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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학(禮學)

서지사항
항목명예학(禮學)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유학(儒學)
관련어가례(家禮), 강례박사(講禮博士), 성리학(性理學), 예(禮), 예송(禮訟), 예치(禮治)
분야문화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유학 중에서 특히 예법이나 예제(禮制) 등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실천하고자 하던 학문 분야.

[개설]
예학(禮學)은 유학(儒學)에서 고전 예서(禮書)로 간주되는 『의례(儀禮)』·『예기(禮記)』·『주례(周禮)』의 삼례(三禮)와 중세 예서라고 할 수 있는 주자(朱子)의 『가례(家禮)』 등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자 했던 학자들의 학문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예학이라고 불리는 학문 경향은 조선시대 중기인 16~17세기의 성리학자들에게서 나타나므로 예학은 성리학의 한 분야에 속하는 것이다.

[내용 및 특징]
동아시아의 고전적인 예법(禮法)은 고대 중국 주(周) 나라의 주공(周公)이 제정한 것으로 말해지고 있으나, 그 실체는 알기 어렵다. 춘추시대에 이를 다시 정리하여 고전 예학의 초석을 놓은 사람은 공자였다. 그는 다른 유교 경전들과 함께 『의례』·『예기』·『주례』를 정비함으로써 예를 통해 개인의 수련과 국가의 통치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공자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하여 전국시대의 순자(荀子)는 성악설에 이론적 기초를 두고 예치론(禮治論)을 정립, 예를 개인과 사회의 규범으로 확립하였다. 한대(漢代)에 유학이 국가 통치 이념으로 정착되면서 예법의 효용도 더욱 강조되며, 훈고학자들에 의해 전국·진한(秦漢)의 격변기에 산일된 예서들에 대한 정비와 연구가 이루어졌다. 『의례』·『예기』·『주례』 등 현전하는 예서들은 대부분 한대에 정리하여 보완되거나 창작하여 삽입된 것들이다. 중국에서의 예학 연구는 한대 이래 유실된 고례(古禮)의 원형을 복원하는 데 집중하였다.

이후 예학은 『의례』·『예기』·『주례』의 등의 고례(古禮)와 주자의 『가례』 연구를 중심으로 하였는데, 고례는 길례(吉禮)·흉례(凶禮)·군례(軍禮)·빈례(賓禮)·가례(嘉禮)의 오례(五禮)로 체계화 되었고, 『가례』는 관례(冠禮)·혼례(婚禮)·상례(喪禮)·제례(祭禮)의 사례(四禮)로 체계화되었다. 우리나라의 고전 예학은 조선초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편찬으로 집대성되었고, 가례 연구는 17세기부터 김장생(金長生) 등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는 유교적 이념에 의한 예법 질서를 확립하고 국가 의례를 정비하기 위하여 예제(禮制)의 전범을 편찬하였다. 이를 왕조례(王朝禮)라고 하는데, 당의 현종(玄宗) 때 편찬한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가 대표적인 것이다. 이것은 송(宋)-원(元)-명(明)-청(淸) 여러 왕조의 국가 전례에 기초가 되었다. 명대에 이루어진 『대명회전(大明會典)』과 『대명집례(大明集禮)』는 조선 왕조의 『국조오례의』 정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 왕조례는 고전 예학의 구성 체제라고 할 수 있는 오례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남북조시대부터 국가적 전례와는 다른 귀족·사대부 계층의 의례 생활을 위한 실용적이고 간소한 예법이 모색되었다. 북송대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서의(書儀)』와 남송대 주희(朱熹)가 편찬한 『가례』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들 예서들은 대개 가정의례의 핵심이 되는 사례(四禮)의 체제로 되어 있다. 『가례』 류의 예서들은 중세 사회의 중심 계층이었던 사대부가의 의례 생활을 위해 편찬된 것이다. 주희는 고전 예서의 연구에도 주력하여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등을 저술함으로서 중세 예학을 집대성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예학을 하나의 학파로 정립시킨 대표적인 학자는 김장생(金長生)이었다. 그는 『가례집람(家禮輯覽)』·『상례비요(喪禮備要)』·『의례문해(疑禮問解)』·『전례문답』 등 많은 예서를 저술하였고, 그의 아들이었던 김집(金集)도 『상례비요』와 『의례문해』의 저술에 참여하였다. 김장생은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유계(兪棨) 등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에 대해 『숙종실록』에서는, "그가 편찬한 『상례비요』·『가례집람』·『의례문해』·『예기기의』 등의 책은 매우 세밀하게 분석하여 물을 담아도 새지 않을 정도이므로 국가의 전장과 사가의 경례(經禮)와 변례에 모두 절충하는 바가 있되, 한결같이 정자와 주자의 학설을 주장하였기에 비록 다른 길로 추향하는 집안이라도 준용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그 공로가 많다고 말할 만합니다. …(중략)… 더구나 문원공은 동방의 예학을 대성한 데이겠습니까?"라고 평가하고 있다[『숙종실록』 7년 12월 14일].

[변천]
우리나라 예학의 기초가 되는 국가 전례는 고려 인종(仁宗) 때 최윤의(崔允儀)가 편찬하여 1234년(고려 고종 21)에 금속활자로 간행한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50권)이 처음으로 집성되었다. 조선초기에는 국가의 전장과 문물제도를 확립하기 위하여 『국조오례의』를 편찬하였다. 위의 두 책은 고전 예서에 대한 수준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조선초기의 고례 연구는 정도전(鄭道傳)의 『주례』 연구와 권근(權近)의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 저술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예학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게 된 것은 16세기 중반부터 성리학 연구가 심화되고 주자의 『가례』에 대한 연구와 실천 운동이 활발하게 되면서부터였다. 특히 사림파가 정치·사회적인 주도권을 확립한 이후에 급속히 보급되고 또 시행되었다. 『가례』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또는 학문적인 관심에서 연구가 진척되기 시작하였고 많은 저술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가례』를 실제 생활에서 시행하기 위하여 원서에 미비한 점들을 연구하여 보완하였다. 김장생의 스승이었던 송익필(宋翼弼)은 『가례주설(家禮註說)』을 지었고, 제자였던 윤선거(尹宣擧)와 유계(兪棨)도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저술하였다. 역시 제자였던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도 저명한 예학자로서 현종대 예송(禮訟)에서 서인 예설의 중심이 되었다. 김장생은 예학을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발전시키고 학파를 형성하였는데, 조선 예학의 중추가 되었다.

이밖에 신식(申湜)의 『가례언해(家禮諺解)』와 이재(李縡)의 『사례편람(四禮便覽)』과 이의조(李宜朝)의 『가례증해(家禮增解)』도 널리 보급되어 시행되었다. 이들은 모두 서인계 예학자들로서 『가례』 연구에 주력하였다. 다만 서인계인 박세채의 『육례의집(六禮疑輯)』이나 『남계선생예설(南溪先生禮說)』이나 최석정의『예기유편(禮記類編)』 등은 고례에 바탕을 둔 예서이기도 하다.

이들에 비해 남인계 학자였던 정구(鄭逑)와 허목(許穆) 등은 『가례』도 연구하였지만 고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정구는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예기상례분류(禮記喪禮分類)』·『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를 저술하였고, 허목은 『경례유찬(經禮類纂)』을 편찬하였다. 이들 연구는 고례를 중시하는 남인계 학자들의 예학과 예론 경향을 보여주는 것으로, 정구와 허목의 예학에서는 신분에 따른 예의 차등화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남인계 예학은 홍여하(洪汝河)의 『의례경전상복고증(儀禮經傳喪服考證)』, 18세기의 안정복(安鼎福)의 『예기의(禮記疑)』와 『예기집설(禮記集說)』, 정약용(丁若鏞)의 『상례사전(喪禮四箋)』 등으로 계승되었다.

[의의 및 평가]
17세기에 『가례』를 중심으로 발달한 우리나라 예학은 왕실에서부터 사회 저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보급되고 시행되었다. 이는 곧 조선후기의 의례 생활이 신분적 차별을 초월하여 보편화된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17세기는 조선 예학사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시대였다. 김장생·김집·박지계(朴知戒)·정구·허목·송시열·송준길 등 많은 대가들이 예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학문적 체계를 확립했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오례 중심의 왕조 예제에서 사대부 계층의 실생활에 보편화된 사례(四禮) 즉 가정의례 쪽으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예학은 대부분 『가례』 연구를 중심으로 하였으며, 이것이 그들의 예 관념에도 중요한 변화들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 시기에 발달한 예학은 왕실의 종통(宗統)에 관련된 전례나 계승 문제 등에 대해 심각한 논의를 야기하였고, 대대적인 정치 분쟁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인조 때의 원종추숭(元宗追崇) 의례나 현종 때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던 복제(服制) 예송(禮訟)이 그것이다. 이는 조선시대의 예학 발달이 가져온 부작용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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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필자] 이영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