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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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안(會案)

서지사항
항목명회안(會案)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회계(會計)
동의어회부(會簿)
분야경제
유형법제 정책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호조·병조, 지방의 감영 등에서 재정의 현황과 운영 내역을 기록한 장부.

[개설]
조선왕조에서는 호조(戶曹)·병조(兵曹), 그리고 지방에서는 감영에서만 회안을 작성하였다. 18세기 후반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면서 1749년(영조 25)에는 훈련도감·어영청·수어청·총융청·금위영 등 5군문(軍門)과 선혜청에서도 회안을 작성하도록 하였다[『영조실록』 25년 4월 19일]. 이후 비변사에서도 환곡을 관리함에 따라 회안을 작성하였고, 군기시(軍器寺)에서도 회안을 작성하였다[『영조실록』39년 9월 28일]. 또한 물품에 따라 회안이 존재하였다. 환곡 회안, 군작미(軍作米) 회안 등이 나타났으며, 19세기 후반에는 병영(兵營) 회안도 보였다[『고종실록』 12년 12월 16일].

[제정 경위 및 목적]
회계 처리를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회안을 작성하였다. 본래 호조·병조·감영에서만 회안을 작성하였으나 균역법 시행 이후 훈련도감·어영청·수어청·총융청·금위영에서도 회안을 작성하게 되었다. 환곡을 운영하는 기관이 늘어나자 회계 처리를 위하여 그 외 다양한 기관에서 회안을 작성하였다.

[내용]
조선왕조에서는 본래 중앙에서는 호조와 병조 그리고 지방에서는 감영에서만 회계법을 시행하여 재정 운영 현황과 내역을 기록한 회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호조 환곡은 각 고을에서 1년에 4차례 회안을 작성하여 호조로 올려 보냈다.

18세기 후반의 균역법은 양인의 군포(軍布)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한 조처였다. 균역법 시행으로 인하여 양인은 1년에 군포 1필을 납부하여 군역 부담이 크게 줄어들었지만, 왕조 정부에서는 감축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다양한 정책을 시행해야만 하였다. 이 과정에서 각 기관의 회계 처리를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1749년(영조 25)에 훈련도감·어영청·수어청·총융청·금위영 등 5군문과 선혜청에서도 회계법에 따라 회안을 작성하도록 하였다. 대동법이 시행됨으로써 재정아문으로 등장한 선혜청에서도 이전부터 각 지역의 곡물을 관할하고 있었다. 하지만 1749년까지는 회안을 작성하여 관리한 것이 아니고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문서로 작성하여 보고하였기 때문에 호조나 병조처럼 회안을 작성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비변사에서도 환곡을 관리함에 따라 회안을 작성하였고, 군기시에서도 회안을 작성하였다. 또한 물품에 따라 회안이 존재하였는데 환곡 회안, 군작미 회안 등이 나타났으며, 19세기 후반에는 병영(兵營) 회안도 보였다.

회안에 재정 현황만을 기록한 것은 아니었다. 군기시 회안에는 병조에서 벼슬아치의 업적을 평가한 군도목(軍都目)과 군기(軍器)에 대해서도 기록하였으며, 비변사 회안에는 해당 업무를 담당하는 당상(堂上)의 임명 상황을 기록하였다.

17세기 후반 이후 환곡의 총액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환곡 회안이 많이 작성되었다. 회안에 기록된 물자는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회안에 기록된 내역과 창고에 존재하는 액수가 다른 경우에는 철저히 조사하여 이미 임기를 마친 지방관의 경우에도 처벌하고 부족한 액수를 받아 내었다. 19세기에는 회안의 곡식을 포흠(逋欠)한 아전은 그 액수가 많을 경우 효수(梟首) 하였고, 장부를 대조하는 영비(營裨)는 귀양 보내고, 감사는 임명장을 빼앗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기도 하였다.

또한 회안 내역을 변경하거나 규정된 용도 이외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왕의 허락이 필요하였다. 선혜청에서 관리하는 곡물을 바꾸는 것이 1,000석 이상이면 왕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받은 다음에 처리하는 것이 규정이었다. 1780년(정조 9) 영광군수는 선혜청에서 관할하는 고을의 보리 환곡이 많아서 폐단이 발생하자 선혜청에 문서를 보내 보리 3,000석을 다른 곡식으로 바꾸어 달라고 감사에게 요청하였다. 전라감사가 선혜청에 문서를 보내겠다고 하면서 먼저 보리 3,000석을 벼로 바꾸는 것을 허락하였으므로 영광군수는 상진청의 보리 환곡을 벼로 바꾸어 회안에 기록하였다. 그러나 전라감사가 선혜청에 문서를 보내기 전에 교체되었기 때문에, 영광의 보리 환곡을 다른 곡물로 바꾼 것은 불법행위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감사는 파직되고 다시는 등용되지 못하는 처벌을 받았다.

[변천]
18세기 후반부터 비용 조달을 위한 환곡이 급증하였다. 이런 환곡의 원곡은 주로 호조 환곡이나 상진곡(常賑穀) 등으로 만들어졌다. 이 경우에도 당연히 선혜청 회안에 그 변동 상황을 기록하였다.

환곡 회안에는 환곡의 운영 방식도 기록하였다. 충청도의 경우, 보리 환곡은 보유액의 절반만을 분급하는 ‘반류반분(半留半分)’으로 운영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보리 환곡은 썩고 상하기 쉬웠기 때문에 실제 운영에 있어서는 보유액 전체를 분급하는 ‘진분(盡分)’의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법 규정과 실제 운영에 차이가 생기자 충청도 보리 환곡의 경우에는 전액을 분급하도록 조처하고, 회안을 수정하도록 하였다. 각 고을에 있는 회안은 중앙 재정의 물자가 기록된 문서이므로 암행어사가 파견되어 창고 조사를 할 경우에 회안을 가지고 점검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송찬식, 「이조시대 환상취모보용고」, 『역사학보』 27, 1965.

■ [집필자] 문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