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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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릉(禧陵)

서지사항
항목명희릉(禧陵)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능원(陵園)
관련어서삼릉(西三陵), 정릉(靖陵), 헌릉(獻陵)
분야왕실
유형능 원 묘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의 능.

[개설]
장경왕후는 중종의 제1계비(繼妃)로,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여필(尹汝弼)의 딸이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후에 숙의(淑儀)가 되었다가 이듬해 단경왕후(端敬王后)가 폐위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1515년(중종 10)에 뒷날 인종이 되는 왕자를 낳고 산후병으로 승하하였는데, 광주(廣州)에 있는 헌릉(獻陵)의 서쪽 언덕에 안장하고 능호를 희릉이라 하였다. 그 뒤 희릉의 입지가 불길하다는 김안로(金安老)의 주장에 따라 1537년(중종 32) 오늘날의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삼릉으로 옮기게 되었다.

[조성 경위]
1515년(중종 10)에 장경왕후가 승하하자, 경릉(敬陵)과 헌릉 부근이 산릉의 물망에 올랐다. 중종은 자신이 죽은 뒤 합장하여도 봉분은 쌍분으로 할 것을 염두에 두어 터를 골랐는데, 그 결과 헌릉 서쪽 언덕이 능지(陵地)로 결정되었다. 현궁(玄宮)의 자리를 잡고 땅을 파 내려가던 중 큰 돌이 깊이 박혀 있어 파낼 수 없게 되자, 아래쪽으로 자리를 옮겨 희릉을 조성했다.

그런데 희릉이 한강 건너 광주 땅에 조성됨에 따라 발인일이 문제가 되었다. 3개월 만에 발인할 경우에는 길일이 없고, 5개월 만에 발인할 경우 장마로 길이 진창이 되기 때문이었다. 결국 발인일을 2개월 만인 윤4월로 정하여 국장을 진행하였다.

[조성 상황]
희릉의 현궁은 회격분(灰隔墳)으로 조성되었다. 능상은 봉분을 만들어 난간석을 둘렀으며, 뒤쪽에는 곡장(曲墻)을 설치했다. 봉분의 사방에는 호석과 양석 각 4개씩을 배치하였다. 봉분 상계(上階)에는 혼유석과 망주석 1쌍을 설치하고, 중계(中階)에는 장명등과 문인석, 마석 1쌍씩을, 하계(下階)에는 무인석과 마석 1쌍씩을 두었다. 맞배지붕으로 된 정자각은 정전 3칸에 배위청 3칸으로 조성되었다.

[변천]
1515년 산릉 공역 당시에 희릉의 터가 왕릉으로 삼기에는 불길하다는 소문이 돌았음에도 불구하고 장경왕후를 그대로 그곳에 예장했다. 그러나 아들 김희(金禧)를 부마로 들인 김안로가 1537년(중종 32)에, 희릉의 입지가 불길하니 당시 능 조성에 관련되었던 자들을 처벌하고 능을 천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희릉을 현재의 고양시 서삼릉 안으로 옮겼다. 더불어 희릉의 조성을 담당했던 김안로의 정적들은 모두 처벌을 받았다.

1544년(중종 39)에 중종이 승하하자, 희릉의 곁에 능침을 만들고 두 능을 합하여 정릉(貞陵)이라 하였다. 그러나 중종의 능은 1562년(명종 17)에 문정왕후(文定王后)에 의해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의 선릉(宣陵) 곁으로 천장되었고,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만 남게 되었다.

[관련 사항]
희릉은 서삼릉의 하나로 효릉(孝陵), 예릉(睿陵)과 함께 사적 제20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다른 조선 왕릉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집필자] 정정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