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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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굴(私掘)

서지사항
항목명사굴(私掘)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분묘(墳墓), 산송(山訟)
하위어위굴(圍掘)
관련어관굴(官掘), 금장(禁葬), 자굴(自掘), 투장(偸葬)
분야정치
유형법제 정책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관(官) 또는 분묘 주인의 허락 없이 다른 사람의 분묘를 사사로이 파내는 일.

[개설]
다른 사람의 분묘를 불법적으로 훼손하는 사굴(私掘)은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고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조선후기 금장자(禁葬者)들은 조상에 대한 도리를 명분으로 투장묘(偸葬墓)를 파내기 위해 사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사굴은 조선후기 산송(山訟)의 확산 및 격화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면서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 형률의 근간이었던 『대명률(大明律)』에 의하면 다른 사람의 분묘를 훼손하는 행위에 대하여 관곽(棺槨)이 드러났을 때는 장 100·유 3,000리, 시신까지 노출되었을 때는 교형(絞刑), 관곽이 드러나지 않아도 장 100·도 3년에 처하였다. 이는 투장묘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불법적인 투장묘라 하여도 금장자가 묘를 파낼 수는 없었고 당사자가 묘를 파내는 자굴(自掘)의 원칙이 철저히 지켜졌다. 이러한 원칙은 투장자들이 소송을 지연시키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들은 산송에서 패소한 이후에도 묘를 파내지 않고 다양한 구실을 내세우며 차일피일 기일을 끌고 버티기 마련이었다. 투장을 사전에 막지 못하면 투장묘를 파내기란 실로 요원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일성록(日省錄)』에서도 투장에 성공하면 설사 분산 주인의 고발이 있어도 관에서는 이미 입장(入葬)한 무덤을 파내기는 불가하니 앞으로 추가적인 입장만을 금하도록 하라는 처결을 내리는 것이 관례라고 지적하고 있다.

[내용]
투장자가 묘를 파내지 않고 버틸 경우 금장자는 관에서 직접 투장묘를 파내는 관굴(官掘)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관에서는 자굴 원칙 때문에 관굴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소송이 지체되고 투장묘를 파낼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경우 금장자의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 사굴이다. 사굴을 감행하기 전에 위굴(圍掘)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분묘 자체는 손을 대지 않고 분묘 주위를 파내면서 투장자에게 압박을 가하는 방법이다. 이 또한 사굴의 일종으로 취급되어 처벌의 대상이었다.

관의 허락 없는 사굴은 어떠한 경우에도 금지되고 엄격히 처벌되었다. 사굴은 군현의 수령이 독자적으로 판결하지 못하고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그의 지시에 따라 처리하였다. 사굴이 발생하면 군현 수령은 죄인을 옥에 가두고 현장 조사를 하여 관찰사에게 보고하였다. 관찰사는 이 보고에 근거하여 관찰사는 죄인에게 최종 판결을 내리는데, 사굴 사실이 확인되면 『대명률』의 규정에 근거하여 대부분 유배형을 적용하였다.

그런데 국가에서 사면령이 내리면 유배인들도 혜택을 받아 석방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사굴 죄인들도 사면을 받아 번번이 석방되었다. 이에 따라 금장자들은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굴을 감행한 후 스스로 관청에 나아가 자수하고 유배길에 올랐다. 사굴이 점점 증가하였으나 관에서도 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순조대에 오면 사굴자들이 자수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계획을 꾸민 원범을 반드시 찾아내서 형률을 적용하고, 사면령이 내려져도 사굴자에게는 적용하지 못하도록 정식을 삼았다[『순조실록』 11년 3월 30일].

한편에서는 사굴 죄인이 유배지에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정조대 강진 사람 김정채(金貞采)라는 인물은 사굴죄를 범하여 강원도 평창군으로 유배를 떠났는데, 유배지에서 조정을 비방하고 인심을 선동하는 문서를 작성하였다가 추국을 당하였다[『정조실록』 6년 8월 20일].

[변천]
사굴에 대한 엄격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 사굴은 투장묘를 파내는 데 효과가 높다는 점 때문에 점차 확대되었다. 그들에게는 범죄인이 되어 형벌을 받는 것보다 조상의 분묘를 지킨다는 위선(爲先)의 명분이 중요시 되었다. 산송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추세 속에서 사굴 또한 18세기 후반 이후로는 사회 전반으로 유행하면서 산송을 격화시키는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다.

[참고문헌]
■ 『대명률(大明律)』
■ 『일성록(日省錄)』
■ 김경숙, 『조선의 묘지소송』, 문학동네, 2012.
■ 김경숙, 「조선후기 山訟과 사회갈등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 전경목, 「조선후기 산송연구」,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 한상권, 「조선후기 산송의 실태와 성격 : 정조대 上言·擊錚의 분석을 중심으로」, 『성곡논총』27, 1996.

■ [집필자] 김경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