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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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습(承襲)

서지사항
항목명승습(承襲)
용어구분전문주석
동의어습작(襲爵)
관련어청승습사(請承襲使), 청사위사(請辭位使), 책봉사(冊封使), 황명조훈(皇明祖訓), 봉증(封贈), 봉작(封爵)
분야정치
유형의식 행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왕위의 계승 및 부친의 작위(爵位)와 훈호(勳號)를 이어받는 일.

[개설]
승습은 일반적으로 선왕(先王)을 이어 새 왕이 즉위한 후, 중국의 황제로부터 이를 승인받아 왕으로 책봉을 받는 전체 과정을 의미하였다. 선왕이 훙거(薨去)함에 따라 국내에서 왕위를 계승한 후에, 이 사실을 중국에 알리고, 그에 따라 황제가 보낸 책봉사(冊封使)를 통하여 책봉 절차를 마침으로써 대내외적으로 승습이 완성되었다. 이런 승습 용례는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하며, 『고려사』에도 보인다. 특히 고려시대 최씨(崔氏) 무신정권 기간에는 왕위의 계승만이 아니라, 최씨가 대대로 권력을 세습하는 일에 대해서도 승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승습이 왕위 계승의 의미와 함께 왕실 종친과 일반 관료들의 공신 훈호를 자손이 승계하는 것까지 포함하여 보다(조금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연원 및 변천]
문헌상으로 승습 용례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태조왕 조에서 처음 나타났다. 왕의 동생 수성(遂成)이 왕위승습(王位承襲)은 반드시 적통이 하는 것이 천하의 상도(常道)라고 한 말이 그것이다. 같은 책 「신라 본기」 선덕왕 조에서는 당에서 지절사(持節使)를 파견해 선덕여왕을 책봉하고 진평왕의 봉작인 ‘주국낙랑군공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을 승습하게 한 일이 기록되어 있고, 성덕왕 조에도 당에서 받은 장군도독(將軍都督)의 호를 승습하게 한 사실이 보인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승습은 국가 내부적으로는 왕이 선왕의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며, 외부적으로는 그것을 중국의 황제로부터 승인받아 책봉을 받고 선왕의 봉작(封爵)까지 이어받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승습 사례는 고려시대 관련 기록에도 많았다. 한 예로, 945년(혜종 2)에 중국의 후진(後晉)에서 책봉사를 파견하여, 고려 태조를 이어 왕위에 오른 혜종(惠宗)을 책봉한 일이 있다. 또 인종(仁宗)대에는 승습이 조종(祖宗)의 업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상용된 예가 보인다. 무신정변 이후로는 비단 왕위 계승만이 아니라, 무신 권력자의 지위를 계승하는 데에도 승습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조에 문하시중(門下侍中) 최항(崔沆)이 가업을 승습하였다고 한 기사가 그것이다. 더 나아가, 고려시대에는 관원의 친족에게 작위를 주는 봉증제도(封贈制度)가 실시되었는데, 그 작위를 후손이 이어받는 것도 승습에 포함되었다.

승습은 조선시대에도 이전과 같은 의미로 널리 쓰였다. 먼저, 국내에서 적법한 절차에 따라 새로 왕위에 오르는 일이 국내 차원의 승습이라면, 사후에 중국의 황제의 승인을 통하여 책봉을 받는 일은 중국 중심으로 구축된 당시 국제사회 차원의 승습이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문무 관료는 물론이고 그들의 부모와 처에게도 작위를 수여하였으며,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배향공신(配享功臣)에 대한 추후 관작을 올리는 추봉(追封) 및 전란에서 공을 세운 자들과 그 부모에 대한 봉작(封爵)도 꾸준히 이루어졌다. 이런 다양한 작위가 후손에게 세습되는 것도 승습의 범주에 포함되었다.

[절차 및 내용]
왕이 승하하면, 적법한 절차에 따라 그 후손 중 한 명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세자가 있을 때에는 대개 일주일 이내에 즉위하였으며, 세자가 없는 경우에는 왕실의 최고 서열인 대비가 중신들과 의논을 거쳐 선왕의 조카 항렬에서 적임자를 지명해 즉위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조선은 왕이 중국의 황제에게 일정한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조공국이었으므로, 완벽한 승습을 위해서는 황제의 책봉 절차를 반드시 밟아야 하였다.

왕의 죽음을 중국에 알리는 고부사(告訃使)와 새 왕의 즉위를 승인해 달라는 청승습사(請承襲使)는 대개 함께 파견하였다. 만일 현왕이 죽지 않았음에도 어떤 정치적 이유로 후계자에게 양위할 때에는 고부사가 아니라 청사위사(請辭位使)를 파견하였다. 청사위사로 대표적인 것으로는 노산군(魯山君, 단종)과 연산군(燕山君)의 경우를 들 수 있다. 특히 연산군의 경우는 본인이 강화도에 유폐된 상황에서 명의만 이용된 경우였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황명조훈(皇明祖訓)』을 통하여 승습의 원칙을 천명하고 그대로 시행하고 있었는데, 주요 골자는 적장(嫡長)의 원칙이었다. 곧 승습의 우선순의는 적장자(嫡長子)이며, 적자(嫡子)가 없을 경우에 서장자(庶長子, 次庶子)의 승습을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에서 중국으로부터 왕의 승습을 청해올 때 그 승인 여부는 이런 적장의 원칙에 따랐다. 다만 적법한 절차가 아닌 비상사태로 인하여 왕이 바뀐 경우에는 그 일의 내막을 소상히 파악하기 위하여 중국에서는 사신을 특별히 한양에 보내 실사(實事)하기도 하였다.

『황명조훈』의 적장 원칙으로 인하여 조선 왕의 책봉 과정에서 곤란을 겪은 대표적인 경우는 적자도 서장자도 아닌 광해군의 즉위 과정이었으며, 비상사태를 통해 즉위한 탓에 책봉을 몇 차례 거절당한 대표적인 예는 정변을 통하여 즉위한 중종과 인조의 경우를 꼽을 수 있다.

교린(交隣) 차원의 승습 용례는 여진 추장에게 하사한 만호(萬戶)의 관직을 그 아들에게 잇도록 승인하거나, 대마도주(對馬島主) 평강길(平康吉)에게 그 부친의 직임을 승계하도록 승인한 것 등을 꼽을 수 있다. 조선시대 승습은 단지 국내 문제나 사대(事大) 관련 사안만이 아니라, 주로 여진과 대마도를 대상으로 한 교린 관련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문헌통고(文獻通考)』
■ 『황명조훈(皇明祖訓)』
■ 계승범, 「임진왜란 중 조명관계의 실상과 조공책봉관계의 본질」, 『한국사학사학보』 26, 2012.
■ 김경록, 「중종반정이후 승습외교와 조명관계」, 『한국문화』 40, 2007.
■ 한명기, 「17·8세기 한중관계와 인조반정-조선후기의 ‘인조반정 변무’문제」, 『한국사학보』 13, 2002.

■ [집필자] 계승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