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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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관청(宣傳官廳)

서지사항
항목명선전관청(宣傳官廳)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서반(西班), 병조(兵曹), 군무아문(軍務衙門)
하위어궁궐(宮闕) 숙위(宿衛), 내취(內吹)
동의어우시어청(右侍御廳)
관련어선전관(宣傳官), 가전훈도(駕前訓導), 서반승지(西班承旨), 체아직(遞兒職), 무승지(武承旨), 정삼품(正三品) 아문(衙門), 겸선전관(兼宣傳官), 문신겸선전관(文臣兼宣傳官),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 무겸청(武兼廳), 감생청(減省廳), 선청일기(宣廳日記)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왕의 호위와 왕명 전달 등을 담당하던 관청.

[개설]
선전관청은 조선시대 서반(西班) 가운데 가장 청요직(淸要職)으로 꼽히는 선전관(宣傳官)이 소속된 관청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1464년(세조 10)이지만 왕의 호위와 궁궐 숙위(宿衛)를 강화할 목적으로 1457년에 선전관이 설치되었으므로 선전관청의 성립 시기도 이 무렵으로 보인다.

선전관청은 『경국대전』에서 정식 관청으로 오르지 못한 채 임시로 운영되다가 『속대전』에서야 정3품 아문으로 성립되었고 인원도 대폭 늘었다. 조선전기에는 선전관 8명이 소속되었으나 『속대전』에서는 21명으로 증가했으며 겸선전관(兼宣傳官)도 55명이나 되었다. 『대전통편』에서도 선전관이 24명으로 늘었고 겸선전관도 52명이 배속되었다.

선전관청은 왕명을 전달하고 부신(符信) 출납 등을 관장하였다. 또한 기나 북 등으로 군대의 행동을 호령하는 신호법인 형명(形名)을 담당하였고, 왕의 거둥 때 북이나 나팔을 치거나 불던 계라(啓螺)를 맡기도 했다.

선전관청의 위치는 무승지(武承旨)의 역할을 담당한 관청답게 창덕궁의 경우 선정문(宣政門) 안이었으며, 경희궁은 건명문(建明門) 안에 있었다. 고급 무관으로 승진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했던 선전관청은 1894년(고종 32) 갑오개혁 당시 군무아문(軍務衙門)에 소속되었고, 1900년에 우시어청(右侍御廳)으로 계승되었다가 1907년 무렵에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왕조실록』에 선전관청이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1464년이나 선전관청의 설립 시기는 세조가 집권하면서 선전관을 설치한 시기로 본다. 선전관은 왕위 찬탈을 통해 즉위한 세조가 1457년에 왕의 호위와 궁궐 숙위를 강화할 목적으로 설치하였다. 처음에 가전훈도(駕前訓導)란 이름으로 왕 호위를 담당하다가 1457년에 선전관으로 개칭되었다.

선전관은 왕 가까이에서 호위와 숙위를 담당하는 직책이라 하여 ‘서반승지’로 불렸으며, 한림(翰林: 예문관)이나 옥당(玉堂: 홍문관)에 비유될 만큼 서반직 중 최고의 청요직으로 꼽혔다. 또 서반직 가운데 자손에게 음서(蔭敍)의 혜택을 내릴 수 있는 특권까지 누렸다. 그러나 선청관청은 조선전기에 정식 아문으로 성립하지 못하여 선전관은 체아직(遞兒職)으로 운영되었다. 1485년의 『경국대전』에는 선전관청이 올라 있지 않으며, 「병전(兵典)」「번차도목(番次都目)」조에 품계별로 선전관 8명의 정원과 체아록(遞兒祿)만 규정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1746년의 『속대전』에 와서야 선전관청이 정3품 아문으로 성립되었다.

조선후기에 선전관청이 정식 아문으로 격상된 배경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있었다. 전쟁을 거치면서 중앙군 제도가 오군영제로 바뀌고, 왕궁이 있는 수도 방위에 역점을 두면서 왕의 신변 보호와 궁궐 수비가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궁궐 문을 관장하는 수문장청이 선전관청과 마찬가지로 『속대전』에서 정식 관청으로 성립된 것도 같은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선전관청의 위치는 창덕궁의 경우 선정문 안에 있었는데 바로 승정원의 북쪽에 해당하므로 선전관이 ‘무승지’의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경희궁은 건명문 안에 있었다. 그리고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이 근무하던 무겸청(武兼廳)이 창덕궁 광범문(光範門) 안과 경희궁 금상문(金商門) 안 북쪽에 있었다.

[조직 및 역할]
선전관청에는 정3품에서 종9품에 이르기까지 총 8명의 선전관이 소속되었다. 그리고 『경국대전』에는 규정이 없으나 『세조실록』을 비롯한 각 왕대별 『조선왕조실록』에 왕이 필요에 따라 수시로 겸선전관을 임명하고 있어 겸선전관 제도도 선전관을 설치한 직후부터 함께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전관청은 조선전기의 정식 관청은 아니었으나 왕의 측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경국대전』「병전」「입직(入直)」조에 따르면 선전관 2명은 형명(形名)으로써 대궐 안 근처에서 숙직한다고 되어 있어 왕의 호위와 시위가 주요 임무였다. 이 밖에도 군사 업무에 관한 왕명 출납, 부신(符信) 출납 등 왕의 신변 보호는 물론 군사(軍事)와 관련한 업무를 맡았다. 또한 성 안팎이나 한강의 조세 창고 등을 순행하면서 해당 관리의 근무 상태를 살피거나 국가에 위급한 일이 생기면 각 지방에 파견되어 군사를 모집하는 일도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선전관청의 임무는 『대전통편』에서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형명(形名), 계라(啓螺), 호위, 왕명 전달, 부신(符信) 출납을 관장하는 관청으로 규정되었다.

선전관청의 위상은 매우 높아 이식(李植)은 「선전관제명록서(宣傳官題名錄序)」에서 “선전관청의 위치가 액문(掖門) 밖 정방(政房)의 오른쪽에 있어 좌우 사관(史官)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출입하기 때문에 시종(侍從)의 칭호를 지니면서 특별한 은혜를 받아 왔다.” 하면서 궁궐 안의 일반 무관(武官)들이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지위라고 소개하였다.

선전관청의 높은 위상은 문반 청요직의 신참례(新參禮)처럼 새로 입사한 선전관의 신고식이 혹독한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선조실록』에도 “선전관청에서 새로 들어온 선전관을 허참(許參)할 때 술과 고기를 장만하도록 요구하여 잔치에서 술을 마시면서 낭비하는 폐단이 다른 데보다 지나치다.” 하는 기록이 있다[『선조실록』 36년 8월 13일]. 또 『임하필기(林下筆記)』에도 “선전관의 신참례에는 큰 담뱃대로 담배를 피우게 하니, 그 담뱃대가 종지보다 커서 신참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였다. 이는 곧 코로 한 말의 식초를 들이마시게 하는 것과 같으니 역시 선전관청에서 내려오는 풍습이다.” 하였다.

[변천]
선전관청은 세조가 승하한 이후 임시변통으로 둔 관청이므로 폐지하자는 상소가 이어졌지만 조선후기까지 계속 증원되면서 서반 최고의 관청으로 자리 잡았다. 『속대전』에는 선전관청에 대해 “『경국대전』의 「번차도목(番次都目)」에는 단지 8명이 있었으나 후에 정직(正職)으로 하여 인원수를 늘리고 관청을 설치하였다.” 하고 밝히고 있다. 소속 선전관도 선전관 21명에 겸선전관 55명까지 더해져 총 76명이 배속된 관청으로 성장하였다.

선전관 21명의 구성을 살펴보면 정3품 당상관인 선전관 1명이 행수(行首)로서 총책임을 담당했고, 그 밑으로 종6품 3명, 종9품 17명이 있었다. 겸선전관은 종6품의 문신(文臣)이 겸하는 문신겸선전관 5명, 종6품의 무신(武臣)이 겸하는 무신겸선전관 38명, 종9품의 무신이 겸하는 무신겸선전관 12명이 있었다.

선전관청은 『대전통편』에 이르러 더 큰 변화를 맞아 임무가 구체적으로 명시되는 한편 인원도 선전관 24명과 겸선전관 52명으로 바뀌었다. 선전관이 세 자리가 늘어나 정3품 4명, 종6품 6명, 종9품 14명으로 되었으며, 겸선전관은 종6품의 문신이 겸하는 문신겸선전관 2명, 종6품의 무신이 겸하는 무신겸선전관 38명, 종9품의 무신이 겸하는 무신겸선전관 12명으로 조정되었다. 이후 1867년의 『육전조례(六典條例)』에서는 선전관이 25명으로 다소 늘어난 반면에 겸선전관에서 무신겸선전관 자리는 없어지고 문신겸선전관 2명만 남게 되었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선전관청에서 군영 악대인 내취(內吹)를 관장했는데, 영조대에 약 100여 명이었다가 정조대에 150명으로 늘어났다.

선전관청의 폐지 시기에 대해서는 1882년(고종 19)으로 알려져 있으나 잘못된 것이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1882년 감생청(減省廳)에 의해 혁파된 곳은 무겸청으로, 무신겸선전관을 부장청을 비롯하여 훈련원에 소속시켰고 선전관청은 혁파되지 않았다. 선전관청은 1894년 갑오개혁 당시 군무아문(軍務衙門)에 소속되었고, 1900년에 우시어청(右侍御廳)으로 계승되었다가 1907년 무렵에 폐지되었다.

참고로 오늘날 선전관청의 업무를 일지 형식으로 기록한 『선청일기(宣廳日記)』가 정조대부터 고종대에 걸쳐 110책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육전조례(六典條例)』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택당집(澤堂集)』
■ 이숙희, 『조선 후기 군영악대: 취고수·세악수·내취』, 태학사, 2007.
■ 박홍갑, 「조선 전기의 선전관」, 『사학연구』41, 1990.
■ 안병일, 「조선 왕조의 선전관청에 관한 연구」, 전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7.

■ [집필자] 정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