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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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제(厲祭)

서지사항
항목명여제(厲祭)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소사(小祀)
하위어성황발고제(城隍發告祭), 주현여제(州縣厲祭)
관련어공려(公厲), 여단(厲壇), 태려(泰厲)
분야왕실
유형의식 행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제사를 받지 못하거나, 억울하게 죽어 사람들에게 화를 입히는 원혼인 여귀(厲鬼)를 달래기 위하여 지낸 제사.

[개설]
‘여(厲)’란 본래 제사를 지내줄 후손이 없는 귀신을 가리키는 말로, 『예기(禮記)』에서 후손이 없는 천자의 귀신을 태려(泰厲), 후손이 없는 제후의 귀신을 공려(公厲)라고 지칭한 데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여제는 제사를 지내줄 후손이 없는 귀신 외에도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그 대상으로 하였는데, 총 열다섯 종류 원혼의 신주를 모시도록 하였다. 이러한 여귀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달래는 것이 여제의 목적이었다. 정기적으로 일 년에 세 차례, 즉 동지(冬至)부터 105일째 되는 날인 청명일과 7월 15일, 그리고 10월 1일에 거행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전염병이나 가뭄 등의 재앙이 있으면 왕명에 의하여 해당 지역에서 부정기적으로 지내기도 하였다. 여제는 태종대 이후 꾸준히 거행되다가, 1908년(융희 2)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연원 및 변천]
여제가 조선의 사전(祀典) 체제에 편입된 것은 1401년(태종 1) 권근(權近)의 상서(上書)에 의해서였다[『태종실록』 1년 1월 14일]. 이후 1404년(태종 4)에 예조(禮曹)에서 여제의 의식 절차를 상정하여 올렸으며[『태종실록』 4년 6월 9일], 1413년(태종 13)에는 여제의 단위(壇位)가 이미 축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태종실록』 13년 6월 8일]. 권근의 상서 이후 여제를 국가의 사전 체제에 적극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1440년(세종 22)에는 예조에서 여제의주(厲祭儀註)를 지어서 바쳤고[『세종실록』 22년 6월 29일], 1444년(세종 26)에는 아이를 낳다가 죽은 귀신을 여제 대상에 포함시켰다[『세종실록』 26년 10월 1일]. 이처럼 정비된 내용은 성종 때 편찬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정리되었는데, 여제를 소사(小祀)로 취급하여 길례(吉禮) 편에 수록하였다.

[절차 및 내용]
『국조오례의』 길례에 따르면, 여제는 남단의 성황신에게 언제 여제가 있을 것임을 알리는 성황발고제(城隍發告祭)와, 발고제 3일 뒤 북교 여단(厲壇)에서 지내는 본 제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주현에서 지내는 여제의 절차는 별도로 기록되었다.

성황발고제 예식은 사배(四拜), 세 차례 향을 올리는 삼상향(三上香), 술잔을 올리는 헌작(獻爵), 축문을 읽는 독축(讀祝), 제기를 물리는 철변두(撤邊豆), 사배의 순서로 진행되었으며, 예를 마쳤다 뜻에서 예필(禮畢)을 아뢰고 나서는 축판을 감(龕)에 묻었다. 이때 헌관과 집사자들이 바라보았는데, 이를 망예(望瘞)라고 하였다.

본 제사를 지낼 때는 남단의 성황신 신위를 모셔와 주향(主享)으로 세우고, 좌우에 15종의 여귀 신위를 마주보게 배열하였다. 오른편에는 ① 칼에 맞아 죽은 자, ② 수화(水禍)나 도적을 만나 죽은 자, ③ 남에게 재물을 빼앗기고 핍박당해 죽은 자, ④ 남에게 처첩을 강탈당하고 죽은 자, ⑤ 형벌의 화를 만나 억울하게 죽은 자, ⑥ 천재(天災)나 역질을 만나 죽은 자 등의 신위를 모셨다. 왼편에는 ① 맹수와 독충에 해를 당해 죽은 자, ② 얼고 굶주려 죽은 자, ③ 전투에서 죽은 자, ④ 위급하여 스스로 목매어 죽은 자, ⑤ 담이 무너져 압사한 자, ⑥ 난산으로 죽은 자, ⑦ 벼락 맞아 죽은 자, ⑧ 추락하여 죽은 자, ⑨ 자식 없이 죽은 자 등의 신위를 모셨다. 본래 여제가 여귀를 모시는 제사임에도 형식적으로는 성황신을 주향으로 삼은 점이 특징적이다.

본 제사의 절차는 먼저 성황신에게 사배, 초헌(酌獻), 아헌(亞獻), 종헌(終獻)의 순서로 제사를 드린 뒤, 여귀들에게 작은 술잔을 올리고[奠盞], 축문을 읽고, 제기를 물리고, 사배한 다음 제문을 태우고[焚祭文] 예를 마치도록 되어 있었다. 주현에서 거행하는 예식의 절차도 동일하였다.

『국조오례의』에 수록된 제사에는 술잔을 올린 뒤 음복(飮福)을 하는 절차가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여제의 경우 발고제와 본 제사 모두에 음복의 절차가 빠져 있다. 음복이 생략된 제사들은 대개 기고(祈告), 즉 국가의 경조사나 재난 등을 제사 대상에게 알리고 기원하는 바를 비는 부정기(不定期) 제사였다. 그런데 여제는 일 년에 세 번 정기적으로 설행되는 정기 제사임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음복 절차가 빠져 있다.

또 절차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여제의 특징적인 면 가운데 하나가 축문(祝文)의 양식이다. 『국조오례의』 서례에 따르면, 여귀들에게 올리는 축문을 ‘교서(敎書)’라 고 불렀다. 교서란 원래 살아 있는 사람에게 왕명을 전달하는 수단인데, 죽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축문을 교서라고 부른 것은 여제가 지닌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다. 단, 주현(州縣)에서 여제를 지낼 때는 교서라고 하지 않고 제문(祭文)이라고 불렀다.

절차와 내용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특징들은 여제가 지닌 제사로서의 특수한 지위에서 비롯되었다. 먼저 성황신을 주향으로 설정한 것은, 성황신이 여귀들을 불러 모아 제사에 참여하도록 하는 존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현세에 지방관이 존재하듯이 저승에도 상제(上帝)를 정점으로 그 아래에 지역을 다스리는 성황신이 있다고 믿었고, 그에 따라 여제에서도 성황신은 여귀들을 직접 소집하고 이들을 감찰하는 기능을 지닌 존재로 인식되었다. 조선의 여제에서는 성황신에게 여귀를 감찰하는 기능은 부여하지 않았지만, 이들을 제사에 참여하도록 하는 기능은 그대로 수용하였다.

한편 음복 절차를 생략한 것과 축문을 교서라고 부른 것은, 왕이 여귀를 구휼한다는 명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음복은 제사 대상이 제사의 주재자에게 복을 내리는 행위인데, 여제의 경우 대상자가 주재자보다 낮은 존재이므로 애초에 음복은 성립될 수 없었다. 또 여귀는 위로와 구휼의 대상이었고 그 주재자는 왕이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축문도 교서라 불렀다. 중국의 여제에서는 성황신이 여귀를 소집하고, 제사의 주재자를 대신하여 이들을 위로하고 감찰하는 역할을 모두 수행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위로와 감찰, 구휼의 역할을 제사의 주재자인 왕이 담당한 것이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유교적 이념에 따른 제사 체제는 제사를 주재하는 사람의 권력을 표상하고, 제사 대상의 공덕을 기리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이 점이 복을 비는 데 주안점을 두는 민간 제사와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제의 경우, 기복적인 성격의 민간 제사가 국가의 사전 체제에 편입되면서 다른 제사와 다른 특수성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여귀들을 왕이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점은 중국과는 다른 조선 특유의 현상이며, 이러한 차이는 귀신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두 나라의 세계관이 다르게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근대화 이후까지도 나라에서 여제를 계속 거행하였다는 사실은 여제가 지닌 민속적인 기능이 상당히 뿌리 깊게 작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이욱, 「17세기 여제의 대상에 관한 연구」, 『역사민속학』9-1, 2000.
■ 이욱, 「조선시대 국가 사전(祀典)과 여제(厲祭)」, 『종교연구』19, 2000.
■ B. 왈라번(Boudewijn Walraven), 「조선시대 여제의 기능과 의의 - ‘뜬귀신’을 모셨던 유생들」, 『동양학』31, 2001.

■ [집필자] 강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