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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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임관(判任官)

서지사항
항목명판임관(判任官)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주임관(奏任官)
관련어국장(局長), 주사(主事)
분야정치
유형직역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갑오개혁 이후 각부(各部) 대신이 추천하여 국왕이 임명하던 7품에서 9품까지의 하급관리의 관질(官秩).

[개설]
1894년 갑오개혁 때 관품 및 관등 제도가 바뀌면서 전체 관리를 칙임관(勅任官)·주임관(奏任官)·판임관(判任官) 등으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일본의 관제를 수용한 것으로 1894년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시행되었다. 또한 과거 당상관(堂上官)·당하관(堂下官)·참상관(參上官)으로 구분한 것을 이어받은 것이다.


1895년 3월 관등제가 실시되면서 관품제는 실질적인 의미를 상실하였다. 11개 관품 구분이 18개의 관등 구분으로 개정되었다.

[담당 직무]
판임관의 임명 절차는 갑오개혁 과정에서 서둘러 마련되었다. 판임관은 각 아문(衙門)의 대신이 관할하는 관아의 관리 중에서 직접 뽑았다. 선발 대상은 양반이나 귀천(貴賤)을 불문하고 재능 있고 시무(時務)를 아는 자였다. 각 대신은 예비 관료들을 의정부 전고국(銓考局)에 추천했으며, 전고국은 보통 시험과 특별 시험 등 두 차례의 시험을 친 후 해당 대신이 직접 승선원(承宣院)에 추천서를 올리고 계하(啓下)한 다음 국왕의 전교(傳敎)를 받든 직첩(職帖)을 만들어주었다. 판임관은 24개월 기준으로 청렴하고 성실한 자에게는 한 품계를 올려주었다. 다만 주임관으로 승진할 경우에는 험단(驗單) 즉, 증명서를 전고국에 보내는 절차가 추가되었다.

이듬해 3월 내각 관제 반포 이후에도 임명 절차의 기본 골격은 그대로 유지되어, 판임관의 임명은 내각회의를 거치는 칙임관이나 주임관과 달리 전적으로 각부 대신이 전담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그 결과 각부 대신은 소속 관서에 대한 하위직 관리 장악이 용이해졌다. 관찰부를 포함한 지방 관서의 경우에도 주사나 총순에 해당하는 자를 내부에 보고하면 내부에서 서임하고 임명장을 주었다.

아래는 1895년 3월 관제 개혁을 통해 중앙행정 관서에 근무하고 있었던 관료층의 현황을 정리한 것이다.


이 표에서 알 수 있듯이 1895년 중앙 관서의 판임관의 수는 597명으로 주임관의 두 배 정도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지방관과 무관들이 누락되어 있고, 그 이후 각종 자강 정책 추진 관서의 설치와 궁내부의 확대 등을 염두에 둔다면 하급 관료인 판임관의 수는 이보다 훨씬 상회하였다.

판임관의 임명 절차는 주임관 임명과 함께 1898년 12월에 바뀌었다[『고종실록』 35년 12월 8일]. 중앙 관서의 판임관 중에서 주임관 임명에 합당한 자가 없으면 해당 각부의 법령과 규칙으로 시험을 친 후 천거하도록 하였고, 지방관의 경우에는 행실이 단정하고 학식이 있는 자 중에서 정부 회의를 거쳐 상주하여 임명하되, 각부에서 준비한 시험을 치른 다음 합격자에 한해서만 부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부의 관할 학교의 학생과 외국 유학생의 경우 시험을 거쳐 해당 대신이 임의로 임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한성사범학교, 광무학교(鑛務學校), 우무학교(郵務學校)과 전무학교(電務學校), 종인학교(宗人學校), 성균관, 농상공학교, 외국어학교, 의학교, 중학교 등의 졸업생이 학교 교관이나 기사 등 판임관으로 임명되었다. 무관의 경우에는 이러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무관학교 졸업자 중에서 군부의 시험을 거쳐 곧바로 임명되고, 사법관도 법관양성소 졸업자 중에서 역시 법부의 시험을 거쳐 임명되었다. 이러한 변화 역시 초임의 하급 관료에 대한 각부 대신들의 영향력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내각과 의정부 혹은 각부에 속한 판임관은 주사급의 하위직 관리였다. 기술직의 경우에는 기수(技手)가 판임관이었다. 무관들의 경우에는 하사관급이 판임관 대우를 받았다. 1895년 3월에 제정된 관등봉급령에 따르면, 중앙 관서의 판임관급 관리는 각청(各廳) 주사(主事)·각청 서기(書記)·공사관 서기생(書記生)·영사관 서기생·번역관보(飜譯官補)·녹사(錄事)·관세주사(管稅主事)·징세서장(徵稅署長)·징세주사·경무청 감옥서장·경무청 총순·기수 등이었다. 대체로 주사, 서기, 기수, 하사관 등 상관의 지휘를 받는 업무에 종사하는 최하위직 관리였다.

한편, 청의(請議)할 안건이 있을 경우, 칙임관은 황제에게 직접 글을 올릴 수 있는 반면, 현임의 주임관과 판임관은 소속 각사의 대신이 대신 주문(奏聞)하도록 청하거나 의정부에 요청할 수 있었으며, 전임의 주임관과 판임관의 경우에는 중추원에 의견을 내도록 하였다[『고종실록』 36년 1월 4일]. 그러나 이것도 현임과 전임을 망라하고 주임관과 판임관은 모두 중추원으로 청의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종실록』 41년 3월 2일].

[변천]
1906년 12월 다른 관서와 달리 궁내부만은 판임관 관등이 철폐되었다. 이듬해 6월의 내각 관제로의 개정, 7월의 헤이그밀사 사건과 고종의 양위, 정미조약 등 일본에 의한 일련의 국권 장악으로 황제권은 크게 축소되고, 통감의 권한이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다수의 일본인이 각 관서에 관리로 임명되었는데, 하위직인 판임관급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궁내부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정부 조직 개편을 통해 다수의 한국인 관리가 퇴출되었다.

아래 표는 1909년 말 통감부 시기 대한제국 관료의 국적별 인원 현황이다. 특히 탁지부와 농상공부의 경우에는 한국인보다 일본인의 수가 더 많았다. 즉 두 관서 관료들의 국적별 현황은 일본이 보호 통치하에서 식민지 기반 구축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착착 마련해나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 송병기·박용옥·박한설 편저, 『韓末近代法令資料集』 Ⅰ, 대한민국 국회도서관, 1970.
■ 왕현종,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과 갑오개혁』, 역사비평사, 2002.
■ 서영희, 「광무정권의 국정운영과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한 대응」,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 [집필자] 은정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