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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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평청(常平廳)

서지사항
항목명상평청(常平廳)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상평(常平), 진휼(賑恤), 대동법(大同法), 구황청(救荒廳), 진휼청(賑恤廳)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에 흉년에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비축 곡물 및 포(布)와 돈[錢]을 관리하던 관서.

[개설]
조선 초에 중국 한나라 때 시행한 상평(常平)의 법을 시행할 것을 주장하는 논의들이 있었다. 상평은 풍년이 들어 곡가가 내려가면 정부가 곡가를 올려서 사들여 농민을 이롭게 하고, 흉년이 되어 곡가가 오르면 값을 낮추어 곡식을 방출하여 농사를 짓는 농민과 일반 민들에게 모두 혜택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즉 물가 조절과 진휼을 겸한 제도였다. 관청은 이미 확보한 곡물을 원가대로 팔아 관청과 민들에게 모두 손해가 되지 않도록 했다.

조선 초 상평창이 하던 역할을 조선후기에는 상평청(常平廳)이 대신했다. 상평청은 비변사에서 운영하던 구황청(救荒廳)과 합쳐져 선혜청으로 이속되었다. 이 두 기관은 팔도의 모곡 및 발매(發賣)·설죽(設粥) 등의 일을 전적으로 관리하였다. 합쳐진 두 기관이 평시에는 상평청으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흉년을 당하면 진휼청(賑恤廳)이 신설되었고 주된 업무는 진휼이었다. 이후 역할이 종료되면 진휼청은 혁파되었다. 이와 같이 두 기관은 상호 독립적이면서, 한편으로는 관련을 갖고 운영되었다.

상평청은 곡물과 면포 특히 대동미(大同米)·포의 출납을 관리하였는데, 화폐를 주조한 이후 전(錢)도 주요한 항목에 포함되었다.

[설립 목적 및 경위]
상평은 풍년에 값을 더해 사들이고 흉년에는 값을 줄여 팔아내어서 곡식 값이 유지되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상평청의 역할은 국초에 상평창이 지니고 있던 물가 조절 기능과 함께 관청 경비의 마련 및 사신 접대를 위한 비용 마련이 주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화폐가 발행되면서 호조와 함께 화폐를 주조하는 기관으로 지목되기도 하였으며, 진휼 기능도 겸했다.

정약용이 조선의 상평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당시의 법에는 값을 줄여서 팔아내는 일은 있어도 값을 더해서 사들이는 일은 없다고 하였으며, 이것이 옛 법과 다른 점이라 하였다. 이는 상평청이 진휼을 위한 역할에 목적이 있었으며, 물가를 조절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고려시대에 상평창이 설치되었고, 조선 초에도 상평창의 법규를 시행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상평창의 시행과 관련해서는 『경국대전』의 조항에서 구체적인 시행 내용을 싣고 있으며, 군자창의 묵은 곡식을 바꾸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제대로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상평창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제도로서 조선 초에 많은 논의들이 있었으며, 조선 초기의 상평창과 이후 설치된 상평청과의 연관성은 자세하지 않다. 다만 상평창의 역할이 유명무실하게 되던 것이 복설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1608년(광해군 즉위) 경기지역에 선혜법이 실시되었다. 이때 경기청(京畿廳)을 설치한 곳이 상평청이었다.

1626년(인조 4) 비변사(備邊司)에서 운영하던 구황청(救荒廳)도 합쳐졌다. 이로써 합쳐진 기관은 평소에는 상평청이라는 이름으로 해당 관청의 곡물을 관리하되, 흉년이 들면 상평청의 역할이 중지되었고 대신에 진휼청이 설립되어 구제 업무를 담당했다. 진휼청도 그 일이 끝나면 다시 혁파되었다[『인조실록』 26년 5월 25일].

이때의 상평청은 굶주린 백성들의 구제를 위한 곡물과 포를 비축하였으며, 화폐가 발행된 이후 포와 전을 함께 관리하였다. 그리고 기근이 들면 진휼을 시행하기 위해 진휼청으로 전환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상평청과 진휼청은 역할이 다른 측면도 있었으나,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두 기관이 하나의 기관에 속하여 병합된 상태로 운영되었으며, 상진청(常賑廳)으로 통칭되기도 했다. 1753년(영조 29)에 상진청은 균역청과 통합되어 선혜청에 속한 6청 중 하나로 역할을 하였으며, 1인의 종6품 낭청(郎廳)이 모든 업무를 담당하였다.

상진청은 대동미·포·전의 출납을 관리하고, 1633년(인조 11) 한때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기도 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조선 초기에 설치된 것과 관련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1626년(인조 4) 6월 상평청이 복설되었다. 이때 구성원은 진휼청의 예에 의거하여 삼공(三公)이 도제조(都提調)를 겸임하였고, 낭관 2원(員), 선혜청 낭청이 겸하는 계사(計士) 1인, 서리 2인, 고직 2명, 사령 3명이었다. 이후 제정된 『속대전』에 의하면 선혜청 소속 낭청은 4원이며, 그 중 1원은 진휼청과 상평청을 겸찰하도록 하였다. 『대전통편』 같은 조에 의하면 1750년(영조 26)에 균역법의 실시와 더불어 균역청(均役廳)을 설치하고 낭관 1원이 상진청을 겸관(兼管)하도록 하였다. 이는 앞서 진휼청과 상평청을 겸찰하던 것이 상진청이었기 때문에, 기관 명칭이 바뀐 결과 겸관하게 한 것이다.

[변천]
상평청은 설치와 혁파가 빈번했다. 이는 상평청이 상설적인 독립 기구로서 존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진청으로 존재하다가, 평시와 달리 흉년이 들어 백성들을 구제해야 하는 시기가 되면 진휼청으로서 역할을 바꾸었다. 상평청과 진휼청이 형편에 따라 그 역할을 바꾸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구도 비상설 기구로서만 존재한 것은 아니다.

『증보문헌비고』의 선혜청조에 의하면, 상평청은 국초에 창설되었으며, 경기의 5참(站) 즉 송도·장단·파주·고양·홍제에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비용을 대는 것을 전적으로 담당하던 기관이다. 대동법 실시와 관련하여 상평청에 경기청을 설치하였으므로, 상평청은 대동법의 시행과 일부 연계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상평청은 자연스럽게 선혜청에 속하여, 대동미·포·전 등의 출납사무를 함께 다루게 되었다. 균역법 시행 이후 균역청과 함께 상진청은 선혜청에 합설(合設)되었다. 그러나 정조대만 하더라도 5도에서는 상평청과 진휼청은 하나의 청으로 합쳐졌지만, 관서·해서·관북은 상평청이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해서에는 진휼청이 없는 상태였다.

선혜청은 원래 동반아문(東班衙門)에 속했으나, 1865년(고종 2)에 선혜청은 준천사(濬川司)와 함께 동반이 아니라고 하여, 병전(兵典) 중추부(中樞府) 아래로 옮겨 기록함으로써 이후에는 서반아문으로 옮기게 되어 위상이 달라졌다. 상진청 또한 선혜청의 달라진 위상에 따라 서반아문으로서 적용을 받았다.

상평청이 확보한 환곡을 상평곡(常平糓) 혹은 상진곡이라 하였다. 환곡을 운영하는 기관인 상평청은 간접적으로 진휼의 기능도 맡았다. 상진곡이 관청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된 것은 모곡을 회록하면서 가능해졌다.

1650년(효종 1) 지평 김응조(金應祖)가 소(疏)를 올려 상평곡의 5분의 4를 회록(會錄)하는 법을 만들어 공용으로 삼을 것을 제안하였다. 호조에서만 모곡의 일부를 회록하던 것을 상평청에서도 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 후 상평청은 모곡의 일부를 재정에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나, 환곡 운영과 관련하여 다른 기관들이 회록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의의]
상평청은 평시에는 미·포·전 등과 관련한 물가 조절, 화폐 주조 등의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흉년과 같은 비상사태에는 그러한 역할은 줄어들고, 진휼청이 신설되어 상평청이 지닌 곡물을 이용한 진휼 업무가 시작되었다. 후에 이들 두 기관이 합쳐져 하나의 기관에 속하게 되었지만, 지역에 따라 상평청과 진휼청을 두는 곳이 일치하지 않았으며, 그 역할도 일치한 것은 아니었다. 같은 기관에 속했으면서도 각자의 성격을 유지하고, 독립적인 면모를 갖추었던 셈이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탁지지(度支志)』
■ 『만기요람(萬機要覽)』
■ 『우서(迂書)』
■ 『약천집(藥泉集)』
■ 『경세유표(經世遺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문용식, 『조선후기 진정과 환곡운영』, 경인문화사, 2001.

■ [집필자] 양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