심의와 난삼은 그 제도가 동일하다. 그런데 지금의 반령착수는 옛날의 심의나 난삼과 제도가 동일하니 바로 유생의 장복이다. 문정공(文正公) 김장생(金長生)이 옛날 선군을 따라 북경에 가 국자감(國子監) 유생들의 유복(儒服)을 보니, 남색 비단으로 의를 만들고 청흑색으로 연을 달았는데 그 연이 소매 끝까지 닿았다고 하였으니, 이 역시 난삼의 유제로 세속에서는 학창의라고 했다.

[형태]
송시열이 입은 학창의는 수박처럼 푸른빛으로 옷깃은 둥글고 소매는 크며, 뒤가 갈라지고 도련에는 검은 연을 두르는데 연의 넓이는 3~4촌이다. 옷자락은 안팎이 없이 전면에 합금되었으며 좌우의 옷깃에 암·수의 끈 몇 개가 있고 허리띠가 없으므로 띠를 두를 때 편리하다고 하였다. 이로써 편복으로 대를 띠지 않고 끈으로 묶는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권상하가 입은 학창의는 포의 제도와 같으면서 매우 큰 것도 있고 오늘날의 쾌자와 같이 작은 것도 있었다.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는 방령의 깃으로 양 깃이 서로 덮이지 않고 가장자리에 흑단을 둘렀다고 했다. 현전하는 학창의 중에는 목둘레에서부터 앞단, 도련, 소매 끝에 5~6㎝ 정도의 검정색 선을 둘렀으며, 뒷고대 20㎝ 아래에서부터 등솔기를 트고 양옆도 20㎝ 정도 터놓은 것이 있다. 이처럼 학창의는 고려부터 조선까지 남자 편복 포로 입었으며 옛날부터 신선이 입는 옷이라고 하여 사대부의 덕망 높은 도사나 학자가 입었다.

학창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옥소(玉所) 권섭(權燮)의 『옥소고(玉所稿)』에서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권섭은 학창의를 도가의 옷이라고 하였으며, 그 제도가 오래 되어 정확하지는 않다고 했다. 따라서 소매가 넓은 것도 있고 좁은 것도 있으며, 소매가 없는 것도 있다고 했다. 색은 청색, 백색, 황색, 흑색으로 되어 있다. 연은 넓이도 다양하고, 흑색과 청색이 있으며, 규격이 정해져 있지 않아 형태가 자유로웠다. 학창의는 대를 띠지 않는 것이 불변이라고 함으로써 야복으로 입었으며, 복건을 써도 좋고 관모와 더불어 입(笠)을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하여 형식에 구애되지 않은 자유로운 옷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학창의의 길을 청색으로 하면 조복(朝服)이나 제복(祭服)의 중단과 같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역시 청색의 학창의를 입고 있는 모습으로 편복이나 야복으로 입을 때에는 학창의의 역할을 하였으며, 제복이나 조복의 받침옷으로 입을 때에는 중단으로 입었다. 흥선대원군의 초상화에는 세조대(細絛帶)를 띠고 있어 편복으로서의 학창의임을 알 수 있다.

학창의는 심의와 형태가 비슷하다고 하나 구체적인 제도에서는 차이가 있다. 심의는 의(衣)와 상(裳)을 따로 재단하여 연결한 상하연속의이나 학창의는 흰 창의에 가장자리에 검은 헝겊으로 넓게 선을 두른 의상연의(衣裳連衣)이다. 깃의 형태는 심의와 같이 직령과 방령이 있다. 초기의 학창의는 야복으로 대(帶)가 없었으나, 후기 유물에는 고름을 맨 후 세조대나 광대(廣帶)로 여며 입었다.

권섭의 학창의를 살펴보면, 색상이나 소재에서 구속이 없이 자유로웠다. 의에는 포(布)·주(紬)·전(氈)을 사용하고, 색상은 흰색·청색·황색·검은색으로 하며, 연은 모단(毛段)이나 검은색 혹은 청색으로 하여 편리한 대로 지어 입었다. 앞 길이가 뒤 길이보다 1촌이 더 길며, 소매와 방령 부분, 앞길과 뒷길의 밑단 모서리 부분에 상침이 놓여 있다. 깃은 본래의 깃 길이 아래에 방령의 형태로 연이어 있으며 깃 위에 동정이 달려 있다. 길의 선단 밑단 부분과 수구 부분에 연이 있으며, 특히 소매의 진동 부분에도 앞뒤에 연이 산 모양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기존의 의복 구성에서 볼 수 없었던 봉제 방법이다. 대나 고름의 자리가 없으며 여밈의 흔적이 없어 입고 벗기 편리한, 말 그대로 야복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용도]
한가로이 있을 때 입는 야복(野服)이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동국통감(東國通鑑)』
■ 『옥소고(玉所稿)』
■ 권오창, 『조선시대 우리옷』, 현암사, 1998.
■ 이민주, 「옥소 권섭의 학창의에 관한 연구-『옥소고』소재 학창의 관계자료를 대상으로」, 『복식문화연구』제13권 2호 , 2005.

■ [집필자] 이민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