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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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사(廣明寺)

서지사항
항목명광명사(廣明寺)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교종(敎宗), 삼십육사(三十六寺)
관련어무학자초(無學自超), 선교양종(禪敎兩宗), 흥덕사(興德寺), 신의왕후(神懿王后), 반승(飯僧), 기일재(忌日齋), 목청전(穆淸殿)
분야문화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세종대 국가에서 공인한 36사(寺) 가운데 하나로, 경기도 개성시에 위치한 절.

[개설]
광명사(廣明寺)는 경기도 개성시 만월동에 위치한 사찰이다. 고려 태조가 사저를 희사하여 창건하였고 담선법회를 비롯한 각종 법회가 열리는 등 고려시대 내내 높은 위상을 가졌다. 조선전기에도 세종대 선교양종의 36사 중 교종 18사에 포함되는 등 사격이 유지되었다.

[연원]
고려 태조가 사저를 희사하여 922년에 창건하였다. 1213년(고려 강종 2) 왕사인 지겸(至謙)이 주석하였고 담선(談禪)법회가 열리기도 했다. 담선법회는 원래 보제사(普濟寺)에서 3년에 한 번 열리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최씨 무인집권기에 광명사와 개성의 서보통사(西普通寺)에서도 개최되었다. 이규보(李奎報)의 「광명사선회설재청설선문(廣明寺禪會設齋請說禪文)」이 전하며, 충렬왕대에는 왕이 절에 행차하여 우란분재(盂蘭盆齋)나 용화회(龍華會) 등의 법회가 열리기도 했다. 공민왕도 몇 차례나 행차하였고, 1370년에는 나옹(懶翁) 혜근(惠勤)에게 공부선(工夫選)을 시행하게 하였다.

[변천]
조선 개국 직후 태조는 양주 회암사(檜巖寺)에 역병이 돌자 왕사인 무학자초(無學自超)를 광명사에 머물게 하였고[『태조실록』 2년 7월 19일], 왕이 직접 행차하거나 대규모의 반승(飯僧) 행사를 거행하였다. 정종대에는 태조가 직접 광명사에서 신덕왕후 강씨의 기일재를 베풀기도 했다[『정종실록』 14년 2월 6일]. 태종대에는 모후인 신의왕후 한씨의 진영을 광명사로 옮겨 봉안하였고[『태종실록』 1년 5월 20일], 곡식을 내려주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

1424년(세종 6) 세종은 기존의 7개 종단을 선교양종으로 나누고 각각 18개씩 36개 사찰만 공인하였는데, 이때 광명사는 교종 18사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광명사는 원래 가지고 있던 토지 100결에 100결이 추가로 지급되어 총 200결을 보유하게 되었고 거주 승려는 100명으로 정해졌다. 절의 규모가 거의 개성의 감로사(甘露寺)와 동일한 수준이었다[『세종실록』 6년 4월 5일]. 다음 해에는 명의 사신이 개성에 머물면서 광명사를 구경하였고 태조의 진영을 모신 목청전(穆淸殿)에 참배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7년 윤7월 14일]. 『세종실록』「지리지」 개성 조항에서는 광명사가 연경궁(延慶宮) 서쪽에 있으며 고려 태조가 이 절을 창건하게 된 이유를 전설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16세기 중반인 명종대에 이르면 광명사는 연복사(演福寺), 왕륜사(王輪寺) 등 개성 내의 오랜 명찰들과 마찬가지로 터만 남아 황폐해진 상태였다[『명종실록』 6년 2월 4일]. 이를 통해 볼 때 고려와 관련이 깊던 광명사는 점차 쇠퇴하여 16세기 전반 이전에 폐사 상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동문선(東文選)』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사찰문화연구원, 『북한사찰연구』, 한국불교종단협의회, 1993.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여말선초 대불교시책』, 일조각, 1993.
■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 [집필자] 김용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