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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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經筵)

서지사항
항목명경연(經筵)
용어구분전문주석
하위어조강(朝講), 주강(晝講), 석강(夕講), 소대(召對), 야대(夜對)
관련어집현전(集賢殿), 홍문관(弘文館), 규장각(奎章閣), 산림(山林)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왕에게 유학의 경서(經書)와 역사서, 정치의 도리[治道] 등을 강론하는 일, 또는 그 일을 담당한 관서.

[개설]
경연은 고려시대 이래 시행되었으나, 그것이 본격적인 모습을 갖춘 것은 조선시대 이후부터였다. 조선시대에는 경연을 전담하는 별도의 기관이 갖추어졌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하루에 조강(朝講)·주강(晝講)·석강(夕講)의 3강 체제와 야대(夜對)·소대(召對) 등의 제도로 정비되었다. 15세기 중반 이후 사림들이 중앙 정치에 진출하면서 경연은 더욱 강조되었으며, 산림(山林)의 정치적 진출이 활발해지는 17세기에는 이들이 경연에 참가하며 활성화되었다. 영·정조대에 경연은 더욱 활발해졌는데 이를 통해 유교적 제왕의 모습을 실천해 나갔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경연은 중국 한나라 때 유학자들이 황제에게 오경을 강의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당나라 때는 한림원에 시강학사와 시독학사를 두는 등 어전 강의가 제도화되었다. 유학이 발달한 송나라 때는 경연의 관직이 더욱 정비되고 강의 교재가 풍부해졌으며, 격일제 강의 일정도 확립되었다. 그러나 원나라 때 이후에는 형식적인 의식으로 변질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이후 시행되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그리하여 1392년(태조 1) 관련 관제가 정비되었고 이후 약간의 변동을 거쳐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되었다. 조선시대 경연의 활성화는 숭유억불 정책에 따른 것으로, 이를 통해 왕이 자의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방지하고 규제하였다.

[조직 및 역할]
조선왕조의 성립과 더불어 경연 제도와 관직에도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억불숭유 정책이 추진됨에 따라 유교가 생활화되고 유학이 발달하였으므로, 가장 유교적인 제도인 경연이 활발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태조는 즉위 후 11일 만인 1392년 7월 28일에 경연의 제도와 관직을 제정하여 반포하였는데[『태조실록』 1년 7월 28일], 이때 규정된 경연의 관직을 고려 공양왕 때와 비교해서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태조 때 제정된 직제가 공양왕 때와 다른 점은 영사와 검토관이 1명씩 감원되었고, 참찬관은 1명, 강독관은 2명 증원되었으며, 부검토관이 새로 생겼다는 점 등이다. 이처럼 태조는 경연의 관직을 정비하였지만, 실제로 경연은 거의 열지 않았다. 이는 “내가 비록 경연에는 나가지 않더라도 매양 편전에서 유경(劉敬)으로 하여금 『대학연의』를 강론하게 하고 있다.”[『태조실록』 1년 11월 12일]는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태조실록』에는 태조가 경연을 열거나 참석했다는 기사가 아홉 번 보인다. 그중 세 번은 경연을 열었다는 기사로서, 왕은 참석하지 않았으며, 나머지 여섯 번은 직접 참석하여 『정관정요』와 『대학(大學)』, 『논어(論語)』 등을 논의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시기의 경연은 본격적으로 정사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라기보다는, 왕이 치도(治道)를 공부했다는 선례를 남기기 위한 상징적인 행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종 연간에는 경연이 상당히 많이 열렸다. 교재도 다양해졌으며, 2품 대신인 지사와 동지사가 주로 강의를 하고 시강관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태조 때 편제된 강독관이 시강관과 시독관으로 분화되기도 하였다. 강의의 빈도수, 교재의 다양성, 참석자의 구성 등에서 정종 때의 경연은 태조 때보다 충실했다고 할 수 있다.

태종 때는 다시 침체에 빠졌다. 태종은 재위 11년까지는 간헐적으로 경연을 열었지만, 이후 선위할 때까지 거의 경연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뒤 세종의 즉위와 더불어 경연은 본궤도에 올랐다. 새로운 관직의 보임도 이루어졌는데, 영사·지사·동지사·시강관 각 2명과 승지가 겸하는 참찬관 등을 두었고, 시독관 이하는 세자서연관으로 충당하였다. 즉위 다음 날에는 지사와 동지사, 시강관을 한 명씩 늘렸다. 세종의 높은 학구열은 경연관이 교대 근무를 요청할 정도였고, 경연관들이 과중한 행정 업무로 인해 경연을 준비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420년(세종 2) 3월에 집현전을 궁중에 설치하고, 학식과 인품이 뛰어난 젊은 문관을 선발하여 경사를 강론하고 고문(誥文)에 대비하는 일만 전담하게 하였다. 이때 마련된 직제는 표 2와 같다.


부제학의 상위 관직인 영전사·대제학·제학 등은 겸관으로 충당했고, 실제로 집현전의 임무를 담당한 부제학 이하 정자까지의 낭청은 녹관으로 충당하였다. 녹관의 각 품은 2명을 넘지 않는다고 하였으므로, 부제학에서 정자까지의 관원은 최소 11명에서 최대 22명이 된다. 그러나 집현전 설립 당시에는 직제학·응교·교리·수찬·박사를 각각 2명씩, 총 10명만 임명하였다. 이후 성종 연간에 학술 및 언론 기관으로 자리 잡은 홍문관의 직제와 경연의 관직은 표 3과 같다.


성종 때 제정된 직제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반영되었는데, 이를 정리하면 표 4와 같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경국대전』에서는 경연의 관직을 모두 겸관으로 규정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성종대 후반에는 특진관(特進官) 제도가 도입되어 재상으로서 고문(顧問)에 대비할 만한 인원을 차출하여 경연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경연관의 자격 문제가 거론되면서 특진관에 재야의 덕망 있는 선비를 초빙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경연관에 재야 선비를 초빙하는 문제는 17세기 이후 산림을 초빙하는 문제로 이어지면서 이들을 위한 별도의 관직인 찬건·진선·자의 등의 관직이 신설되었다. 정조대에는 규장각이 설치되면서 이들에 의해 경연이 주도되었다.

조선시대의 경연 운영 방식은 대체로 세종과 성종 때 확립되었다. 세종 때는 승지 1명, 집현전의 경연 낭청 2명, 사관 1명이 입시(入侍)하였다. 13세에 즉위한 성종은 조강·주강·석강 등 하루에 세 번 경연을 열었는데, 성년이 된 뒤에도 이러한 방식을 유지하였다. 그에 따라 조강·주강·석강은 이후 경연 강의의 기본이 되었다.

조강에는 영사와 지사 또는 동지사, 참찬관 각 1명, 홍문관 낭청 2명, 대관과 간관 각 1명, 사관 1명이었으나 뒤에는 2명, 특진관 2명 등 모두 10명 이상이 참석하였다. 주강과 석강에는 승지 1명, 집현전의 경연 낭청 2명, 사관 1명이 참여하였다. 그 밖에 밤에 여는 야대와 수시로 여는 소대가 따로 있었다.

조강은 보통 평명(平明)에, 주강은 정오에, 석강은 미정(未正)인 오후 2시경에 열렸다. 조강을 비롯한 각종 경연의 절차는 비슷한데, 정조대 편찬된 『홍문관지』에 기록된 조강 시행 모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연이 열리기 전날 승정원에서는 장방형의 널빤지에 분(粉)을 기름에 개어 널조각에 바른 분판(粉板)에 다음 날 몇 시에 경연이 열릴 것이라는 사실을 적어 게시하면, 홍문관의 기별서리가 이를 본 뒤 당일 홍문관의 입번(入番) 관원에게 알린다. 그러면 입번 관원은 홍문관 소속의 책색리(冊色吏)에게 지시하여 대전에 가서 경연에서 진강할 어람용 책자를 대전별감을 통해 받아오도록 한다. 입번 관원은 어람용 책자를 받아서 경연에서 진강할 범위를 정해 이를 붉은색으로 표시한 뒤 진강할 범위를 적은 자지단자(自止單子)와 반출했던 어람용 책자를 다시 대전에 들여보낸다.

경연 당일 영경연사 1명, 지경연사와 동지경연사 중 1명, 특진관 2명, 승지 1명, 홍문관 상·하번 및 양사(兩司) 각 1명, 주서 1명, 사관(史官) 상·하번 각 1명 등 경연관이 입시한다. 경연이 열리는 시간 2각(刻) 전에 금루관(禁漏官)이 먼저 홍문관에 시간을 알려주면, 홍문관의 상·하번은 모두 공복(公服)을 갖춰 입고 먼저 합문(閤門) 밖 막차에 입시하고, 나머지 경연관 모두 역시 막차에 들어간다. 영경연사가 좌정하면 사관을 제외한 모든 경연관은 차례대로 영경연사에게 인사를 한 뒤 물러서 각자의 자리에 앉는다. 그러면 책리들이 진강할 대상이 되는 책자를 경연관 각자의 앞에 둔다. 상·하번은 책자를 가지고 영경연사 앞에 가서 국왕 앞에서 진강할 부분을 미리 강한 뒤 자리에 앉는다. 만약 영경연사가 입시하지 않으면 지경연사 앞에서 연습한다. 이어 하번인 사관이 좌목단자를 가지고 들어와 영경연사 등 참석하는 경연관에게 보인 뒤에 이를 대전별감을 통해서 국왕에게 올린다.

정시가 되면 국왕에게 금루관이 이를 알린다. 그러면 국왕은 외전(外殿)으로 나오는데, 서방색(書房色)사약(司鑰)이 합문 밖에 무릎 꿇고 국왕에게 전좌(殿座)할 것을 고한다. 국왕이 전좌하면 경연관들은 각자가 책을 가지고 순서대로 입시해서는 지정된 자신들의 자리에서 부복한 뒤 책을 편다. 경연이 시작되면 국왕이 먼저 이전에 했던 부분을 읽은 뒤 강관(講官)이 새로운 진강 범위를 읽으면 국왕이 다시 새롭게 진강한 부분을 읽는다. 이어 강관들이 진강한 부분의 뜻과 의미를 설명한 뒤에 비로소 조강이 끝난다.

『조선왕조실록』 CD를 통해 종류별 경연의 개최 횟수를 살펴보면, 조강이 5299회, 주강이 4819회, 석강이 2589회, 야대가 1087회, 소대가 3363회 열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경연의 개최 횟수로만 볼 때 조강과 주강, 소대가 많은 편이었다. 경연관의 자리는 영경연은 동벽, 지경연과 동지경연은 서벽, 참찬관 이하는 남벽으로 배치하였다. 즉 왕은 남면하고, 1품관은 서향, 2품관은 동향, 3품관 이하는 북향하였다.

강의의 기본 교재는 사서오경(四書五經) 및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과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이었다. 그 밖에 『성리대전(性理大全)』·『근사록(近思錄)』·『소학(小學)』·『심경(心經)』·『대학연의(大學衍義)』·『정관정요(貞觀政要)』·『국조보감(國朝寶鑑)』 등도 사용하였다. 강의는 경연관 한 사람이 교재의 원문을 음독·번역·설명하고 나면, 왕이 질문하고 다른 참석자들이 보충 설명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유교 경서에 대한 강의가 끝난 뒤에는 정치적 현안과 국정 운영에 대해 협의하였다. 특히 대신과 대간이 참석한 조강은 협의체로서의 기능이 컸다.

[변천]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예종 때 처음 도입되었으나 활발하지는 못하였으며, 무신 집권 때는 일시적으로 폐지되기도 하였다.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된 뒤에는 명칭이 ‘서연(書筵)’으로 격하되어 겨우 명맥만 유지되었다. 이처럼 고려시대에 경연이 부진했던 원인은 대체로 불교가 성하고 유학이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건국 이후 숭유 정책이 추진되면서 경연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태조는 경연청을 설치하였고, 세종은 즉위한 뒤 약 20년 동안 매일 경연에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집현전을 정비하고 경연관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특히 성종은 재위 25년 동안 매일 세 번씩 경연에 참석하였고, 그 자리에서 다양한 정치적 현안을 협의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경연은 국정 운영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뒤 세조와 연산군에 의해 일시 폐지되기도 하였으나, 곧 부활되어 고종 때까지 지속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이후에는 경연청에 홍문관과 예문관을 통합하였고, 이듬해에는 경연청을 없애고 경연원(經筵院)을 신설하여 시강 1명과 시독 4명을 두었다. 1897년에는 다시 경연원을 홍문관으로 개칭하였다.

경연에서는 왕과 신하가 함께 경사(經史)를 읽고 그 내용을 토론하였는데, 그 목적은 경사에 담긴 정치의 원리와 실제를 배우는 것이었다. 경연은 왕이 권력을 자의로 행사하는 것을 방지하고 유교적인 원칙에 따라서 정치를 하도록 유도하려는 제도적 장치였다. 또 정치권력과 휼민(恤民), 절검(節儉) 등 부의 배분을 규제하려고 하였는데, 그 방향은 대체로 왕권을 약화시키는 쪽이었다. 즉 권력의 배분에 있어서는 왕이 정치의 실무를 관리들에게 위임할 것을 강조하여 왕권의 행사를 제한하려 하였다. 이처럼 경연관들이 왕권을 제약하려 한 것은 조선시대 경연 강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경연은 본래 위인지학(爲人之學)의 장으로, 역사를 공부하여 이를 정치에 적용하려는 목적이 분명하였다. 경사를 철저히 연구하기에 경연보다 좋은 수단은 없었다. 같은 책을 여러 번 반복해서 공부하였으므로 경사에 대한 이해가 높은 수준에 이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왕과 경연관은 경연 준비에 철저했으며, 우수한 학자들과 매일 경사를 연구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유학 역시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결국 경연은 경사 연구의 추진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학의 발달에도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경연은 정치의 유교화에도 상당히 기여하였다. 경연에서 읽고 토론한 내용은 철저하게 유교적 입장에서 체계화된 정치의 원칙과 실제 사례였다. 이러한 내용을 공부하는 목적은 물론 배운 바를 현실 정치에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왕이 매일 경연에서 공부한 유교적인 정치의 이상과 원칙이 당시의 정치 운영에 영향을 미친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권연웅, 「성종조의 경연」, 『한국문화의 제문제』, 1981.
■ 권연웅, 「세종조의 경연과 유학」, 『세종조문화연구』1, 1982.
■ 권연웅, 「조선 영조대의 경연」, 『동아연구』17, 1989.
■ 권연웅, 「조선초기 경연의 간쟁론」, 『경북사학』14, 1991.
■ 권연웅, 「조선초기 경연의 재이론」, 『역사교육논집』13·14합, 1990.
■ 남지대, 「조선 초기의 경연」, 『한국사론』6, 1980.
■ 이상옥, 「경연에 나타난 경학과 제왕」, 『우석대논문집』4, 1970.
■ 이재철, 「집현전의 기능에 대한 연구」, 『인문과학』30, 1973.
■ 정두희, 「집현전학사연구」, 『전북사학』4, 1980.
■ 지두환, 「조선시대 경연관 연구」, 『한국 역사상 관료제 운영시스템에 관한 연구』, 국민대학교출판부, 2010.
■ 최승희, 「조선전기 언관의 연구 - 집현전의 언관화」, 『한국사론』1, 1973.
■ 최승희, 「홍문관의 성립경위」, 『한국사연구』5, 1970.

■ [집필자] 김경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