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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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전(中和殿)

서지사항
항목명중화전(中和殿)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경운궁(慶運宮)
관련어덕수궁(德壽宮), 정동(貞洞), 정전(正殿)
분야왕실
유형건축·능 원 묘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의 정전.

[개설]
경운궁이 중건되면서 최초의 정전은 즉조당(卽阼堂)이었는데, 1902년(광무 6)에 중층의 중화전을 건립하면서 이곳을 정전으로 사용했다[『고종실록』 39년 5월 12일]. 이 건물은 1904년(광무 8) 경운궁 화재로 소실되었고, 같은 자리에 단층의 중화전이 새롭게 건립되었다[『고종실록』 41년 4월 14일].

[위치 및 용도]
중화전은 현재 경운궁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중화전으로 출입하기 위한 전문으로는 중화문(中和門)을 두었다. 중화전의 행각은 복랑과 단랑을 혼합해 만들었는데 중화전 좌우의 행각은 단랑으로 조성한 반면, 중화전 마당을 둘러싼 행각은 복랑으로 조성했다. 중화전 행각에는 중화전으로 출입할 수 있는 문으로 동쪽에 선춘문(宣春門), 서쪽에 흠명문(欽明門)을 두었다. 단랑의 행각에도 동·서 출입문을 두었는데 동문은 함광문(含光門), 서문으로 광우문(光祐門)을 두었다. 중화전 뒷면에는 준명당(浚明堂), 즉조당으로 통하는 문을 두었는데 준명당 부근에 위치한 문이 중명문(重明門)이며 즉조당으로 통하는 대문이 건원문(乾元門)이다. 중화전에서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 고종은 가마의 일종인 여(輿)를 타고 건원문을 통해 중화전으로 들어갔다.


[변천 및 현황]
아관파천 이후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중심으로 등장하면서 처음 정전으로 사용한 곳은 즉조당이었다. 당시 경운궁에는 정전의 역할을 담당할 만한 규모의 건물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임시방편으로 즉조당을 사용한 것이었다. 1897년(광무 1)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와 대한제국 선포와 더불어 즉조당의 명칭을 태극전(太極殿)으로 변경하였고, 태극전은 1898년(광무 2) 2월 13일에 중화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종실록』 35년 2월 13일]. 따라서 이때의 중화전은 현재의 즉조당에 해당한다.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던 중 고종은 1901년(광무 5) 황제국에 걸맞도록 거대한 정전을 건립하도록 지시했다. 새롭게 건립될 정전은 즉조당 전면 마당에 건축하기로 했다. 이후 새롭게 건립할 법전을 중화전으로 명명했고, 옛 중화전은 원래대로 다시 즉조당으로 환원하였다.

1901년에 건립된 중화전에 대해서는 『중화전영건도감의궤(中和殿營建都監儀軌)』에 자세한 내용이 전한다. 중화전은 중층으로 건립되었는데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였다. 거대한 건물로 황제국에 적합한 규모였다. 이 당시 공사는 중화전 및 중화문, 중화전 행각만 새롭게 건립한 것이 아니었다. 중화전 건립과 더불어 경운궁의 궁궐 체계를 모두 새롭게 설정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까지 경운궁의 정문은 인화문(仁化門)이었는데, 중화전 건립과 더불어 인화문을 철거하고 대신에 동쪽의 대안문을 정문으로 삼았다. 또 중화문과 대안문 사이에 조원문(朝元門)을 건립해서 궁궐의 삼문체계를 확립했다. 이렇게 삼문체제를 확립하면서 경운궁은 창덕궁, 경희궁과 유사한 궁궐 체계를 완성하게 되었다.

중화전 건립에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중화전 행각의 규모였다. 기존의 궁장(宮墻)으로는 중층의 중화전 규모에 적합한 행각을 만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기존의 궁장을 남쪽으로 넓히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 공사는 인근 각국 공사관들과 마찰을 불러일으켰으며 공사관들은 다른 곳으로 이전해 가기로 합의했다. 가장 먼저 이전한 공사관은 독일 공사관이었다. 독일 공사관은 현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중화전 공사와 더불어 왕실에서 매입하였다.



고종은 1894년(고종 31)에 기존의 관제를 크게 변화시켰다. 관리의 통솔 및 정무 처리는 의정부(議政府)가 담당하고, 왕실 관련 제반 사항은 궁내부(宮內府)가 담당하게 하여 기존 의정부에 집중되어 있던 일을 양분하였다. 이로 인해 궁궐에는 의정부와 궁내부를 위한 2채의 건물이 필요했다. 원래 의정부 건물은 인화문 내에 서양식으로 건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화전 행각 공사를 위해서는 의정부 이건이 필요했고, 이때 의정부를 독일 공사관 자리에 건립했다. 의정부와 경운궁은 통행이 용이하도록 운교(雲橋)로 연결했는데 현재도 당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금천교의 위치 역시 변경되었다. 인화문 내에 위치하고 있던 금천교를 대안문 주변으로 이건한 것이다. 기존의 물길은 모두 은구(隱溝) 형태로 덮어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했으며 대안문 부근에서 금천이 드러나게 바꾸었다.

1904년 경운궁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중화전 역시 소실되었고 곧바로 재건되었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중층의 거대한 규모로 중건하지는 못했다. 새로 건립한 중화전은 기존의 중화전과 같은 평면의 크기로 만들어졌지만 단층으로 지어졌다. 또 중화문은 기존의 자리보다 4칸 물려 지었다. 그 결과 중화전은 전보다 훨씬 넓은 마당을 갖게 되었다.

중화전이 재차 건립되었지만 1905년(광무 9)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실제로 중화전에서 국가적 의식을 진행한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후 중화전은 계속 경운궁의 법전으로 남아 있었지만 행각은 만들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훼철되었다. 1911년부터 중화전 행각 서쪽에 석조전 전면 정원 공사가 시작되었고, 1913년에는 중화전행각 동쪽에 이왕직사무소 건립이 진행되었다. 이 두 공사 결과 중화전 행각이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중화전 동남쪽에 ㄱ자형 건물이 남아 있는데 이것이 중화전 행각의 일부이다.


[형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평면을 하고 있고 공포는 다포, 지붕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월대 전면에는 품계석이 설치되었고 정문으로 중화문이 현존하고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중화전에서는 1907년(광무 11) 1월 황태자비 윤씨(尹氏)에 대한 책비례(冊妃禮)가 진행되었으며[『고종실록』 44년 1월 24일], 1907년 3월 11일에는 영친왕의 관례가 진행되었다[『고종실록』 44년 3월 11일].

[참고문헌]
■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
■ 『[임인]진연의궤([壬寅]進宴儀軌)』중화전영건도감의궤(中和殿營建都監儀軌)』
■ 문화재청, 『덕수궁 복원정비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용어 해설』, 문화재청, 2009.
■ 小田省吾, 『德壽宮史』, 李王職, 1938.

■ [집필자] 이연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