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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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소(校典所)

서지사항
항목명교전소(校典所)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중추원(中樞院)
관련어교정소(校正所), 법규교정소(法規校正所)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대한제국 초기 신·구 법전의 절충과 법전 편찬을 위해 설치한 기관.

[개설]
교전소는 1897년 3월 신·구(新·舊) 법전의 절충과 법규 작성을 위한 기구로 설립되었다. 여기에는 의정부 의정과 찬정, 외부 대신, 궁내부 특진관, 외국인 고문관 등이 참여하였다. 1897년 4월 다섯 차례 회의를 거쳐 교전소 회의 규칙과 관제 조사 위원, 형률 조사 위원 등을 선임하였으나 법령 제정의 방향과 권력 구조의 개편을 둘러싸고 크게 대립하면서 중단되었다. 1899년 6월 법규교정소(法規校正所)로 교체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96년 2월 아관파천 이후 고종과 정부 대신들은 새로운 개혁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같은 해 9월 기존의 내각 관제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다시 설치하였다. 당시 상황은 갑오개혁 실패 이후 “법과 규율이 문란해져서 옛 법은 폐지되고 새 법은 아직 세우지 못하였으니 마치 법이 없는 나라”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법 체제의 정비는 필수적인 과제로 제기되었다.

1897년 3월 고종과 의정부 대신들은 새로이 장정(章程) 제정과 법률 개정을 모색하였다. 새로운 법률 체계를 ‘조선장정(朝鮮章程)’이라고 부르며 국가 체제 전반을 규정하는 법률 개정을 지향했다. 1895년 6월 15일 갑오개혁 때 법률기초위원회가 설립되었지만 법률 정비에 그쳤다. 1897년 3월 16일 고종은 신·구 법전의 절충과 법규 작성을 위한 기구의 설립을 명하였다. 같은 해 의정부는 3월 23일 교전소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에 교전소를 중추원(中樞院) 산하에 두고 정부 부서의 주요 관료들을 배치했다.

[조직 및 역할]
1897년 3월 23일 교전소 소속 관원은 총재대원(總裁大員)으로 의정부 의정 김병시(金炳始)와 궁내부 특진관 조병세(趙秉世)·정범조(鄭範朝) 등이 배치되었다. 부총재대원(副總裁大員)으로는 의정부의 찬정과 외부 대신 등이 임명되었다. 위원은 서재필과 외국인 고문관 르장드르([李善得], LeGendre, C. W.), 그레이트하우스([具禮], Greathouse, C. R.), 브라운([柏卓安], Brown, J. M.) 등이었다. 같은 해 4월 15일에는 지사원(知事員)과 기사원(記事員)으로 각 부의 국장들이 임명되었다. 위원과 지사원 중에는 갑오개혁에 참여한 관료나 독립협회 지도자가 참여하고 있어 법제 개혁에 적극적인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1897년 4월 12일 교전소 1차 회의가 경운궁 내 외부 대신 사무실에서 개최되었다. 대신으로 박정양·윤용선·이완용, 고문관으로 르장드르·그레이트하우스·브라운·서재필 등 7명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박정양을 회의의 주석으로, 서재필을 참서관으로 정했으며, 전문 16조·부칙 5조로 된 「교전소 회의 규칙」을 제정하였다. 이 회의 규칙은 일종의 의사 진행 방식을 담았다. 조선어와 영어로 서로 번역하고 주요 법률과 장정을 개정할 때에는 낭송과 토론, 결회(結會) 등의 순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의사결정권은 위원 이상으로 한정하였고 최종 결론은 다수결의 원칙을 따른다는 것 등을 규정하였다.

1897년 4월 19일의 제3차 회의에서는 관리의 승진과 퇴출[官人黜陟]의 규칙 제정 등을 조사하는 관제조사위원과, 형법 등 신규 법률을 초록하여 보고하는 형률조사위원으로 각각 5명씩을 선발하였다. 1897년 4월 29일의 제5차 회의에서는 법령 제정 방향과 권력 구조의 개편을 둘러싸고 입장이 갈려 교착 상태에 빠졌다. 고종과 측근 세력들은 기존의 의정부 관제를 중심으로 간관(諫官) 제도의 강화를 추구하였다. 반면 서재필, 윤치호 등은 중추원을 의회로 바꾸어 의정부를 견제하려는 국가 권력의 분권을 지향하였다. 이후 교전소는 당분간 활동하지 못하였다.

[변천]
1897년의 5차 교전소 회의 이후, 1899년 6월 23일 고종은 의정부 산하에 교정소(校正所)를 설치하였다. 같은 해 7월 2일에는 기관 이름을 법규교정소로 바꾸었다. 1895년 4월 1일 이후 각 부에서 제정한 칙령과 법률 장정, 각부령을 수록한 책자를 법규교정소에 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법규교정소는 이전 교전소의 기능과 역할을 대체하는 기관으로서, 이전 교전소와 비슷하게 법률과 규정을 개정하는 모든 정책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양 등 개혁 관료와 윤치호 등 독립협회 계열을 배제하였다는 점에서 황제권의 강화와 보수적인 법제 개정을 추구하고 있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교전소일기(校典所日記)』
■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 『속음청사(續陰晴史)』
■ 『관보(官報)』
■ 『독립신문』
■ 송병기·박용옥·박한설 편저, 『한말근대법령자료집』1~4, 국회도서관, 1970~1972.

■ [집필자] 왕현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