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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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정서(掖庭署)

서지사항
항목명액정서(掖庭署)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이조(吏曹)
하위어서방색(書房色), 세수간(洗手間), 수사간(水賜間), 부사소(副司掃), 부사안(副司案), 부사약(副司鑰), 부사포(副司鋪), 사소(司掃), 사안(司案), 사알(司謁), 사약(司鑰), 사포(司鋪)
관련어가무별감(歌舞別監), 동산별감(東山別監), 상언별감(上言別監), 정자(城上), 중금(中禁), 탕수색(湯水色)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궁궐 내 왕명의 전달과 궐문 개폐 등을 담당하던 잡직 관서.

[개설]
액정서는 내시가 담당하던 관서이다. 왕명 전달 업무에서부터 궁궐 내 청소까지 주로 궐내에서 국왕 및 왕실의 생활을 도움을 업무를 담당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액정서는 1392년(태조 1) 7월 문무백관의 관제를 반포할 때 내시 담당 관서로 설치된 것으로, 고려시대 액정원·액정국 등을 계승하였다. 액정이란 액문(掖門) 안에 있는 뜰을 의미하며, 액문이란 궁중의 작은 문을 가리키는데, 작은 문이 정문 옆에 있어 마치 사람의 겨드랑이와 같다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액정서는 이조의 속아문 이었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설치 당시 직제는 확인되지 않으나 대체로 고려 후기의 내용이 계승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12년(태종 12)에 직제 중 일부인 봉어대부를 봉승으로, 통어랑을 통봉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실록 자료를 보면 사약과 사알, 좌·우반전직, 내알자, 내반종사 등의 관직이 확인된다. 1457년(세조 3) 사알과 사약 각 1자리[窠]씩 감축하는 한편 부사약·공봉·알자·좌반전직·내반종사 등을 추가하였다.

이후 『경국대전』에서는 일부 내용이 개정되어 수록되었는데, 정6품의 사알·사약 각 1명, 종6품 부사약 1명, 정7품 사안 2명, 종7품 부사안 3명, 정8품 사포 2명, 종8품 부사포 3명, 정9품 사소 6명, 종9품 부사소 9명 등이었다. 이 가운데 7품 이하는 별감(別監)이라 통칭되었다.

이들은 궁궐 내 대전(大殿)과 중궁전(中宮殿)·세자궁 등에 배속되었는데, 대전에는 사알 2명, 사약 3명, 서방색(書房色) 2명이 배속되었고, 중궁전에는 사약 2명, 세자궁에는 사약 2명이 배속되었다. 사알과 사약·서방색은 2번(番)으로 나누어 근무일수 600일이 차면 품계를 올려주고 정6품이 되면 그치며, 7품 이하인 별감의 경우 역시 2번으로 나누되 근무일수가 900일이 차면 품계를 올려 주되 종7품이 되면 그 직(職)에서 떠나도록 규정되었다.

액정서의 직무는 관직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사알은 궐내에서 왕명의 전달과 알현 등의 일을 담당하였고, 사약과 부사약은 궁궐문과 궐내 각 문의 자물쇠를 관장하였으며, 사안과 부사안은 가례(嘉禮) 등 궐내 각종 의식에 설치되는 어좌(御座)향안(香案), 책안(冊案) 등의 설치와 관리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사포와 부사포는 궁궐 내정에서의 설비 시설을 담당하였고, 사소와 부사소는 궁궐 내 청소를 담당하였다. 이처럼 액정서 소속 관원은 주로 궁궐 내에서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한편 1484년(성종 15)에는 액정서 소속 관원 밑에 중금(中禁) 40인을 두도록 하고 이들을 4번으로 나누어서는 조하(朝賀)·조참(朝參) 및 동가(動駕) 때에 엄(嚴)을 전하는 것과 방방(放榜) 때에 전창(傳唱)을 하고, 거둥 때에는, 문 안에서는 별감 앞에서 수가(隨駕)하는 등의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이들의 복식에 대한 규정도 마련되어, 자적관(紫的冠)·도금토환(鍍金吐環)·오색사문직대(五色絲文織帶)·은이환(銀耳環)에 겉옷은 자적단령(紫的團領)을 착용하고, 속옷은 여름에는 일편초록사겹비개(一偏草綠紗裌飛介)를, 겨울에는 필단(匹段)을 쓰게 하였다[『성종실록』 15년 11월 23일].

[변천]
액정서는 내시부의 잡직 관서로, 항상 국왕과 지근거리에 있었다. 따라서 비록 잡직이고 품계는 낮지만 권력이 따르면서 이로 인해 폐단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왕명의 전달을 맡은 사알의 경우, 내시부 소속 승전색의 명령을 받아 왕명을 전하거나 혹은 국왕이 직접 명해 명령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간혹 지체되는 우려가 있어 단속하는 경우도 있었다[『중종실록』 36년 6월 1일].

특히 연산군 때 국왕은 조정의 정상적인 행정 계통을 무시하고 액정서 관원들에게 업무를 지시하거나 처리하도록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였으며[『연산군일기』 11년 7월 17일], 이를 위해 별도로 추비전패(追飛電牌)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연산군 때는 또한 새로이 사활(司活)과 사권(司券)이라는 관직을 만들어 액정서에 소속시켰다. 이들 관직은 아마도 중종반정 이후 혁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16세기 이후 사림세력이 중앙에 진출하면서 이들에 대한 견제가 계속되었다. 이는 액정서 및 소속 관원들을 국왕의 사인(私人)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공론 정치 및 공개 정치를 지향했던 사림들은 정상적인 행정 계통을 통한 명령의 집행 등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액정서를 통한 왕명의 전달은 사적인 경로라고 말하며, 이들을 명령 계통에서 제외시키려고 하였다.

1625년(인조 3)에는 액정서의 모든 일은 승정원에서 관장하도록 하였고[『인조실록』 3년 7월 11일], 1776년(정조 즉위) 3월에는 즉위 직후 이전의 내시와 액정서 소속 108자리[窠: 한자 중복 삭제]를 모두 줄이고 궁인도 줄였다[『정조실록』 즉위년 3월 15일].

조선후기에는 이들의 작폐가 끝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1776년에는 액정서 소속의 하례들 가운데 작당하여 시민들에게 폐단을 끼치는 자를 경중을 분간하여 혹은 형벌을 가하고 혹은 형장을 가하여 여러 도에 분산하여 귀양을 보내기도 하였다[『정조실록』 즉위년 4월 9일]. 그러나 이런 작폐는 끊이지 않았다. 1894년(고종 31)에 혁파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한충희, 『조선초기의 정치제도와 정치』, 계명대학교출판부, 2006.

■ [집필자] 이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