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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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사(七祀)

서지사항
항목명칠사(七祀)
용어구분전문주석
하위어공려(公厲), 국문(國門), 국행(國行), 사명(司命), 사조(司竈), 사호(司戶), 중류(中霤)
관련어공신당(功臣堂), 종묘(宗廟), 칠사당(七祀堂)
분야왕실
유형의식 행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국가에서 사명(司命)·사호(司戶)·사조(司竈)·중류(中霤)·공려(公厲)·국문(國門)·국행(國行) 등 일곱 신을 대상으로 거행한 제사.

[개설]
칠사의 개념은 『예기(禮記)』 「제법(祭法)」 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법」 편에 따르면 천자는 자신과 백성들을 위해 칠사를 지내야 했는데, 칠사의 대상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사명, 출입을 관장하는 호와 국문, 음식을 주관하는 조, 도로에 통행하는 것을 주관하는 국행, 후사가 없는 천자의 귀신으로서 사형과 형벌을 관장하는 태려, 거처하는 건물을 주관하는 중류였다. 한편 제후는 오사를 지내도록 되어 있었는데, 사명과 국문, 국행, 중류, 그리고 후사가 없는 제후의 귀신인 공려가 그 대상이었다.

조선은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건국 초기부터 칠사를 국가 사전(祀典) 체제에 포함시켰는데, 중국의 제후국임에도 오사(五祀)가 아니라 칠사를 제사 대상으로 설정하였다. 사실 「제법」 편에서 규정하고 있는 신분에 따른 제사 대상의 수가 『예기』의 다른 편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오히려 천자가 오사를 지내도록 규정하는 등 그 신뢰성이 진한시대 주석가들에 의해 오래전부터 의심받고 있었다. 또한 당시의 천자국인 명나라에서도 칠사가 아닌 오사를 지내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이미 당대에 천자와 제후의 신분이 칠사와 오사로 구분된다는 의식이 뚜렷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다만 조선에서는 태려(泰厲)가 아닌 공려를 제사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제후국으로서의 위치를 드러냈다.

본래 칠사는 각 계절의 중간 달에 거행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조선에서는 사시(四時)에 이루어지는 종묘 제향 때 함께 제향하였다. 봄에는 사명과 사호, 여름에는 사조, 가을에는 국행과 태려, 겨울에는 국문에게 제사를 지냈고, 중류의 경우 6월 말에 별도로 제사를 거행하였다. 이렇듯 계절에 따라 제사 대상을 분류한 것은, 오행 사상에 근거하여 각각의 신이 각 계절과 대응한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중류는 오행 중 토(土)에 해당하는데 토는 절기와 정확히 대응하지 않으므로, 여름의 마지막 토왕일(土旺日)에 제사를 지냈다. 토왕일은 각 계절 말미의 18일로, 토의 기운을 지닌 것으로 여긴 날이다. 사시 제향 외에 납일에 거행되는 제사에서는 7신을 모두 모셨으며, 선왕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도 7신에 대한 제향이 이루어졌다. 그 때문에 『세종실록』 「오례」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는 칠사에 대한 의주(儀註)가 따로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중류 제사에 대한 의주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국가 사전 체제에는 대사(大祀)인 종묘대제(宗廟大祭)와 달리 칠사의(七祀儀)가 소사(小祀)로 편입되어 있어 그 제향 대상이 독립적인 것만은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

칠사가 종묘 제향의 일부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 신위를 모시는 칠사당 역시 공신당과 함께 종묘 정전 마당에 건립되었다. 칠사당이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국조오례의』에 해당 건물의 그림이 실려 있고, 좌우로 나란히 있는 공신당은 『태조실록』부터 그 명칭이 확인되고 있으므로, 조선초기에 종묘를 건립할 때 함께 세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의 칠사는 고려시대부터 시행되어 온 제사를 계승한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종묘 제향 때 칠사를 거행한 기록이 있으며, 조선 태종 연간에 의례를 상정할 때 참고한 『고금상정례(古今詳定禮)』에도 칠사의가 거론되고 있다. 조선초기 국가 사전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있었을 법한 칠사에 대한 논의가 『조선왕조실록』에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려의 제도를 큰 수정 없이 수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세종실록』 「오례」와 『국조오례의』에 수록되었다. 이로 미루어 다른 제사를 수용할 때 명나라의 예제(禮制)를 참고한 것과 달리, 칠사의 경우 고려시대에 수용한 당나라·송나라·원나라의 예제를 그대로 계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태종 때 소사로 편입된 칠사는 이후 조선시대 내내 큰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다만 『세종실록』 「오례」에는 종묘 체제(褅祭)를 규정하면서 칠사도 함께 지낸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 실행 여부는 알 수 없다. 이후 『국조오례의』를 편찬할 때 협제(祫祭)는 칠사를 함께 지내지 않도록 하였다. 그에 따라 칠사는 사시 제향 및 납일 제향을 할 때, 그리고 중류 별제 때만 지내도록 규정되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후 잠깐 동안 칠사가 중지된 듯하나, 곧 사헌부(司憲府)의 건의로 정상화되었다. 『태종실록』에는 칠사에 축문(祝文)을 빠뜨린 책임자들을 처벌한 기록이 있어, 국가에서 이를 매우 중요한 제사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칠사는 대한제국에 들어서도 계속 거행되다가, 1907년(융희 1) 사전 체제를 개정할 때 폐지되었다.

[절차 및 내용]
칠사의 의식과 절차는 『국조오례의』의 길례 서례와 사시 및 납일의 종묘 제사 의주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먼저 칠사의 신위판(神位板)은 종묘 마당 서쪽에, 남쪽으로 치우쳐 동향으로 설치한다. 자리는 모두 왕골자리(完席)로 한다.

종묘 제향의 종헌관(終獻官)이 올라가면, 찬인(贊人)이 칠사 헌관(獻官)을 인도하여 관세위로 나아가 칠사에 대한 제의를 병행하여 거행한다. 먼저 칠사 헌관이 손을 씻은 뒤 홀을 잡고 준소(樽所)로 나아간다. 술잔을 올리는 헌작(獻爵)을 행하고 나면, 축사(祝史)가 부복하여 축문을 읽는다. 납일 제향의 경우 7신 모두에게 제를 올리기 때문에 각각 헌작한 뒤에 축사가 사명의 신위 앞에 서향으로 꿇어앉아 축문을 읽는다. 이후 종묘 제향에서 변두를 거둘 때 칠사의 변두도 함께 거둔다[徹籩豆]. 그런 다음 축판을 구덩이에 넣어 묻는다. 축문에는 ‘국왕’이라 칭하고, 제향 과정에는 절을 하지 않는다. 헌관은 왕의 친제할 때는 종3품관이, 종묘 제향을 섭행할 때는 5품관이 맡았다.

한편 중류에 대한 제사는 별제로, 6월 토왕일에 따로 거행하기 때문에 별도의 의주로 기록되어 있다. 중류제는 종묘서(宗廟署) 령(令)이 전사관(典祀官)을 맡았다. 의식은 사배(四拜) 이후 제사의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고 다시 사배한 뒤, 세 차례 향을 올리는 삼상향(三上香), 술잔을 올리는 헌작(獻爵), 축문을 읽는 독축(讀祝), 음복(飮福), 사배(四拜), 제기를 물리는 철변두(撤邊豆), 사배의 순서로 진행되었으며, 예가 끝났음을 알리는 예필(禮畢)을 하고 나서는 축판을 감(龕)에 묻는 망예(望瘞)를 끝으로 의식이 모두 끝났다. 중류에 대한 별제는 종묘 제향 때의 칠사와는 의식의 절차가 약간 다르고 축문의 내용 구성 면에도 차이가 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칠사는 문·부엌·집·길 등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신들을 모신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왕이 신하와 백성을 위해 지내는 구복적(求福的) 성격의 제사이다. 그러나 제사의 대상에 후손이 없는 제후의 귀신이 포함되어 있으며, 신들의 명칭에 국문, 국행 등 ‘국(國)’ 자가 붙어 있다. 이러한 점은 칠사가 단순히 복을 비는 차원을 넘어, 최고 권력자가 주재하는 국가적인 제사의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한편, 계절에 따라 그와 관련된 신에게 제사하는 점은 오행설(五行說)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인간의 일상을 관리하는 신들에게 계절마다 돌아가며 제사를 지낸 것은 일 년 동안의 평안을 염원하는 의미이자, 동시에 당시 사람들의 순환론적 우주관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예기(禮記)』
■ 한형주, 『조선초기 국가제례 연구』, 일조각, 2002.
■ 권용란, 「조선시대 七祀에 대한 小考」, 『종교와 문화』12, 2006.
■ 이현진, 「조선시대 七祀의 성격에 대하여」, 『규장각』29, 2006.

■ [집필자] 강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