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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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禮曹)

서지사항
항목명예조(禮曹)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육조(六曹)
하위어가각고(架閣庫), 각문(閣門), 계제사(稽制司), 관습도감(慣習都監), 대청관(大淸觀), 문서응봉사(文書應奉司), 사역서(司歷署), 서운관(書雲觀), 소격전(昭格殿), 승록사(僧錄司), 아악서(雅樂署), 악학(樂學), 장악서(掌樂署), 전객사(典客司), 전사시(典祀寺), 전악서(典樂署), 전향사(典享司), 통례문(通禮門)
동의어남궁(南宮), 춘관(春官), 춘관아문(春官衙門), 춘조(春曹)
관련어계후등록(繼後謄錄), 서원등록(書院謄錄), 인신등록(印信謄錄), 학교등록(學校謄錄), 해행록(海行錄)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고려 말과 조선시대 국가적인 제향과 예악, 연향, 조빙(朝聘), 과거 등을 관장하던 관서.

[개설]
남궁(南宮), 춘관(春官), 춘관아문(春官衙門), 춘조(春曹)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예조는 설치 이후 국가적인 제향과 예악, 연향, 조빙(朝聘), 과거 등을 관장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예하에 속사(屬司)로 계제사를 비롯한 3개의 부서를 두었고, 속아문으로 홍문관 등을 두었다. 1894년(고종 31)에 혁파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예조는 고려 말인 1389년(고려 공양왕 1)에 앞서의 예관·예부·의조 등을 계승하여 설치되었다. 이후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에 반포된 관제에서 공양왕 때의 내용을 계승하여 역시 육조의 하나로 설치되었다.

예조를 포함한 육조제는 명칭의 변화가 있기는 하였으나, 이전의 육부제(六部制) 내지 육조제에 연원하며, 중국 당나라의 동일 제도를 받아들여 설치되었지만, 육조 내 서열이라든지 속사의 구성 등에서 독자성을 보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고려 말 공양왕 때 설치 당시 직제는 판사·판서·총랑·정랑·좌랑 등으로 편성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에는 정3품 전서 2명, 정4품 의랑 2명, 정5품 정랑 2명, 정6품 좌랑 2명, 정7품 주사 2명을 두었다.

이후 예조의 조직 정비 과정은 육조의 정비와 맥락을 같이하며 진행되었다. 즉 1403년(태종 3) 전서 1명이 감축되었고, 1405년(태종 5)에는 정2품의 판서 1명을 설치하는 한편 나머지 전서 1명을 혁파하는 대신 좌·우 참의를 각각 설치하였다. 동시에 정4품 의랑이 혁파되면서 정랑과 좌랑의 정원이 각 3명으로 증원되었다. 주사는 1395년(태조 4) 2월에 혁파되었다. 이 같은 직제의 정비 과정은 표면적으로 문란한 관직제도의 정비와 재정 절감 등을 표방하고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육조의 기능 및 위상 강화로 이어지면서 왕권 강화를 가져오는 조치였다.

이후 1416년(태종 16) 추가로 종2품의 참판 1명이 설치되는 한편 좌·우로 분리되었던 참의의 정원이 1명으로 축소되었다. 이후 참판의 정원에 약간의 변화가 있으나 대체적인 골격이 유지되면서 운영되다가 『경국대전』에서는 정2품 판서 1명, 종2품 참판 1명, 정3품 참의 1명, 참지 1명, 정5품 정랑 3명, 정6품 좌랑 3명으로 규정되었다. 이속(吏屬)은 서리 30명, 서사(書寫) 2명, 고직 2명, 사령 22명, 문서직 2명, 군사 2명이 배속되었다.

예조의 업무와 기능은 다양하였으며, 조선 건국 직후 국가 체제 정비에서 많은 입법과 제도 정비에 참여하였다. 제도적으로 예조의 기능과 관련해서, 조선 건국 직후인 1392년 설치 당시 제향·빈객·조회·과거·불교와 진헌 등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이어 1405년에는 예악과 제사·연향·과거·복축(卜祝) 등에 관한 일을 관장하도록 개정되었다.

그러나 예조의 업무는 이 규정을 넘어 상당히 광범위하여 태종대에만 하더라도 적전법(籍田法)이나 수수법(蒐狩法), 각사계사의(各司啓事儀) 등의 제정이나, 악조(樂調) 제정을 비롯해 비빈(妃嬪)의 제도를 정하기도 하였고, 정조동지조하의주(正朝冬至朝賀儀注) 등 각종 의식과 관련한 의주 제정을 주도하였다.

제사와 관련해서도 왕릉의 규격과 관련된 능침보수지법(陵寢步數之法)이나 종친국장등례(宗親國葬等例) 등을 제정하는 한편 여제(厲祭)와 관련되거나 노인성(老人星)에 제사하는 규정, 원단제(圓壇祭) 의주, 종묘제례(宗廟祭禮) 등과 관련된 제도 정비를 관장하였다.

이 밖에도 과거 제도를 비롯해 향학이나 국학과 관련된 교육제도의 정비를 관장하였으며, 육조의 업무 분장 규정인 육조분직급소속(六曹分職及所屬)을 상정하여 제출하거나, 영삼군사체통예도(領三軍事體統禮度)라 하여 군대 내 예법에 관련된 법을 제정하였다. 또한 불교와 관련해서 나이 젊은 중의 머리를 기르게 하거나 도첩제와 관련된 법안을 제정하였다.

예조의 기능은 이후 예악과 제사, 연향, 학교 등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도록 개정되었고, 이후 『경국대전』에서 그대로 법제화되었다. 예조의 업무는 태종대와 세종대를 거쳐 『경국대전』에 규정된 속사의 업무를 통해서 구체화되었다.

예조의 속아문은 성립 때인 1405년에는 예문춘추관·경연·서연·성균관·통례문·봉상시·예빈시·전의감·사역원·서운관·교서관·문서응봉사·종묘서·사온서·제생원·혜민국·아악서·전악서·사련소·선관서·도류방·복흥고·동서대비원·빙고·종약색·대청관·소격전·도화원·가각고·전구서·사직단·관습도감·승록사 및 각 도의 학교·의학으로 편성되었다. 그러나 이후 부분적으로 새로 설치되거나 이관 또는 도태되었다가 『경국대전』에 홍문관·예문관·춘추관·성균관·승문원·통례원·봉상시·예빈시·전의감·사역원·관상감·교서관·내의원·장악원·세자시강원·종학·종묘서·소격서·사직서·빙고·전생서·사축서·혜민서·도화서·활인서·귀후서·사학·각 전·각 릉으로 성문화되었다.

예조의 관사는 경복궁 광화문 남쪽의 오른편에 있으니, 곧 오늘날의 종로구 세종로 일대인 서부 적선방(積善坊)이었다.

[변천]
조선후기에 이르면 예조의 업무는 더욱 증가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각종 예서의 편찬을 비롯해 예조의 업무를 담고 있는 『춘관통고』의 내용을 통해서 그 대체를 이해할 수 있다. 『춘관통고』는 오례(五禮) 체제에 따라 예조의 업무를 나누어 정리하였는데 각각의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후기 예조 판서는 승문원 제조와 비변사 제조, 참판은 봉상시와 예빈시의 제조 등을 겸임하면서 그 관사의 사무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정조대 편찬된 『대전통편』 단계에서 예조 판서는 도화서 제조와 장생전 제조를 겸임하도록 하였고, 예조의 낭청은 장생전 낭청을 겸임하도록 규정되었다. 한편 『속대전』에서 세손시강원이 새롭게 설치되면서 속아문으로 편입되어 폐지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예조는 1894년(고종 31)에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 한충희, 『조선초기 관아연구』, 사람, 2005.
■ 한충희, 『조선초기 육조와 통치체계』, 계명대학교출판부, 1998.
■ 한충희, 『조선초기의 정치제도와 정치』, 계명대학교출판부, 2006.
■ 조기대, 「해제-춘관통고」(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전자도서관, http://lib.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