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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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실서원(石室書院)

서지사항
항목명석실서원(石室書院)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김상용(金尙容), 김상헌(金尙憲), 김수항(金壽恒)
분야교육 출판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1656년(효종 7)에 김상헌(金尙憲)과 김상용(金尙容)을 제향하기 위해 경기도 양주에 건립한 서원.

[개설]
16세기 백운동서원을 시작으로 정착해 나간 서원은 이후 사림의 활동이 본격화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경기 지역의 서원 건립은 시기적으로 선조대 이후 각 지역에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김상용과 김상헌을 배향하기 위해 창건한 석실서원은 1663년(현종 4) ‘석실(石室)’로 사액 받았다. 1697년(숙종 23)에는 김수항(金壽恒), 민정중(閔鼎重), 이단상(李端相)을, 1713년(숙종 39)에는 김창협(金昌協)을, 1857년(철종 8)에는 김창집(金昌集), 김창흡(金昌翕), 김원행(金元行), 김이안(金履安), 김조순(金祖淳)을 추향하였다.

서울 경기 지역을 대표하는 서인-노론계 서원으로 존재하였고, 18세기 이후 낙론학맥(洛論學脈)을 이끌어 나간 주요 학자들의 학문 활동의 장소로 자리 잡았다. 이후 19세기 안동김씨 세도 정권하에서 문중의 인물들이 연이어 제향의 반열에 오르면서 문중서원(門中書院)으로 변질되었다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석실서원 관련 기사가 14건에 이르고 있다. 주요 내용은 현종대 사액 관련 기사, 숙종대에서 철종대에 이르는 서원 추향 요청 상소, 그리고 치제(致祭) 관련 기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효종대 서원 건립의 계기를 마련한 인물은 김상헌이었다. 김상헌은 인조대 청서파의 영수로서 척화론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압송되었다가 귀국한 후 선대의 묘산 근처인 양주 석실에 은거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청의 감시 때문에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지만, 그가 내세운 척화의리의 정신은 당시 정계에 진출한 송시열(宋時烈) 등의 산당(山黨) 세력의 의리론을 지지하는 것이었고 나아가 효종이 추진하던 북벌(北伐) 추진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김상헌이 사망 후 그가 남긴 절의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양주 유생을 비롯한 중외 사족들의 발의로 서원을 건립하여 김상헌과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자결한 김상용을 제향하였다. 이후 서원은 1663년(현종 4)에 이르러 ‘석실’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양주 유학 이추(李樞) 등의 상소로 제기된 사액 요청은 당시 송시열 등 산림(山林)이 정국에 영향력을 미치던 상황에서 윤허를 받았다[『현종개수실록』 4년 7월 8일].

다만 사액 치제가 이루어질 때 양주목사로 재직 중이던 남인계 인물 민희(閔熙)가 집사(執事)와 제물(祭物)을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는 기사에서 석실서원은 서인의 정치 명분을 상징하는 곳이었음을 살필 수 있다. 이처럼 석실서원은 김상헌과 김상용의 절의와 충절을 기리기 위한 충절서원으로 건립되었던 것이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석실서원의 조직은 서인계 서원의 체제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서원의 원규와 학규는 대체로 서인계 서원의 운영과 관련된 규약에서 많이 원용하였던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찬한 「은병정사학규(隱屛精舍學規)」와 「문헌서원학규(文憲書院學規)」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현전하는 「석실서원학규」에 의하면, 서원의 조직은 원장(院長)·장의(掌議)·유사(有司)·색장(色掌)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장은 고위 관료가 역임하였고, 유고 시에는 원이(院貳)라 하는 부원장을 두어 임무를 대행하게 하였다. 장의·유사·색장은 원생(院生) 중에서 선출하고 임기는 2년이었다. 원중의 논의는 큰 일일 경우에는 원장에게 보고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일반적으로는 장의가 주관하고 있었고, 경제적인 문제는 유사가 담당하였다. 특히 원임 구성에서 주목되는 것은 경장의, 경유사와 같은 경재임(京齋任)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서원 운영에 대한 원활한 지원을 확보하기 위한 조직 구성임을 살필 수 있다.

충절서원으로 출발한 석실서원이 18세기 이후 서울 학계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된 동인은 서원에서 이루어졌던 강학(講學)이었다. 서원의 강학을 계기로 후일 낙론학풍(洛論學風)이라 명명되는 서울·경기 지역의 새로운 사상적 조류가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이를 계승하는 유수한 문인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당시 서원의 폐단이 본격적으로 제기되던 시기 석실서원에서 이루어졌던 이러한 학문 활동은 매우 중요한 시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서원 강학을 주도했던 인물은 안동김씨 가문의 학자들인 김창협·김창흡 형제와 김원행이었다. 이들은 17세기 이후 도시화가 진행 중이던 서울이라는 환경에서 성장하며 성시산림(城市山林)의 학풍에 영향을 받았고 일찍이 변동하던 사회·경제적 현실에 대한 해결의 방안에 관심을 보였다. 송시열로 대표하는 노론의 정통학맥을 계승했던 이들이지만, 당시 교조화되어 가던 사상적 조류를 추종하기보다는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려는 시각을 그들의 학문에 담아내었다.

석실서원의 학풍은 경학(經學)을 비롯하여 실용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였고, 학문의 영역도 천문학·율학·수학 등 다양한 관심을 격려하였다. 때문에 이와 같은 서원의 학풍은 홍대용(洪大容) 등 북학파(北學派)의 등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서울의 학계와 함께 문풍(文風)과 미술계에도 서원의 학풍은 파급되어 김창흡의 문하에서 진경시의 대가인 이병연(李秉淵),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정선(鄭敾)이 배출되어 조선의 고유색을 지닌 진경문화(眞景文化)를 이루는 기틀로 작용하였다. 서원의 영향력은 18세기 노론학계에서 경향으로 나뉘어 진행되던 심성논쟁인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서울 지역 노론들의 사상적 조류를 낙론으로 이끌게 한 주요한 동력이었다.

[변천]
1663년(현종 4) 당시 정계를 주도하던 산림계 인사와 중앙 관료의 지원으로 사액된 석실서원은 김상헌으로 상징되는 서인계 절의의 대표처로 자리매김하였다. 이후 서원은 숙종 연간 노론계 인물을 연이어 제향함으로써 그 정치적 성향을 변화시켜 나갔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이후 실세하였던 노론은 정계에 재진출하였다. 이들은 기사환국으로 사사된 송시열의 신원이 이루어지자, 남인과의 정쟁 과정에서 피화한 자파 인물에 대한 추숭사업을 본격화하였다.

조광조를 제향하던 양주의 도봉서원에 송시열의 제향이 이루어질 무렵, 석실서원에도 노론계 인물의 추배를 위한 요청이 제기되었다. 1695년(숙종 21) 경기유학 이세위(李世瑋)는 상소하여 김수항·민정중·이단상 3명을 서원에 추향하기를 청하였다[『숙종실록』 21년 4월 10일]. 김수항과 민정중은 기사환국 때 송시열과 같이 피화한 인물들이었다. 이와 같은 유생의 상소는 곧바로 재가를 얻었다. 이후 서원에는 김창협을 1713년(숙종 39)에 추배하였다.

숙종 연간 서원에 김수항·김창집 등 안동김씨의 인물들이 연이어 제향 되자, 세간에서는 ‘김씨사우(金氏祠宇)’란 유언이 나돌았다고 한다. 이러한 반대 정파의 질시는 중앙 정국이 크게 변동하던 경종 연간 서원에 수난을 가져왔다. 경종 초 김창집이 신임옥사의 과정에서 노론 4대신의 한 명으로 지목받아 사사되자, 그의 부친인 김수항과 친제인 김창협은 역신의 부형(父兄)이란 명목으로 서원에서 출향당하고 만다[『경종실록』 3년 6월 3일]. 하지만, 곧 이은 영조의 즉위로 정국이 반전되자, 서원에서 출향된 2명은 다시 복향되었다. 이처럼 석실서원의 제향을 둘러싸고 입향과 출향이 반복되었던 사실은 중앙 정국의 변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던 경기 지역 서원의 존재 양상을 살필 수 있는 대목이다.

영조대 석실서원은 정치적으로 노론 청류(淸流)의 이념을 이끌어 나갔던 곳이었다. 영조대 추진하던 탕평책을 비판하며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했고, 탕평책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했던 박세채(朴世采)의 학술에 대한 비판 여론을 주도하였다. 나아가 석실서원은 전라도 장성에 위치한 필암서원(筆巖書院)과의 연대를 통해 김인후(金麟厚)의 문묘 종향론을 발의하도록 하는 등 노론계의 중심 서원으로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이후 석실서원은 안동김씨 세도가 극성기를 맞이하는 철종대에 연이은 인물의 추향이 이루어졌다. 1853년(철종 4) 팔도유생 김칠환(金七煥) 등의 상서로 촉발된 추향의 움직임은 1857년에 이르러 김창흡·김원행·김이안·김창집·김조순의 제향으로 귀결되었다[『철종실록』 4년 11월 28일]. 제향 인물 총 11명 중 안동김씨 인물이 9명에 이르렀던 것이다. 때문에 석실서원은 서울 학계의 학풍에 큰 영향을 미쳤던 전 시기의 발전적 모습은 사라지고 한 가문의 문중 서원으로 변질되었다가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의의]
석실서원은 18세기 이후 서울·경기 지역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던 서원이다. 『조선왕조실록』이 정치적 기록이기에 석실서원에 대한 기사는 사액과 제향 인물의 추향, 그리고 정국 변동에 따른 서원의 변화 등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을 토대로 문집 등에 풍부하게 남아 있는 서원에 대한 관련 기록을 종합한다면 석실서원의 정치사회적 위상과 함께 경기 지역 서원의 존재 형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참고문헌]
■ 오항녕, 「석실서원의 미호 김원행과 그의 사상」, 『북한강 유역의 정치사상』, 한림대아시아문화연구, 1998.
■ 이경구, 「김원행의 실심(實心) 강조와 석실서원에서의 교육활동」, 『진단학보』88, 1999.
■ 조준호, 「조선후기 석실서원의 위상과 학풍」, 『조선시대사학보』11, 1999.
■ 『한국역사용어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http://thesaurus.history.go.kr/.

■ [집필자] 조준호