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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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흥창(廣興倉)

서지사항
항목명광흥창(廣興倉)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경중각사(京中各司)
하위어광흥강창(廣興江倉)
관련어풍저창(豊儲倉)
분야경제
유형법제 정책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관리들과 각종 역을 담당하던 사람들의 월급 관련 사무를 담당하던 관청, 또는 그 월급을 보관하던 창고.

[개설]
조선의 광흥창은 기본적으로 고려 충선왕 때 개정된 광흥창을 계승한 것으로, 관리들의 녹봉과 각종 유역인들의 월봉(月俸, 朔料)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였다. 다만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소속 관리의 수가 약간 늘어났을 뿐이다. 1405년(태종 5) 3월 관제개혁(官制改革)을 통해 풍저창과 함께 호조의 소속 관사가 되었다. 『경국대전』에서는 정4품 수(守) 1명, 종6품 주부(主簿) 1명, 종8품 봉사 1명, 정9품 부봉사(副奉事) 1명씩을 광흥창에 배치하도록 규정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308년 고려의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한 직후 관제를 개혁할 때 이전의 좌창(左倉)을 광흥창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광흥창에서는 관리들의 녹봉과 각종 유역인들의 월봉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소속 관원으로는 정5품 사(使) 1명, 정6품 부사(副使) 1명, 정7품 승(丞) 1명을 두었다. 그러다가 공민왕 때 사는 종5품, 부사는 종6품, 승은 종7품으로 바꾸고, 종8품의 주부 1명을 더 배치하였다.

[내용]
조선의 광흥창은 기본적으로 고려의 광흥창을 계승한 것이었다. 다만 소속 관리 가운데 부사·승·주부의 인원수가 각각 1명씩 더 늘어났을 뿐이었다. 1405년(태종 5) 3월 육조(六曹)의 직무 분담(職務分擔)과 소속 관사들을 정할 때 풍저창과 함께 호조의 소속 관사가 되었다[『태종실록』 5년 3월 1일]. 1414년(태종 14) 1월 관제개혁 때에는 주부가 부승(副丞)으로 명칭이 바뀌었다[『태종실록』 14년 1월 18일].

1459년(세조 5) 9월에는 전곡(錢穀)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는 광흥창과 인수부(仁壽府)·예빈시(禮賓寺)·도관서(導官署)·의영고(義盈庫)·양현고(養賢庫) 등에 근무하는 관원들은 모두 오랫동안 근무하도록 하였다. 한편, 담당 업무에 정통한 사람을 선발하여 맡기도록 하였다[『세조실록』 5년 9월 21일]. 1464년(세조 10) 1월에는 그동안 봉사의 도장을 사용하여 전곡(錢穀)을 들이고 지출하였기 때문에 부정의 소지가 많았다고 하면서, 서강(西江)에 위치한 분광흥창(分廣興倉)도 그 도장을 호조의 명호(名號)로 개조(改造)하여 쓰도록 하였다[『세조실록』 10년 1월 12일]. 1466년(세조 12) 1월에는 광흥창의 사(使)를 고쳐 수로 하였고, 승·부승은 각각 1명씩 없애고 대신에 부봉사 2명을 더 두었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변천]
1470년(성종 1) 3월에는 풍저강창(豊儲江倉)을 광흥창에 소속시켰다[『성종실록』 1년 3월 27일]. 『경국대전』에 따르면, 광흥창에는 정4품 수 1명, 종6품 주부 1명, 종8품 봉사 1명, 정9품 부봉사 1명씩을 배치하였다.

■ [집필자] 이장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