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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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연(外宴)

서지사항
항목명외연(外宴)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내연(內宴), 외진연(外進宴), 외진찬(外進饌)
분야문화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왕과 문무백관 등을 비롯한 남성이 참석한 궁중 연향.

[개설]
외회례연(外會禮宴)과 외진연(外進宴)에는 왕을 비롯하여 왕세자와 문무백관 등이 참석하고, 왕이 주관하는 외양로연(外養老宴)에는 사대부에서 천인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구별 없이 남자 노인들이 참석했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정기적으로 1년에 한 차례씩 회례연과 양로연을 베풀었고, 진연의 경우에는 여러 차례 베풀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에는 정기적인 회례연과 양로연은 사라지고, 수년에 한 번 특별한 경사가 있을 때 진연을 베풀었다. 그 대신 연향 후에는 반드시 백성들에게 은전을 베풀었다.

[내용 및 변천]
외연과 내연은 참여자에 따른 구분이다. 궁중 연향은 설행 목적에 따라 회례연·양로연·진연·사객연(使客宴) 등으로 구분되는데, 조선시대의 사객연에는 여성이 참석한 적이 없으므로 외연과 내연의 구분은 사객연을 제외한 나머지 연향에 국한된다.

설날이나 동짓날 왕이 신하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베푼 회례연과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베푸는 진연의 경우, 외연에는 왕과 왕세자를 비롯해 종친, 문무백관 등이 참석하였다. 양로연은 노인을 공경하기 위해 설행한 연향이므로, 왕이 주관하는 외연에는 사대부에서 천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의 남자 노인들이 참석하였다. 이처럼 남성들이 참석하는 연향이 바로 외연이다.

조선시대 전기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회례연과 양로연은 1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베풀고, 진연은 단오와 추석 등의 명절과 왕세자 및 왕세자빈의 생신 등에 베풀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에 따라 성종대까지는 매년 정초에는 회례연을, 가을에는 양로연을 각각 한 차례씩 행하였고, 병환 쾌차·책봉·명절·생신 등에는 진연을 베풀었다. 이러한 규례는 연산군대까지도 대개 유지되었다.

하지만 중종대 이후에는 흉년 등의 이유로 회례연과 양로연을 중지하는 경우가 잦았고, 진연의 횟수 또한 이전에 비해 현격히 줄어들었다. 선조대 이후부터는 정초에 정기적으로 회례연을 여는 관례를 없앴으며, 양로연 또한 경사가 있을 때만 베풀도록 하였다. 진연도 마찬가지로 특별히 경축할 일이 있는 경우에만 베풀었다. 따라서 선조대 이후의 연향은 대부분 진연이었다.

성종대까지 정해진 규례대로 연향을 베푼 것은 풍년이 들어서라기보다는 이 무렵이 전례(典禮)를 정비해가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중종대 이후에는 성리학적 이상을 실천하는 것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흉년이나 기상 이변 같은 재변이 있는 경우에는 연향을 베풀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1665년(현종 6) 9월에 현종이 진연을 베풀려 하자 송준길이 “흉년이 심한데 나라에서 연향을 베푼다면 백성들이 나라에서 구휼해주지 않으면서 도리어 성대한 행사를 거행한다고 여길 것이니, 어떻게 백성들을 납득시킬 수 있겠습니까?”라며 만류한 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현종실록』 6년 9월 5일].

그리하여 인조대와 효종대에는 한 차례의 외연도 베풀지 못하였고, 다만 1624년(인조 2)과 1630년(인조 8), 1657년(효종 8)에 내연을 베풀었을 뿐이다. 현종대에는 거듭된 흉년으로 재위 15년 동안 내연과 외연 어느 것도 베풀지 못했다.

숙종대에는 1677년(숙종 3) 11월에 상례를 마친 뒤 대왕대비와 왕대비를 위로하기 위해 내연을 베풀었고, 1686년(숙종 12) 윤4월에는 대왕대비의 환갑을 경축하여 내연을 베풀었다. 1706년(숙종 32) 8월에는 즉위 30년을 경축하고, 1710년(숙종 36) 4월에는 왕의 병환 쾌유와 춘추 50세를 경축하여 외연과 내연을 모두 베풀었다. 또 1714년(숙종 40) 9월에는 왕의 병환 쾌차와 즉위 40년을 경축하여 외연을 베풀었고, 1719년(숙종 45) 9월에는 왕이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경축하여 외연을 베풀었다.

조선시대 전기에 매년 정기적으로 베풀던 회례연과 양로연이 조선시대 후기에는 사라지고, 한 해에 여러 차례 베풀던 진연 또한 수년에 한 번 특별한 경사가 있을 때만 베풀게 되었다. 다만 진연의 경우 조선시대 전기에는 연향의 규모가 작았으나, 횟수가 줄어든 조선시대 후기에는 연향의 규모가 커졌다. 여기서 규모란 음식의 가짓수나 성대한 음악 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나누는 범위를 말한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후기에는 왕실에 경사가 있어 진연을 베푼 뒤에는 항상 서울과 지방의 사대부 이하 천인에 이르기까지 노인들에게 쌀과 고기를 내려 주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쌀을 내려 주고, 거지들을 구휼하며, 전세(田稅)를 줄이고 환곡을 탕감하는 등의 은전을 베풀었다.

[특징]
조선시대 초기에 여성이 참여하는 내연에서는 여악(女樂)이 악기 연주와 춤과 노래를 모두 담당했지만, 그 외의 경우에는 대개 남자 악공이 악기를 연주하고 여악이 춤과 노래를 공연했다.

그런데 1433년(세종 15)부터는 외연에서 여악 대신 무동이 춤과 노래로 이루어진 정재를 공연하도록 했다. 위정자들부터 남녀의 구분을 분명히 하여 단정한 행실의 모범을 보이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때 무동은 여악이 하던 춤과 노래를 한 남자아이들이므로, 여악과 대비하여 남악이라 불렀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세조대부터는 다시 외연에서 여악을 썼다. 이후에도 중종대에 10년간 외연에서 남악이 정재를 공연했을 뿐, 조선시대 전기에는 대부분 남자 악공들이 악기 연주를 하고 여악이 춤과 노래를 선보였다. 그러나 1623년의 인조반정 이후에는 외연에 남악을 쓰는 제도가 확립되어 조선시대 말까지 이어졌다.

[참고문헌]
■ 김종수, 『조선시대 궁중연향과 여악연구』, 민속원, 2003.

■ [집필자] 김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