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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幼學)

서지사항
항목명유학(幼學)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유생(儒生)
동의어유학호(幼學戶)
관련어교생(校生), 기재생(寄齋生), 동몽(童蒙), 성균관(成均館), 업무(業武), 업유(業儒), 학생(學生), 향교(鄕校)
분야사회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에 학교에 적을 둔 무위무관(無位無官)의 양반 유생.

[개설]
유학(幼學)은 조선시대에 학교에 적을 둔 관학생으로서, 군역을 면제받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신분과 역종을 밝히게 되어 있는 호적 및 각종 공사 문서에 기재된 직역(職役)이었다. 호적이 신분을 판별하고 군적을 작성하는 기본 대장임은 물론 차역(差役)을 목적으로 작성되었다는 사실과 호패에 쓰이는 역명으로서 사목에 기록되고 있는 사실을 보면, 유학은 틀림없는 직역이었다.

유학은 『예기(禮記)』에서 "인생십년유학(人生十年幼學)"이라 하고, 유(幼)는 15세 혹은 19세 이전의 남자를 가리킨다고 한 것처럼, 동양의 유교권 내에서 신분이 아니라 교육의 입문 단계에 있는 10세부터 20세 이전까지의 초학 유생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이것이 조선에서는 독특하게 일정한 신분층의 직역으로 변화되었다. 조선후기의 여러 기록에서 유학의 본의는 저버린 채, 40~50세가 넘었어도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이나, 살아 있는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무관(無官)이면 유학이라 쓰니 크게 잘못되었다.

[내용 및 특징]
직역으로서의 유학의 연원은 고려말로 소급되며 교육 및 과거 제도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에서 그 자취가 드러나고 있다.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전조과거사적(前朝科擧事蹟)」을 살펴보면, 성균유학(成均幼學)과 유학이 찾아진다. 성균유학은 1371년(고려 공민왕 20)과 1374년(고려 공민왕 23)에 각각 1명씩 나오고, 유학은 우왕과 공민왕 때에 모두 7명이 나타난다. 그리고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 공민왕 20년조를 보면, "성균학관이 생원·십이도생도를 이끌고 …… 유학·생원 등을 이끌고"라는 기사가 있다. 따라서 유학은 성균관 소속 유생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십이도생도와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유학이 성균관 소속 유생이었음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1408년(태종 8) 11월에 임금이 성균관에 명하여 매월 말에 동서제(東西齋) 생원(生員)이 몇 사람이고, 유학이 몇 사람인가를 갖추 기록하여 계문(啓聞)하고, 승정원에서 성균관 관원의 근만(勤慢)을 상고하게 하였다. 오부학당(五部學堂)도 역시 이와 같이 하였다.

1412년(태종 12) 5월의 『국학사의(國學事宜)』에도 생원과 함께 유학의 권과법(勸課法)이 수록되어 있다. 1429년(세종 11) 7월에는 "예조에서 계하기를, ‘전에 이 성균관의 생원과 유학은 항상 150인을 양성하였는데, 지금 또한 유음자손(有蔭子孫)을 부학(赴學)하게 하여 액수(額數)가 부족합니다. 청컨대, 전액(前額)에 50인을 가설하여 항상 200인을 양성한다면 생원이 적고 유학이 곧 많더라도 100인을 넘지 못하게 하소서’라 하였다."고 한 바와 같이, 성균관에는 생원과 유학이 소속되어 있었다[『세종실록』 11년 7월 2일].

1433년(세종 15) 8월에는 "아조는 국학에 유학 100인을 설치하고 이름하기를 기재(寄齋)라 한다. 궐(闕)이 있으면, 예조와 성균관이 함께 학당생도를 시험하여 승보(陞補)시키는 것이 옛날의 소학을 거쳐 대학에 들어가는 뜻에 합치된다."고 하였다[『세종실록』 15년 8월 22일]. 곧 성균관 소속 유학은 정원이 100명이며, 궐액(闕額)이 있을 경우에는 사학 생도를 시험하여 승보시켰다는 것이다. 이 유학을 하재에 기거한다고 하여 기재생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성균관의 승보시 자격은 사학 유생은 나이 15세 이상으로 『소학(小學)』·사서일경(四書一經)을 통한 자, 유음자손은 『소학』을 통한 자 그리고 일찍이 문과·생원진사·향한성시를 합격한 자로서, 입학 대상을 제한하였다. 상재생인 생원과 진사 외의 기재에의 입학은 사학 유생과 유음자손이 그 대상이었으므로 승보시는 양반 자제들이 국학에 입학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런데 이 승보시 자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기재생만이 유학을 칭한 것은 아니었다. 1511년(중종 6)의 기사를 보면, 사학 유생은 매달 열흘마다 치르는 제술 시험에서 입격한 자에게 생원진사시 복시에 직부하도록 하였으며, 이것은 성균관 기재생도 같다고 하였다. 도회(都會) 응시 자격은 『소학』의 공(功)에 이른 15세 이상자였다. 따라서 사학 유생이 성균관 기재생과 동등한 도회 응시 자격을 가진 것으로 보아, 이들도 유학으로 칭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유학은 성균관과 사학에 소속된 유생이었다. 연령으로는 15세 이상자로서 그 이하인 동몽(童蒙)과 구별되었다. 승보시 제한 연령과 도회 응시 자격 그리고 사학의 입학 연령이 8세 내지 10세였음을 감안할 때, 향교에서 15세 이하의 동몽은 정원 내에 둘 수 없다는 『경국대전(經國大典)』 규정과 함께 15세 이하인 자는 유학이 아닌 동몽으로 칭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향교의 유생도 조선전기에는 과거에 응시할 경우에 유학을 전력으로 삼았다. 15세기 『사마방목(司馬榜目)』을 조사해 보면, 유학을 전력으로 생원·진사가 된 사람은 약 74.2%를 차지하여 가장 많았다. 그런데 교생을 전력으로 과거에 응시한 예는 전혀 없었다. 따라서 조선전기에는 교생도 사마시나 문과 응시 때 차별 없이 모두 유학을 호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로 1535년(중종 30)에 "생원과 진사는 서도(書徒)로서 원점(圓點)을 삼기 때문에 혹 취학하는 자가 있으나, 유학은 오직 6월 도회에 서도를 상고하고 기타 법이 없는 까닭으로 사학생도가 게으르고 흩어져 취학하지 아니합니다. 금후에는 유학이 경외를 통틀어 또한 서도로서 그 원점을 정하여 향한성시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고"라 한 것을 들 수 있다[『중종실록』 30년 12월 11일].

그리고 1626년(인조 4)에 김육(金堉)이나 인조는 "옛날의 교생은 모두 사족(士族) 혹은 잠영세족(簪纓世族)"이라 한 바와 같이, 향교의 교생인 유학은 모두 양반 자제들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전기의 유학은 15세 이상 된 관학 유생 곧 사학과 성균관 기재, 향교에 적을 둔 양반 유생들을 칭하는 직역이었다. 이들은 합법적으로 군역을 면제해 주는 특전을 향유하면서 유학(儒學)을 전업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관료로 진출하였다. 조선초에는 문과뿐 아니라 역과와 율과 등 잡과에도 응시하여 기술관으로 진출하는 사례도 많았다. 그러나 점차 양반의 기술직 천시 현상으로 유학도 잡과 응시를 기피한 반면에, 기술직은 중인층에 의해 세전되어 나갔다.

유학은 과거 응시에 의한 출사뿐 아니라 천거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조선초부터 경외를 막론하고 유생의 천거를 규식으로 정하여 시행했으며, 특히 1633년(인조 11)에 이르러서는 중외의 학생 가운데 재행자(才行者)를 뽑아 유학초선(幼學抄選)이라 하고 생원·진사·음재(蔭才)와 함께 추천되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시행하였다[『인조실록』 11년 4월 1일].

숙종 연간에는 생진과 유학이 벼슬한지 오래지 않아 수령으로 임명되는 폐단을 막기 위해 유학으로서 벼슬하는 자는 비록 이미 수령 취재(取才)에 응하였어도 감찰, 금부도사, 장례원 낭관을 거친 후에야 수령에 추천될 수 있도록 하는 경과 규정을 두었다. 그 후 1726년(영조 2)에 연령의 제한으로 이어져, 생진 30세 이상, 유학 40세 이상이 되어야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 제도는 결국 『속대전(續大典)』에 법제화하여 각 도 전함, 생진, 유학 중 재행이 드러난 자는 식년마다 연초에 천거토록 규정하였다.

유학은 취재를 통하여 교도(敎導)로 진출할 수 있었다. 1423년(세종 5)의 기사를 보면, 성균관 권지와 생원·진사·문과 회시초장(會試初場)의 강경(講經)에 합격한 자, 예조에서 취재한 자, 각 도 감사가 취재한 자를 교도로 임명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5년 4월 22일]. 유학이 예조와 각 도 감사의 취재에 응시하여 교도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1429년(세종 11) 9월에 좌사간 유명문 등이 올린 상소에서, 나이가 많은 유학이 교도에 임명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변천]
16세기에는 군포, 방납 등의 폐단으로 소농민층의 유망 현상이 활발해지고 사림의 등장으로 향촌 질서가 강고해지면서 신분의 사회적 불평등 관계가 더욱 심화되어 나갔다. 이는 기존 신분 구조의 재편 작업과 함께 신분의 개념상 및 지위상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유학도 이에 편승하여 신분의 질적 분화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가장 큰 원인은 일반 양인이 어떠한 방법으로든 학교에 입학하거나 호적 작성 및 과거 응시 시 유학을 모칭(冒稱)·모록(冒錄)하는 것이었다.

세조 연간에 이미 성균관은 사학 유생의 승보로도 차지 않고 오히려 반궁(泮宮)에 거하는 자는 모두 피역지도(避役之徒)라 할 정도였다. 1508년(중종 3) 정월에 전적 임유(任瀏)가 사학의 액외유생(額外儒生)도 별도의 학장을 두어 교육시킬 것을 주장한 바 있다. 사학에도 정원 외의 유생이 입적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학이 도리어 향교와 같아서 마치 중학은 입학하는 자가 모두 통사 등 하류의 자제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천히 여겨 더불어 짝하기를 부끄러워하고 나아가지 않습니다."라고 한 바와 같이, 중부학당의 경우 중인 이하 신분의 자제들로 채워지는 등 사학이 향교처럼 변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양반 자제들은 이들을 천히 여겨 짝하기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학교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향교도 군역을 피하고자 향학에 이름을 올리는 자들이 많아 세조 연간에 정원을 정하였다. 따라서 교생은 액내·외생으로 구별되어 각각 동·서재에 기거했으며, 16세 이하의 동몽은 정액 외로 둘 수 있었으므로 액외생에 포함되었다. 지방의 향교 교생도 군역을 피할 목적으로 액외 혹은 동몽을 모칭하거나 교안(校案)에 모록하는 현상들이 관행처럼 빚어졌다.

관학 기관의 피폐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극에 달하였다. 정부에서는 국가 기강을 바로잡기 위하여 퇴폐해진 관학을 부흥시키고, 피역자의 모속으로 인한 학교 제도의 모순을 타개하고자 유안(儒案) 혹은 청금안(靑衿案)에 누락된 자는 과거 응시를 불허하는 제도를 시행하였다.

인조 연간에 성립된 『호패사목(號牌事目)』을 보면, "유학은 서울인 즉 모학학생(某學學生)이라 쓰고, 관하재(館下齋)는 성균학생(成均學生)이라 쓰며, 지방인 즉 교생 혹은 액외교생이라 쓴다."고 하였다. 이것은 유학의 경우 호패의 직역 기재를 보다 구체적으로 표시할 것을 나타낸 것이다. 곧 유학은 사학의 학생과 성균관 하재의 학생, 교생 혹은 액외교생 등 학교에 적을 둔 유생을 포괄하는 직역명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특기할 점은 유생으로서 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자는 한량(閑良)이라 칭해야 한다고 주기(註記)한 사실이다. 이로써 유학이 학교에 적을 둔 학적자로서의 유생 명칭임을 재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경제가 꾸준히 변화되면서 신분제의 붕괴 현상이 가속화되었고 유학도 신분 체제의 갈등 현상과 결부되어 그 개념이 변화하고 지위도 하락해 갔다. 유형원(柳馨遠)은 「학교사목」에서 "지금 외방의 향교는 양반이 동재(東齋)에 거하고 서류(庶類)가 서재(西齋)에 거한다."고 하였다. 즉 유학은 양반의 직역임이 틀림없으나, 교생은 양반이 아닌 서류로서 유학을 업으로 삼는 자들이었다. 이 당시에는 이러한 구분이 지역별로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향교에 서류나 일반 양인이 입학하는 일은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1696년(숙종 22)에 양반 신분이었던 업유(業儒)·업무(業武)가 서얼의 문무 호칭으로 변하고 동시에 그 서얼 자손들에게 유학 호칭을 허락하였다.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호적조(戶籍條)」에는 서얼의 자손이 호적에 유학이라 기재하여도 무방하다고 하고 그 범위를 아들까지로 제한하였다. 반면에 서얼들의 업유와 업무 호칭은 『속대전』에 법제화되었으며, 유학을 모칭하는 자는 군보(軍保)에 충정되도록 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유학의 모칭·모록이 일반화되어 갔다. 과장의 폐단으로 인한 유학의 모칭이 성행하여,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과거는 지방에서 천거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외람되이 잡스러운 자들이 모두 과장에 들어가 이로 말미암아서 유학을 모칭한다. 공천·사천이라도 모두 이를 무릅쓰고 있으니 장차 전국의 백성들이 다 유학이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익(李瀷)도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지금 풍속에 벼슬이 없는 선비는 살아서는 유학을 칭하고 죽어서는 학생을 칭한다. …… 이 백수면서 관직이 없는 자가 오히려 가리켜서 유학이라 하니, 불가하다."라고 하였다. 유학은 벼슬이 없는 선비 혹은 백수면서 관직이 없는 자의 직역으로 변하였던 것이다. 구례향교 「향교서재안(鄕校西齋案)」(1843년) 서문을 보면, 서재유생도 호적에 유학이라 기재할 수 있으며 이들의 행세는 중인으로 처신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조선후기에는 18~19세기 호적 자료를 통해 밝혀졌듯이 양반 신분층의 증가 현상이 뚜렷한 가운데 그 대부분을 유학이 차지했을 정도로 유학의 인구 구성비가 높았다. 이는 여러 세대에 걸쳐 누적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사회경제적 모순에 따른 신분제의 붕괴가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양천의 신분 상승 욕구가 모칭·모록 등 다양한 형태로 노출되었는가 하면, 정부의 납속제 시행과 호총(戶總) 운영의 실제 그리고 그 폐해로 인해 유학 인구수는 대폭 증가하였다. 그럼으로써 유학의 지위는 양반으로서의 신분과 함께 중인, 서인 등 여러 층위를 갖는 신분의 혼효 현상을 빚고 말았다.

[참고문헌]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호패사목(號牌事目)』
■ 송준호, 『조선사회사연구』, 일조각, 1987.
■ 최승희, 「조선후기 유학·학생의 신분사적 의미」, 『국사관논총』1, 1989.
■ 임민혁, 「조선후기의 유학」, 『청계사학』8, 1991.
■ 이준구, 「19세기의 유학층 확대와 신분제 변동」, 『국사관논총』68, 1996.
■ 송양섭, 「19세기 유학층(幼學層)의 증가양상 -『단성현호적대장』을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55, 2005.
■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 [집필자] 임민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