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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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유관(遠遊冠)

서지사항
항목명원유관(遠遊冠)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법복(法服), 원유관복(遠遊冠服)
관련어강사포(絳紗袍), 양관(梁冠), 조복(朝服), 통천관(通天冠)
분야생활 풍속
유형의복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왕과 왕세자가 조복(朝服)으로 착용하던 강사포(絳紗袍)에 착용하던 관모.

[개설]
원유관(遠遊冠)은 왕과 왕세자가 면복(冕服) 다음가는 예복인 강사포를 입을 때 착용하였던 관모이다. 고려말 1370년(고려 공민왕 19) 5월에 명(明) 태조로부터 7량의 원유관을 받아 사용하게 된 것이 원유관 사용의 시작이다. 조선초 1438년(세종 20) 10월에 명으로부터 9량의 원유관을 받아 이후로는 구량(九梁) 원유관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이 제도는 왕조의 끝까지 유지되었다. 그리고 대한제국 시기 황제는 12량의 통천관(通天冠)을 사용하였다.

원유관은 강사포와 함께 착용하기 때문에 강사포의 착용 예를 통해 그 쓰임을 알 수 있는데, 왕이나 왕세자가 조복으로 착용하는 관복으로 신하의 조현(朝見)을 받거나 초하루 및 보름과 윤음을 내릴 때, 표문을 올릴 때에 입었다. 따라서 원유관 또한 동일한 행사에 강사포와 함께 사용되었다.

원류관은 관의 색상이나 머리 위를 덮는 모(帽)에 놓여진 양(梁)의 수량으로 신분의 차등을 두었다. 왕의 경우 현색(玄色)의 나(羅)로 만드는데 9량이고 매 양마다 18개의 옥을 장식하며 황, 창, 백, 주, 흑색의 순서로 반복한다. 여기에 금잠(金簪)을 꽂고 양옆으로 붉은 끈[朱組] 두 줄을 달아 턱 밑에서 매어 늘어뜨렸다. 왕세자는 8량의 원유관이며 황제의 경우 12량의 통천관이다.

원유관 유물로는 오륜대순교자박물관에 의친왕(義親王)의 7량 원유관이 남아 있고, 이밖에 순조 어진 중 원유관 일부가 남아 있으며, 고종의 강사포에 통천관을 착용한 어진과 순종의 강사포 사진이 전해진다.

원유관은 면류관과 마찬가지로 반홍정주(磻紅鼎紬) 세 폭으로 만든 솜보자기[襦袱]에 싼 후 칠집[漆家]에 넣어 보관하였는데, 왕의 것은 다시 왜주홍칠가(倭朱紅漆家)에 넣었고 왕세자의 것은 흑칠가(黑漆家)에 넣어 보관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전기의 강사포는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전하의 원유관복도설(遠遊冠服圖說)에 따르면 관(冠)과 의(衣), 상(裳), 중단(中單), 폐슬(蔽膝)과 패(佩), 대대(大帶), 수(綬), 말(襪), 석(舃), 규(圭)로 구성된다. 이때의 관은 구량(九梁) 구옥(九玉) 오채(五采)의 원류관이다. 왕세자와 왕세손의 원유관복도설은 『국조속오례의보서례(國朝續五禮儀補序例)』에 기재되어 있는데, 왕세자는 8량(八梁), 8옥(八玉), 3채(三采)의 원유관이고 왕세손은 7량(七梁), 7옥(七玉), 3채(三采) 원유관으로 신분별로 차이가 있었다.

조선후기는 『경모궁의궤(景慕宮儀軌)』에 실린 관복도설에서 강사포와 함께 원유관의 형태가 확인되는데 전기와 비교하여 큰 변화는 없다. 1897년(광무 1) 대한제국으로 바뀌면서 고종이 황제 즉위 후 중국 천자가 쓰던 통천관을 원유관 대신 썼으나 강사포는 변화가 없었다.

[형태]
왕의 원유관 모습은 『국조오례서례』 가례(嘉禮) 관복도설(冠服圖說)에서 확인할 수 있고, 왕세자와 왕세손의 원유관 모습은 『국조속오례의보서례』가례 원유관복도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왕의 경우 원유관은 나(羅)로 만들며 그 색은 현색(玄色)이고 9량이다. 매량(每梁)은 18옥으로 꿰어지는데 앞쪽에 9옥, 뒤에 9옥이며 5채옥(采玉)을 사용하고 황(黃), 창(蒼), 백(白), 주(朱), 흑색(黑色)의 순으로 꿴다. 여기에 금잠을 꽂고 관 양편에 붉은 끈 2줄을 달아 턱 밑에서 매고 그 나머지는 늘어뜨린다. 세자의 원유관은 겉을 모라(毛羅)로 싸고 8량으로, 매 양의 앞뒤로 각각 세 가지 색상의 옥을 8개씩 장식하였으며, 관의 양편에 붉은 끈을 매고 금잠을 꽂았다.

조선시대의 유물은 남아 있지 않으나 화재로 일부만 남은 순조 어진에서 원유관 상부가 확인된다. 대한제국 이후의 유물로는 의왕비(義王妃)가 오륜대순교자박물관에 기증한 의친왕의 원유관이 남아 있다. 친왕 봉작 시 착용한 것으로 높이 22㎝의 크기이다. 겉은 자색(紫色) 비단으로 되어 있고 안감은 홍색 명주로 배접되어 있다. 7줄의 붉은색 양에 5채의 구슬을 사이에 꿰어 장식되어 있는 7량관이다. 앞면과 뒷면의 중심부에 네모난 금장식이 부착되어 있다. 좌우에는 묶는 홍색 끈이 달렸는데, 그 끝에는 술이 달려 있다. 이외에 고종황제의 어진에서 보이는 통천관은 12량 12수에 부선(附蟬)이 달렸고 각 량마다 5색 구슬을 12개씩 꿰어 장식하였다. 1922년 영왕의 근현례(覲見禮) 때 순종이 강사포 착용한 사진을 통하여 일제강점기까지 착용되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용도]
원유관은 강사포 구성물의 하나로 사용되므로 강사포의 용도와 같이 사용되었다. 『상방정례(尙方定例)』에 면복과 함께 가례 시 법복으로는 물론, 가례와 길례에도 착용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국조오례의서례』, 『대한예전(大韓禮典)』에서 거의 모든 왕조마다 강사포의 기록이 확인되어 원유관과 함께 착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왕이 신하의 조현(朝見)을 받을 때 사용하였는데 원단(元旦), 동지(冬至), 삭망(朔望) 시의 조하복(朝賀服)으로 착용하였으므로 원유관 역시 이때 사용되었다. 그 외에 길례나 가례 중에도 강사포를 입을 때는 원유관을 함께 착용하였다.

[참고문헌]
■ 『경모궁의궤(景慕宮儀軌)』
■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 『상방정례(尙方定例)』
■ 강순제, 「관모연구(Ⅲ)-통천관·원유관·양관을 중심으로-」, 『생활과학연구논집』16권 1호, 1996.
■ 高光林, 『韓國의 冠服』, 和成社, 1990.
■ 석주선, 『冠帽와 首飾』, 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1993.

■ [집필자] 이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